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훈족의 습격과 게르만 민족의 이동

훈족은 아시아 초원에 살았던 유목민족이다. 

370년경 유럽 침략을 시작으로 140년 동안 유럽 대부분을 점령하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말을 이용해 이동성이 뛰어나고 활을 사용했다.

게르만족 중에서 서고트족은 훈족의 침략을 피해 로마 제국으로 대거 이동했다.

로마는 서고트족을 로마에서 살게 해주었지만 점차 서고트족을 차별하기 시작했고 화가 난 서고트족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침략하게 된다.

로마가 혼란스러워지자 다른 게르만족들도 로마로 모여들었다. 이것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다.

당시 로마는 부정부패로 썩어있었고 너무 거대한 영토로 하나로 다스리기가 힘이 들었기때문에 결국 395년에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가 되었는데, 대부분의 게르만족이 서로마로 향했다.

동로마는 비교적 경제가 튼튼하고 침입해 오는 게르만족을 잘 막아냈는데,  서로마는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는데다가 수많은 게르만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그러다 훈족이 서로마로 쳐들어왔고 서로마제국은 훈족의 왕 아틸라의 공격에 게르만족의 힘까지 빌려 이에 맞섰다.

갈리아의 카탈라우눔 전투가 그 중 하나다.

교황 레오1세가 아틸라를 만나 그를 설득해 로마를 떠나도록 했지만, 이미 서로마 제국의 기력은 쇠할데로 쇠해지고 말았다.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소년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게르만족 장군에 의해 폐위되고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프랑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끝날 무렵인 5세기 말에 프랑크 족이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프랑크 왕국의 초대 국왕인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1세가 프랑크족을 통합하고 파리를 수도로 삼았다.

메로빙거 왕조는 자손들의 분열로 힘을 잃게 되고 계속되는 내분에 의해 가장 높은 관리인 궁재(피핀3세)가 왕의 업무를 보게 되었다.

피핀3세는 스스로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어 카롤링거 왕조의 시대를 열었다.

프랑크왕국은 로마 가톨릭과 관계를 다져나가며 서유럽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피핀3세의 아들 카를1세 (카롤루스 대제)가 즉위하고는 서유럽을 완전히 장악하고 통일시켰다.

카롤루스 대제 시대에 프랑크 왕국은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또한 문예 부흥에도 힘을 쓰고 학문과 예술을 후원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계승자 루트비히1세가 죽은 후 프랑크 왕국은 세 나라로 분열되었는데 이 세 나라가 이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의 기초가 된다.

세 나라로 분열되는 당시 동프랑크, 중프랑크, 서프랑크로 나뉘어졌는데 서프랑크는 노르만족(바이킹) 침입에 시달리다가 노르만족에게 노르망디 지역 땅을 내주어 살게 했다.

동프랑크의 하인리히1세가 동프랑크의 땅을 넓혔고, 아들 오토1세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동프랑크의 통일을 추진했다. 오토1세는 이후 신성로마제국(첫 이름은 오토제국)의 창시자가 된다.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의 옛 명칭이다.

비잔티움 제국

비잔티움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몰락 후 살아남은 동로마 제국을 말한다. 

황제가 신격화되어 왕권이 강했다.

하지만 너무 넓은 영토 탓에 외부 침략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보호하는 거대한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바다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한 그리스의 불 덕분에 외세의 침입에도 1000년간 유지할 수 있었다.

 

 

 

 

 

 

반응형

'공부하며 > Why 시리즈 ' 카테고리의 다른 글

Why? 책_ 헤겔의 역사철학강의 편 요약  (0) 2018.01.30
728x90
반응형

 

중국 문명은 황허 강 유역에서 나타난 황허 문명과 양쯔 강 유역에서 나타난 양쯔 강 문명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일찍부터 공동체 정신이 자리잡고 있어서 개인의 자유가 없었고 합리적인 법률도 존재하지 않았다. 권위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었다.

 

 

헤겔은 고대 중국 사회에는 자유가 없기 때문에 내면의 정신이 발전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헤겔은 동양, 즉 중국이 소년기 또는 유아기라고 평가했다.

 

 

헤겔은 인도를 공상의 나라라고 했다.

 

 

현실보다 꿈 같은 세계를 추구하다 보니 다양한 자연과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게 됐고, 이들이 각각 신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인도에는 유독 신이 많다. 먹거리가 풍부하고 외적 침입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 걱정할 일이 적으니 자연스레 공상에 빠졌다.

 

 

 

헤겔은 인도에는 국가의 존재 원리인 자유가 전혀 없으므로 민족은 있어도 국가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인의 자립성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보다 정치적으로 발전했다고 평했다.

 

 

 

인도의 세습적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는 1955년 폐지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큰 사회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

 

 

인도는 이러한 카스트 제도로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 한계가 있었고 헤겔은 이러한 한계 때문에 인도에는 국가가 생겨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인도를 세계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카스트에 4가지 계급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에 속하지 못하는 최하층 계급인 불가촉천민은 달리트라 불리는데, 힌두교에서 더럽고 천한 일이라 여기는 직업만 가질 수 있었다.

 

 

페르시아는 오늘의 중동 지역에 있는 고대 국가로 군사, 정치, 경제,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제국으로 불릴 만한 위상을 자랑했다.

 

 

특히 다리우스 1세 시대에 최전성기를 맞이했으나 그리스 원정 실패와 내부 분열로 쇠퇴했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헤겔은 이곳을 가리켜 세계사가 진정으로 시작된 곳이라고 말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성이 있을 뿐 아니라 개인의 자유가 존재하는 곳이어서 헤겔의 세계사적 정신에 부합하는 곳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을 이루는 주 민족인 젠드 족은 조로아스터교(페르시아 철학자 자라투스타라가 만든 종교)를 믿었는데 그 교리에 따라 정신과 육체를 깨끗이함을 물론, 생물을 보호하며 나무를 심는데 힘썼다.

 

 

여러 나라를 통일하여 세운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는 각 민족의 언어와 종교를 인정해주었다. 덕분에 제국의 조화를 유지하는 선에서 독립적인 문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을 구성했던 한 민족인 이집트는 자연에 정신이 지배당하는 원시 종교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의 영혼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다라는 인식(미라 제작)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두고 헤겔은 이집트는 독립하고픈 충동을 느끼지만, 자신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청년에는 이르지 못한 소년과 같다.” 라고 말했다.

 

 

페르시아의 바통을 이어받은 그리스는 자연에서 벗어나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스 이전의 이집트 스핑크스는 반인반수 형태로 자연과 인간이 섞여있었으나 인간을 주목하는 그리스에서는 주로 사람을 소재로 조각상을 만들었다. (세계사의 청년기)

 

 

미술 뿐 아니라 연극, 노래, 춤 등 인간의 몸을 이용해서 정신을 표현하는 활동이 발달했다.

 

 

즉 인간 중심의 사상을 꽃피우고 그에 맞춰 자유 의식도 뚜렷해졌다. 아고라에 모여 토론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것처럼 민주 정치를 행했다.

 

 

그러나 완벽한 민주 형태는 아니어서 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신탁 정치를 했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이후 페르시아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등 전쟁의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식민지를 많이 만들면서 노예가 생겨났고 노예를 희생시켜 자유를 얻었다. 일 대신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더 많은 자유를 원하게 되었고, 소피스트(아테네의 자유민으로 변론술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궤변이 번지면서 혼란이 가중되어 갔다.

 

 

 

결국 개인의 자유가 국가의 법률마저 위협하게 되었고, 도덕성이 타락하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스의 뒤를 이어 서방 세계의 주인공이 된 로마는 유럽부터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지중해 패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가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는데 한니발 전쟁이라 불리는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한니발군을 격파하고 3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켜 완전히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해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로마는 그리스와 달리 개인이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했고 개인의 정신이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도덕과 분리된 개념의 엄격한 법이 탄생하여 전체를 다스릴 수 있었다.

 

 

헤겔은 로마의 자유의식이 그리스보다 낫다고 평하면서 장년기로 비유했다.

 

 

그리스는 반성 없는 자유였던 반면, 로마는 국가와 정치를 개인 위에 두어 철저히 복종하게 만들었음에도 내면으로는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즉 외부의 엄격한 규율과 추상적인 내면의 자유가 서로 부딪히지 않고 공존했다.

 

 

사람들의 정신이 발달하니 종교 역시 내용과 정신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크리스트교가 로마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크리스트교는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로마 국교로 인정받았다.

 

 

게르만족이 로마의 지배를 받은 이후 로마를 무너뜨리고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프랑크왕국은 로마 교회와 연합해서 크리스트교적인 사회를 만들었다. 프랑크 국왕인 사를마뉴 대제가 죽은 후 곧 프랑크왕국은 멸망했고 더 이상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지 못하자 지방 권력자들을 중심으로 영주, 농민간의 봉건제도가 성립하게 되었다.

 

 

이와중에 크리스트교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 교회는 세속의 일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

 

중세 봉건 사회가 되면서 순결, 빈곤, 복종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유흥, 결혼등을 나쁘게 생각했다.

 

또한 신에 대한 복종이 최고의 가치였기 때문에 정의나 법률이 무시당하고 타락, 배신 비도덕이 만연하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 가톨릭 권력이 약해졌으며 이는 곧 봉건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또 이슬람과의 접촉으로 문화. 예술, 학문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서양인은 신, 종교가 아닌 정신적으로 자립한 인간을 추구하게 되었고 주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이후에 등장한 군주제에서는 이전의 봉건제와는 달리 주는 있되, ‘에 해당하는 개념이 사라지고 더 자유로워졌다.

 

 

 

헤겔은 역사 철학 강의에서 독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새 시대를 연 군주라고 평가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통치에 반대하고 볼테르의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같은 선진국으로 만들려는 꿈이 있었다.

 

즉위 후 예술 문화 부흥에 힘쓴 반면 아버지의 군국주의를 이어받아 강대국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등 군사력을 전 유럽에 떨쳤다.

 

 

 

프랑스 혁명 후 자유주의가 자리잡았으나, 이로 인해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이 커서 자유주의가 이를 뛰어 넘지 못하고 결국 몰락했으며 몇몇 국가는 이전 모습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기 위한 여정에는 이러한 성장통이 동반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항상 자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만들어왔다.

 

 

 

헤겔이 바라본 세계사의 한계

 

- 유럽 위주의 시선을 가지고 세계사를 바라보았으며 동양사회를 매우 낮게 평가했다.

 

- 중국 고대 전제 왕권 시대만 보고 중국 역사 전체를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동양 역사나 문화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

 

- 역사를 절대정신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독재자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히틀러나 일본의 제국주의는 헤겔의 철학에 기반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 철학의 핵심인 인정사상은 노예제 해체를 뒷받침 하는 근거가 되며,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로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상적 근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반응형

'공부하며 > Why 시리즈 ' 카테고리의 다른 글

Why책 유럽의 성립과 발전 요약정리  (0) 2023.12.1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