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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정변>

● 대표적인 문벌 귀족으로 위세가 대단했던 김부식의 아들이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그을리게 하여 조롱하는 등

문신들이 무신을 얕잡아 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 장군, 여진족을 정벌한 윤관 장군도 모두 문신의 신분으로 군사 지식마저도 뛰어나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일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없는 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자 문인들은 더이상의 무술 연마를 게을리하고 시, 문장 짓는 일에 몰두하면서 점차 무예와 무인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 의종이 행차 중에 오병 수박희라고 불리는 무예 겨루기를 무신들에게 시켰는데, 늙은 장군인 이소응이 대결 중 몸을 피하자 젊은 문신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본 문신들을 매우 격노하였고, 무신 정중부, 이의방 등이 앞장 서서 정변을 일으킵니다.

 

● 이 무신정변에서 한뢰가 죽임을 당하고, 수많은 문신들이 살해를 당하고 맙니다.

 

● 무신들은 의종을 내쫒고 명종을 세웠으며, 정중부는 문신만이 오를 수 있었던 최고 지위인 문하시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명종은 무신들의 눈치만 보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하였고 무신 집권자들간의 권력 다툼으로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 순으로 권력의 이동도 계속 되었습니다.

 

● 천민 출신 이의민이 최고 권력자가 되는 것을 지켜본 백성들은 더이상 불만을 억누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무신 집권자들의 친인척 횡포와 가혹한 수탈에 못견딘 백성들은 전국 여기저기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 조위총의 난, 만적의 난, 망이 망소이의 난, 전주 관노의 난, 김사미 효심의 난 등 전국 곳곳에서 난이 일어났으나 결국 모두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최씨 정권>

 

● 이의민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말뿐인 개혁안, 봉사10조를 올리면서

뒤로는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주무르려 하였고, 자신의 호위 부대인 도방도 만들어 반란의 싹을 자르려 했습니다.

 

● 최충헌이 죽은 뒤 아들 최우, 손자, 증손자까지 권력을 대물림하여 4대간 독재를 할만큼 그 권력이 어마어마했던 것 같습니다.

 

●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무신들에게 약했던 문학, 행정 관련된 일을 도맡아 해줄 문인 집단인 서방을 설치하고, 최씨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색출하는 야별초를 만드는 등 권력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나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60여년간 독재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고려VS몽고의 30년 전쟁>

 

● 최씨 정권의 안정기에 몽고의 칭기즈칸은 러시아, 페르시아까지 아우르는 무자비한 정복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 힘을 합쳐 거란과 싸웠던 고려와 몽고는 이후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몽고는 턱없이 많은 물품을 조공으로 요구하고 사신의 행동도 무례하였다고 합니다.

저고여라는 몽고 사신이 본국으로 가던 중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몽고는 고려의 짓이라고 믿으며 외교 단절을 단행합니다.

 

● 1231년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이 고려로 쳐들어왔고, 각 지역으로 퍼져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점령한 성들에 몽고 관리인 다루가치를 두었습니다.

 

 

● 1232년 최우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다루가치를 죽이며 몽고에 저항하기로 결심합니다.

강화도는 몽고의 침입에 비교적 안전한 지리적 요건을 가지고 있었기에 강화도는 새로운 도읍으로서 활발하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몽고의 침입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은 거의 유일한 지역이 바로 이 임시 도읍지인 강화도였습니다.

 

● 몽고는 고려가 도읍을 몰래 옮기고 다루가치까지 죽인 사실을 알고 6차에 걸쳐 30여년간 고려를 침략하였고 고려 땅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 무신정권은 강화도 지키기에만 급급하였고, 몽고군의 칼받이로 백성들을 앞세웠습니다.

 

● 몽고군에 순순히 항복하지 않았던 문대. 살리타를 죽인 승려 김윤후, 목숨바쳐 성을 지켜낸 충주성 노비들, 그리고 귀주성 백성과 박서.

이들은 무신정권의 무능한 몽고와의 항쟁에서 빛나는 고려인의 정신을 보여준 이들이었습니다.

 

● 몽고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자 많은 관리와 백성들이 십수년간 정성을 바쳐 팔만대장경을 완성시켰습니다.

 

 

 

 

 

<무신정권 종말과 삼별초 항쟁>

 

● 백성들이 죽어가고 강화도마저 관리들이 굶어 죽을 정도로 나라가 피폐해져 가는데도 집권자인 최의는 본인의 권력 유지를 위해

전쟁을 계속 하자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 이에 다른 무신들이 삼별초를 시켜 최의를 제거함으로써 최씨 정권의 60년 독재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 고려태자가 몽고 칸에게 인사를 드리는 조건으로 고려와 몽고는 전쟁을 중지하고 강화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때 쿠빌라이가 칸이 되어 나라 이름을 '원'이라고 칭하였습니다.

 

●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몽고 제국은 작은 나라 고려를 끝끝내 차지하지 못하였고, 고려도 몽고 제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립국으로 보장받았습니다.

 

● 최의가 제거된 이후에도 권력이 이동하며 무신정권이 지속되었지만, 왕인 원종은 이전의 왕처럼 눌려지내지 않았습니다.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고 있던 원종이었으므로 몇차례 위기를 겪었으나 결국 다시 왕의 자리로 돌아와 무신정권에 마침표를 찍고 다시 도읍을 개경으로 옮기게 됩니다.

 

● 최우가 창설한 야별초에서 시작된 부대인 삼별초는 원나라 군대가 지키고 있는 개경으로 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무신 정권을 지지하는 부대였기 때문에

원종과의 사이도 좋지 않은 터였습니다.

 

● 원종이 삼별초 해산을 명하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삼별초는 원나라와의 항쟁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됩니다.

 

●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옮기며 항쟁을 계속하던 삼별초는 고려 원 연합군에 의해 1273년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고려와 원>

 

● 쿠빌라이의 막내딸과 원종의 아들인 충렬왕이 혼인을 하면서, 이때부터 으레 고려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 사위인 고려 왕을 통해 고려 정치에 간섭하려는 속셈으로 고려와 원과의 혼인을 주도하고,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고려를 관리하려 들었습니다.

 

● 충렬왕이 즉위한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제후국이므로 , 폐하 대신 전하, 짐 대신 고, 태자 대신 세자를 쓰도록 압박하였습니다.

 

● 충렬왕부터 공민왕 이전까지 왕 이름에 '충'자가 들어가는 것은 원나라 황제에게 충성하였다는 의미였습니다.

 

(● 몽고 제국의 영토가 아시아, 유럽을 아우르고 있어 사람들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습니다. 베네치아 상인인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서 머물다

돌아가 지은 책이 바로 동방견문록입니다. )

 

●  충렬왕은 몽고식 변발을 하고 신하들에게도 변발과 몽고옷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 원과의 활발한 교류로 몽고의 용어와 물건들이 들어오고, 원으로 유학을 가는 젊은이도 많아졌으며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하는 상인들도 활동도 활발했다고 합니다.

 

 

 

 

 

 

제 포스팅이 도움이 좀 되셨나요??

 

다음시간에는 고려 말의 역사와 새 나라 조선이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할게요 ^^

 

 

 

즐겁고 씐나게~ 공부하시고,

다음 시간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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