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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종 때 문신이 무신보다 더 대우받고 무신이 홀대받음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아들이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일부러 촛불로 그을려 태워먹고 화가 난 정중부가 김부식 아들을 팸

이걸 다 보고 있던 왕도 딱히 김부식 아들을 혼내지 않았고, 최고 관직에 있던 김부식은 자기 아들이 맞은거에 화가 나 정중부를 벌해달라고 청함.

왕은 정중부를 벌하지는 않고 잠시 피신 시킴. 정중부는 새파랗게 어린 문관에게 수염까지 잃고 모욕을 당했는데 오히려 본인이 피신을 해야 하는 상황에 1차로 딥빡이 옴.

인종의 아들 의종 때 의종은 연회 마니아였는데 그 때마다 문신들은 왕과 연회를 즐기고 여름엔 뙤약볕, 겨울엔 추위속에 무신들은 계속 호위를 해야했음.

무신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정변을 일으킬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의종이 갑자기 연 무술대회에서 한 노장이 너무 힘이 들어 도망을 치려고 하자 급이 더 낮은 문신이 노장의 뺨을 갈기는 사건이 터짐. 왕과 문신들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 빡이 돈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키고 눈에 보이는 모든 문신들을 싹 다 죽이고 왕을 거제도로 유배시켜버림.

고려시대에는 왕건의 후손만이 왕이 되어야한다는 여론이 강했기 때문에 무신들이 왕권까지 차지할수는 없었음

그래서 의종의 동생이자 인종의 셋째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그가 바로 명종임.

 

 

왕은 허수아비, 무신들이 최고권력자로 백성을 수탈하고 호의호식하는 무신집권 시대가 옴. 최씨 가문이 무신집권기의 최대 권력자가 됨.

그동안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근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몽골은 고려인이 살해했다고 믿음. 하지만 그당시 다른곳을 정복하느라 바빠서 바로 고려를 침입하지는 않고 6년이나 있다가 뒷북치며 고려를 공격함.

고려는 그당시 무신들이 전쟁에 대한 긴장감이 없이 연회를 즐기느라 바빴으므로 제대로 대비를 못했음. 세계 최강군대 몽골군이 고려로 쭉쭉 진격해오다가 귀주에서 막힘. 귀주에서 박서 장군을 중심으로 한 장수들이 필사적으로 몽골군을 막아내었고 그 작은 성안에서 최강 몽골 군대에 지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우는 것을 보고 몽골인조차도 ‘이건 하늘이 돕는것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다’라고 말을 함. 귀주성에서 누구의 도움없이 외롭게 4개월가량 싸우다가 근방의 13명의 장군이 도우러와서 몽골군을 물리침 

하지만 그 사이 중앙군은 몽골군에게 패해 개경이 함락당하고 고려는 몽골에 항복함. 몽골은 박서를 죽이라고 명했으나 고려는 그냥 박서를 해임하고 귀향시킴. 고려를 지키기 위해 중앙군의 도움없이 외로운 싸움을 했던 멋진 장군 박서도 이런 식으로 푸대접을 받게 되었음. (정치하는 놈들 다 싸이코패스인 것 같음.)

몽골군은 바다 싸움에는 약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최씨 정권은 도읍을 강화도로 옮김. 웃긴 것은 전란으로 가뜩이나 피폐해져있는 서민들의 삶은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강화도에 예쁜 궁궐과 정원을 가꾸느라 민초들을 노동력으로 계속 쓰면서 괴롭힘.

몽골은 고려가 자신들과 화친을 맺어놓고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자 열받아서 다시 처들어옴. 지금의 용인 지역 '처인성'이 경상도로 내려오는 주요 길목이었는데 여기서 몽골 장수 살리타가 승려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죽음. 당황한 몽골군이 달아남. 이때 처인성을 지키면서 몽골군과 싸우던 사람들은 모두 향,소,부곡에 사는 사람들로 사회적 계급이 낮고 차별대우를 받는 사회적 약자들이었음.

그 뒤로도 몽골은 고려를 계속 쳐들어왔고, 고려인들은 불교의 힘을 빌리고자 팔만대장경을 만듦. 몽골은 지나가는 고려땅마다 엄청나게 많은 민간인을 죽여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함. 충주성까지 다다랐을 때 그 곳에 김윤후가 있었음. 김윤후는 노비 문서를 태우며 누구든지 열심히 싸우면 관직을 받을 수 있다고 사람들을 독려했고 여기에 감흥을 받은 사람들이 죽기살기로 싸워 몽골군을 물리침.

몽골군의 침입은 30년이나 계속되었고 고려인들은 목숨바쳐 이에 대항함. 그러다가 최씨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의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지고 무신정권이 몰락하면서 몽골군과 화친을 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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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 1388년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 요동으로 떠난 고려 군대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다.

○○ 이 회군을 지휘한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명령한 우왕과 최영의 명령을 어기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 이성계는 고려 말 부패한 권문세족을 비판하는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았고 반원친명정책을 폈다.


신진 사대부의 갈등

○ 신진사대부가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게 되었다.

○ 급진파 정도전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우왕은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므로 우왕의 아들, 창왕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였고 이성계의 친척인 공양왕을 세웠다.

○ 급진파는 모든 귀족과 관리가 가진 토지를 거두어들여 다시 나누는 새로운 토지 제도인 과전법을 제정하였다.


역성 혁명

○ 급진파 정도전은 왕조 자체를 바꾸는 역성 혁명을 추진했다.

○ 정몽주, 이색 등 온건파는 고려 왕조를 유지하고자 했다. 

○ 이성계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고자 했지만 실패했고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다.

○ 이성계 지지자들에 의해 이성계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된다.

○ 조선의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정도전을 새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새 나라 조선

○ 건국이념으로 유교를 선택했다.

○ 모든 고을에 국립학교 향교를 세우고, 서울에는 성균관을 세워 유교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 고려의 부패 원인을 불교라고 생각해서 팔관회, 연등회 등 불교 관련 의례를 폐지했다.

○ 도첩제를 실시하여 허가를 받아야만 승려가 될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 강하고 큰 나라는 섬기고, 일본 같은 이웃 나라와는 우호적으로 교류하겠다는 사대교린 정책을 썼다.

○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개경)을 떠나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했다.

○ 정도전은 재상중심의 정치를 원했고 태조 아들 이방원은 정도전의 생각에 가장 강력히 반발했다.

○ 태조가 둘째 부인에게서 얻은 막내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첫째 부인의 자식들은 불만이 클 수 밖에 없었고 , 개국 공신임에도 인정받지 못했던 이방원의 불만이 가장 컸다.

○ 정도전이 왕자들이 거느린 사병을 제거하려고 하자 이방원이 먼저 정도전을 제거해버린다

○ 이성계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그가 정종이 된다.

○ 정종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다시 왕자들의 싸움이 일어났고 결국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다.


태종 이방원

○ 태종 이방원은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 직접 왕에게 보고하는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 외척이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자 처남 넷을 모두 죽였다.

○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은 모두 무자비하게 죽였다

○ 전국을 8도로 나누고 여러 군현으로 나눈 후 도에 관찰사를 파견하고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여 모든 지방을 통치하고자 했다.

○ 호적제도를 정비하고 호패제를 실시했다.

○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에 의해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다시 양인으로 되돌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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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부흥운동

668년,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지만 고구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무너뜨린 장본인이지만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가 신라까지 탐내자 당나라에 등을 돌리고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지하였다.

당나라의 인질로 잡혀갔던 보장왕이 풀려나고 말갈족까지 끌어들여 고구려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보이자 

보장왕을 다시 당나라로 끌고 가버렸다.

고구려 부흥운동을 잠시 주춤해졌지만 당나라에 자리잡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에게서 부흥 운동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대조영과 새나라 진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아들 대조영이 거란족,말갈족과 함께 당나라에 저항하였다.

비록 거란족이 당나라에 항복하였지만

걸걸중상과 말갈족의 걸사비우는 항복하지 않고 계속 세력을 키워나갔다.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걸사비우는 죽고 대조영은 지도자를 잃은 말갈족까지 다 이끌고 당나라와 싸웠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당나라의 힘이 미치지 않는 동모산 위에 새 나라 '진'을 세웠다.


발해의 탄생

 

대조영은 당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 돌궐과 신라에게 사신을 보내 새 나라 건립을 알리며 외교관계를 맺었다.

'진' 나라가 점점 세력을 넓히자 당나라도 더이상 '진'나라를 우습게 볼 수 없었고 사신을 보내 

발해 군왕이라는 벼슬을 내려 어엿한 나라로 인정하였다.

이때부터 나라 이름이 '진'에서 '발해'로 변경되었다.

발해로 흡수되지 않았던 흑수말갈족이 당나라의 편에 들어갔고, 발해는 흑수말갈족에게 선제 공격을 하면서 당나라와 다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당나라는 계속해서 발해를 공격을 해왔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당나라와 사이좋게

 

대조영의 아들 무왕 때까지만 해도 당나라와 사이가 안좋았으나 3대왕 문왕이 즉위하고는 당나라와 친선관계를 맺었다.

문왕은 당나라의 앞선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당나라의 정치 제도를 가져와 3성 6부 중앙 통치 기구를 만들었다.

3성은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

6부는 충,인,의,지,예,신으로 유교 덕목을 따서 이름지었다.

발해의 국력이 올라가자 당나라는 문왕에게 발해 군왕에서 발해 국왕으로 더 높은 벼슬을 주었다.


해동성국

 

10대 선왕 때에는 흑수 말갈 정벌, 신라의 영토도 일부 차지하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때보다 두 배 가까이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넓은 영토와 융성한 문화를 가진 발해를 당나라는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한반도 북쪽은 발해가, 아래쪽은 신라가 나라를 이루어 이 때 역사를 남북국시대라고 한다.

문화의 면에서는 발해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 문화가, 문왕때부터는 당나라 문화가 널리 퍼졌고

지방에는 말갈족의 문화가 널리 퍼져있었다.

발해의 영토가 너무 넓어서 중앙의 힘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다보니 각 지방마다 고유한 문화가 남아있었고 중앙문화와 섞이지 못해 이후 발해의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발해의 멸망

 

907년에 당나라 멸망, 통일 신라도 세개의 나라로 분열되면서 동아시아의 격변의 시대가 열렸는데 

해동성국 발해도 이들과 함께 쇠퇴하기 시작했다. 

반면 유목생활을 하던 거란족이 무섭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거란족장 야율아보기가 발해에 쳐들어와 한달만에 발해를 멸망시켰다.

발해도 예전 고구려 유민들이 그랬던것처럼 발해 부흥운동을 여기저기서 벌였지만 중심세력이 없어서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거란의 횡포를 피해 많은 발해 주민들이 고려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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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000년쯤 나일 강 유역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일 강 유역은 물이 풍부해 살기가 좋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긴 나일강을 따라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나일강은 해마다 주기적으로 물이 불어나 넘쳤는데 물이 빠지고 나면 상류에서 떠 내려온 검은 흙이 하류에 쌓였다. 그 흙은 매우 기름져 곡식이 잘 자라서 잉여 농산물도 많이 생산되어 사람들은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물이 너무 넘칠 때를 대비해서 둑을 쌓고 물이 가물때를 대비해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일 강 범람을 예측하기 위해 별을 관찰하였고 관찰을 기록하기 위해 문자도 만들었다.

이렇게 기원전 3000-4000년쯤 나일강 유역에서 이집트 문명이 꽃피우게 되었다.

살기 좋은 나일강 유역에 인구가 늘어나자 이를 지휘할 리더가 필요해졌다. 나일강가에는 지도자가 다스리는 여러 마을이 생겼고 서로 땅과 재산을 차지하려고 싸우면서 작은 왕국들이 만들어졌다.

기원전 3200년쯤에는 하이집트와 상이집트 두 개의 커다란 나라만 남았다.

하이집트는 비옥한 강의 하류, 상이집트는 상대적으로 척박하고 고립된 강의 상류에 위치해있었다.

하이집트는 도시들끼리 싸우는 바람에 나라가 혼란스러웠는데 그 틈을 타 기원전 3100년쯤 상 이집트의 왕 메네스가 하 이집트를 점령하여 이집트를 통일했다.

이집트는 사막과 바다로 둘러싸여있어 다른 나라의 위협없이 평화로웠다. 

메네스가 이집트를 통일하고 500년이 지나 더욱 안정되고 힘이 커진 고왕국 시대가 열렸다.

파라오 덕분에 더욱 살기가 좋아지자 백성들은 파라오를 더욱 믿고 따랐다.

파라오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무덤을 크게 만들기 시작했고 이것이 피라미드의 시초였다.

파라오 쿠푸는 수십년간 피라미드를 만들었을 정도로 규모가 큰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고대 이집트 사회는 피라미드처럼 신분사회도 피라미드형이었다.

파라오 밑에 제사장,재상,장관,서기등의 관리

그 밑에 장인, 군인, 무희

그리고 농민, 노예순으로 계급이 있었다.

기원전 2200년경 이집트에 심한 가뭄이 들었고 사람들은 파라오를 원망하고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방관리들도 파라오의 명령을 듣지 않았고 100여년간 혼란이 계속 되었다.

멘투호테프 2세가 이 혼란을 잠재우고 이집트를 재통일해 중왕국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한번 흔들린 파라오의 권위를 되찾지는 못했다.

세누스레트 1세는 외적 격퇴, 누비아 점령으로 이집트를 다시 부강하게 하고 이때부터 100여년간 다시 한번 번영을 누렸다.

이집트의 홍수와 가뭄의 반복으로 파라오의 권위가 떨어져있을 때 힉소스 사람들이 말이 끄는 전차와 청동 무기를 앞세워서 쳐들어왔다.

이집트 파라오는 나일강 상류로 쫒겨나 힉소스에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고 누비아도 이집트로부터 독립하여 쿠시 왕국을 세우고 힉소스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힉소스가 150여년간 발전하는 동안 이집트는 힉소스를 몰아내고 다시 영광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0년 동안 전쟁준비만 해왔던 파라오 아흐모세는 전차와 무기, 커다란 배등을 만들어 전쟁을 준비했고 힉소스 정복, 팔레스타인 차지, 쿠시 왕국 (누비아) 정복을 차례로 해내며 다시 한번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번성하는 이집트를 만들었다.

기원전 1470년쯤은 최초의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가 나왔다.

하트셉수트의 뒤를 이어 파라오가 된 투트모세 3세는 이집트의 강력한 파라오 중 한 명이었다.

반란지역 카데시를 잠재우고 페니키아 도시 정복을 하며 이집트를 지중해와 서아시아지역에서 가장 크고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투트모세3세는 제사장과 손을 잡아 자신의 권위를 높였는데 그 뒤 몇 명의 파라오를 거치며 제사장의 힘이 너무 커져버렸고 파라오의 권위까지 넘보게 되었다.

아멘호테프 4세는 이크나톤이라 이름을 바꾸고 종교개혁을 통해 제사장 권력을 누르려 했으나 실패했다.

뒤를 이은 투탕카멘도 제사장의 힘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

하지만 차츰 파라오들은 다시 왕권을 회복해갔으며 람세스2세때에는 영광스러운 이집트의 전성기를 또한번 맞이하게 되었다.

철제무기를 가진 히타이트를 이길수는 없었기에 동맹관계를 맺고 다른 나라들과도 조약을 맺어 여러나라의 공주와 결혼해 많은 부인을 두었다.

람세스 2세는 도로를 닦고 도서관 건립, 아부심벨 신전 건축 등으로 화려한 이집트 문화를 만들었다.

이집트는 람세스 2세가 죽고나서 리비아와의 전쟁, 히타이트 제국을 무너뜨린 바다 민족과의 전쟁으로 국력을 많이 소모해버렸다.

그 뒤 누비아와 아시리아 왕들의 지배를 받아 외국인 왕의 시대를 겪었고 기원전 525년에는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정복했다.

페르시아가 200년이나 이집트를 다스렸는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를 몰아냈다.

페르시아를 미워했던 이집트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를 파라오로 추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이름을 따 이집트의 도시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수도로 삼았다.

갑작스러운 알렉산드로스 왕의 죽음으로 부하인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무려 300년동안 이집트를 다스렸다. 

지중해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여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더욱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로마가 지중해 연안의 모든 지역을 정복하고 이집트만 남겨두고 있었을 때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해 미모로 카르사르를 사로잡는다.

카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로마의 후계자로 세우려고 했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계획이 틀어진다.

로마의 새 실력자 안토니우스도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해 함께 이집트를 지키려고 하고 

새로 권력을 잡은 로마의 옥타비아누스와 계속 맞섰으나 로마에 패배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끝내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국 이집트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고대 이집트 문명을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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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드 제국

수메르 도시 국가들이 서로 전쟁을 하느라 쇠약해지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셈족의 사르곤이 쳐들어왔다.

사르곤 왕은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을 하나씩 정복해나가 수메르 지역을 통일하고 메소포타미아에 최초의 통일 제국인 아카드 제국을 세우게 된다.

강한 군대를 만들고 수도 아카드를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아카드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하였다. 아카드제국은 다른 나라와 활발한 무역활동도 하였다. 

사르곤 대왕의 손자 나람신 왕때 아카드 제국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나람신 왕이 죽은 후 이민족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바빌로니아

아카드제국이 망하자 메소포타미아에는 다시 작은 왕국들이 서로 힘을 다투어 영역싸움을 했다.

작은 왕국 중 하나였던 바빌론에 함무라비 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신중한 전략과 외교술을 이용해 메소포타미아지역을 재통일했다.

함무라비왕때부터 바빌론 왕국에서 바빌로니아 제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함무라비왕은 사회를 안정시키고 문화를 부흥시켜 바빌로니아 제국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기원전 1595년 히타이트족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히타이트 제국

중앙아시아에 살던 히타이트족이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강력한 전차 군대를 가지고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여러나를 정복했다.

전차와 우수한 철제무기덕분에 200년 가까이 오리엔트 지역의 최강자가 되었다.

기원전 1200년 경 히타이트제국은 이름 모를 민족의 침략으로 갑작스럽게 멸망했다.

 

페니키아

셈족 중 일부가 지중해 동쪽에 자리잡고 항구를 중심으로 도시 국가들이 생겨났는데 이 국가들의 연맹이 페니키아였다.

페니키아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길목에 있어 무역에 유리하였다.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힘이 약해지자 그 틈을 타 기원전 1100년 쯤 독립했다. 그 후 지중해를 누비며 해양 무역을 독차지 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페니키아는 배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고 알파벳을 발명해 문자 문명을 널리 퍼뜨렸다.

기원전 9세기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아 쇠퇴하기 시작했다.

 

헤브라이 왕국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사람들은 다신교를 주로 믿었는데 헤브라이 사람들은 야훼라는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교를 믿었다.

힉소스족에게 협력하여 이집트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는데 힉소스 왕조가 물러나자 이집트의 핍박을 받았다.

이집트 왕이 헤브라이족의 남자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했는데, 바구니에 담겨져 살아남은 남자아이가 있었고 그 아기가 헤브라이 민족의 영웅 모세였다.

모세가 헤브라이사람들을 이끌고 야훼가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갔으나 그곳은 이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부족이 살고 있었고 가나안 땅을 두고 다툼이 시작되었다.

헤브라이왕국의 다윗왕은 가나안의 여러부족을 통일,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헤브라이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이 즉위하고 국방, 경제, 문화를 발전시켜나갔다.

하지만 대규모 건축사업과 군대 증강으로 과도한 세금을 걷고 백성들의 노역을 시키는 바람에 불만이 커졌다.

솔로몬 왕이 죽자 내란이 일어났고 거듭되는 혼란으로 북부는 아시리아제국에 의해, 남부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다.

 

아시리아

강력한 철제 무기와 군사력으로 기원전 750년전 부터 시리아, 페니키아,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이집트마저 정복했다.

아시리아 전사들은 정복한 도시에 불을 질러 철저하게 파괴시켰다.

반란자는 잔인하게 죽였다. 

 

신바빌로니아 제국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칼데아 사람들이 세력을 키워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고 바빌로니아 제국의 영광을 찾기 위해 신바빌로니아 제국으로 이름짓고 나라를 세웠다.

네부카드네자르2세는 무역 도시를 정복하고 국제 무역을 손에 넣었으며 화려하게 신전과 제단, 건축물을 세웠다.

향수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 인공 산을 만들고 꽃과 나무를 심어 공중 정원을 지은 것이 유명하다.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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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시작

기원전 8000년경 대부분 사람들은 수렵 채집활동을 하고 여기저기로 이동하면서 생활을 해나갔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불리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기름진 땅에 도착한 사람들은 더이상 이동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기후가 따뜻하고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해서 정착생활을 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가 바로 세계에서 처음으로 농사를 시작한 곳이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농경지 근처로 모여 살게 되고 촌락을 이루게 되었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도 촌락이 생겼고 사람들은 강 상류 산기슭에 모여살았다.

강물을 끌어와 물길을 만들고 저수지를 만드는 등 자연환경을 이용할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강 상류 뿐 아니라 강 하류로도 생활터전을 넓혀나갔다.

메소포타미아 평야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길목에 있어 유목민들이 자주 드나들었는데 수메르인들도 그런 유목민중 하나였고 기원전 35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해 살았다.

잉여농산물이 생기자 모두 농부가 될 필요가 없었기에 상인, 수공업자등 다른 직업들도 생겨났다.

촌락들은 점점 커져 도시를 이루고 도시를 중심으로하는 도시국가가 생겨났다.

수메르인들이 바로 인류최초의 문명을 일으킨 것이다.


수메르 도시국가

수메르인의 도시국가에는 다른 부족의 침략이 잦았다.

홍수,가뭄도 자주 겪어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 '지구라트' 라는 신전을 지었다.

수메르 도시 국가는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사제의 권력이 점차 커졌고, 사제가 여러가지를 기록하기 위해 '문자'의 필요성이 생겼다.

문자는 점토판에 갈대끝으로 찍어 새겼는데, 이를 쐐기문자라고 한다. 

이 쐐기문자가 인류 최초의 문자이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것은 '서기'만 할 수 있었고, 교사, 의사같은 다양한 직업들이 이때 생겨났다. 

매매 거래는 점토판으로 계약서를 만들고 도장을 사용했다.


왕권 강화

수메르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전쟁을 벌이고 다른 부족이 침략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사제 중심에서 장군 중심으로 바뀌어갔다.

장군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자신의 지위를 대물림하는 일이 생기면서 왕조가 생겨났다.

왕은 사람들로부터 신처럼 떠받들려졌고 죽으면 왕을 모실 사람들을 같이 생매장하기도 했다.

수메르 도시국가 중 리가시의 왕 우르카기나는 다른 왕들과 달리 고통 받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여러가지 개혁을 한 왕이었다.

우르카기나 왕의 칙령을 적은 문서는 현존 법률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메르의 여러 도시 국가들은 서로 경쟁하며 발전해나갔다. 

메소포타미아 근처를 떠돌던 셈족이 쳐들어와 수메르 도시 국가들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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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박지원의 한문소설 허생전의 주인공이다.

평생 글만 읽고 생계꾸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던 허생은, 

아내의 질책을 듣고 백성들의 삶을 알아보고 실천하는 학문을 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온다.

서울갑부 변씨로부터 만냥을 빌려 시장의 모든 과일(제사에 쓰이는 모든 것들)을 2배 가격을 불러 사들이고

국민들이 과일이 없어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자 상인들에게 10배의 가격을 매겨 판다.

그야말로 매점매석의 대가로 거듭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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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이었으나 살기가 어려워져 도적이 된 무리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이들을 무인도로 데려가 잘먹고 잘살수 있는 방법을 실험하고 대성공을 거둔다.

쌀농사로 엄청난 수확을 거두어서 흉년과 기근으로 힘든 일본에 가서 쌀을 팔아 엄청난 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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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갑부 변씨에게 빌린돈 만냥 뿐 아니라 이자까지 쳐서 10만냥을 주고

다시 허생은 집으로 돌아온다.

변씨는 허생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어영청 대장 이완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완이 나라가 잘 살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되느냐고 물었는데 허생이 말한 3가지 방도를 이완은 다 실행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고

이완의 이야기에 허생은 노발대발하여 이완이 도망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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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지원의 소설이기에 박지원의 생각이 반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허생이 실학을 옹호하고

배청의식이 강했던 시기에 북학론(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던 점이 그러하다.

조선시대을 지배했던 성리학의 모순을 비판하고 실제 현실을 개혁할 필요성을 느껴서 제기된 것이 바로 실학이다.

실학은 특히 신분과 상관없이 능력이 있는 자는 고위직에 올라 나랏일을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고

모든 백성들이 땅을 골고루 소유하고 자기 땅에서 자기 일을 할 수 있어야 된다고 보았다.

 

실학이론 중 이용후생은 백성의 일상적 생활에 이롭게 쓰이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실학이다라고 주장하였고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데 실익을 증진시켜야 하며,  현실문제를 농업혁신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 경세치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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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의 탕평책 ●

▶ 영조는 즉위 후 붕당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습니다.

 

▶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이며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오래 살았고, 재위 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었습니다.

 

▶ 처음에는 탕평책을 잘 썼지만, 소론 세력과의 화합에 실패해서 소론 대부분을 내쫒고 붕당 싸움에 휘말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양반의 사치스러운 생활 금지,  곡식 낭비를 줄이고자 금주령 시행, 합리적인 형벌제도, 신문고 부활, 군포 축소, 균역법 등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를 많이 한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18세기 조선 ●

 

▶ 17세기 동안 전후 복구를 위해 애쓴 덕분에 논에 물을 대는 저수지를 많이 만들고 모내기법이 활성화 되어 벼의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 토지 매매가 유행하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발생하고 땅을 잃은 농민들은 수공업이나 광산, 포구로 일거리를 찾아나서게 됩니다.

이에 자연스레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거래를 위한 화폐로 상평통보가 널리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 정조 ●

 

▶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붕당이 다시 한번 갈라졌는데, 사도세자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쪽을 벽파,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던 쪽을 시파라고 불렀습니다.

벽파에는 노론 대부분이 속했고, 시파에는 소론과 노론 일부, 남인이 속해있었습니다.

 

▶ 벽파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세손의 즉위를 막았지만 정조는 무사히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 붕당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붕당에 상관없이 사람됨과 능력을 보고 인재를 뽑아 쓰고자 했습니다.

젊고 능력있는 인재들은 규장각으로 모아 공부에 매진하게 하고 많은 도서를 간행하고 수집하도록 하였습니다.

 

▶ 왕의 특별 부대인 장용영을 만들어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고 시전의 특권을 없애고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상업을 발달시켰기도 합니다.

 

▶ 노론의 텃밭인 한양을 벗어나 새로운 정치를 하고자 수원에 화성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규장각 출신의 정약용이 거중기, 유형거를 개발하여 화성 공사가 단기간에 완공될수 있었습니다.

 

▶ 수원 화성은, 화성 공사에 대해 빠짐없이 정리한 화성 성역 의궤 덕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 정조는 궁 밖 행차를 할 때마다 백성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했고, 노비 제도를 없애 모든 노비를 양인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생전에 노비 해방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사후 관청의 공노비들을 실제로 해방이 되었습니다.

 

 

 

● 실학 ●

 

▶ 조선 후기에는 현실을 개혁하고 백성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현실적인 학문, 실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실학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 실학의 선구자 유형원은 저서 [반계수록] 에서 자신이 목격한 조선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농업에서 찾았고, 모든 땅을 나라의 것으로 삼은 후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눠 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형원의 아이디어를 좀 더 현실적인 모습으로 바꾼 이익도 대표적인 실학자가 되겠습니다.

 

▶ 우리땅, 우리역사에 관심을 보인 실학자로는 발해고를 쓴 유득공,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 택리지를 쓴 이중환 등이 있었고,

▶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 조선의 상업구조의 문제점을 밝혔고 양반전이나 호질에서 양반들의 위선과 사회 문제들을 꼬집었습니다.

 

박지원은 청나라를 다녀 온 후 열하일기를 통해 외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고 상공업을 발전시켜 경제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북학파라고 합니다.

 

▶ 규장각 학자 출신인 박제가도 북학의를 통해 청나라 기술을 알리고 조선의 문제점과 대책을 기술하였습니다.

 

▶ 홍대용은 모든 사람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신분제도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으며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야 조선이 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실학은 정약용 덕분에 더욱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약용은 조선 정치, 경제, 과학, 역사, 철학 등 모든 분야의 학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조가 죽은 후 다시 노론이 득세하자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18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유배 생활동안 500여권의

책을 썼으며 대표적인 책이 목민심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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