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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 

 

●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는 멸망한 후에도 당의 지배를 반대하며 부흥운동을 계속했다.

 

● 당나라와 사이가 틀어진 신라도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도왔고, 고구려 왕족 안승과 귀족 검모잠등이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 당나라 영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말갈족 걸사비우가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며 당나라와의 전투를 이어나갔지만

그 무렵 둘 다 죽고나서 이들의 운명은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에게 달리게 되었다.

 

●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흑수말갈 제외)을 이끌고 동모산으로 가 새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진이라고 했다.

 

● 대조영은 돌궐, 신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말갈족을 흡수하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아 나갔다.

 

● 713년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 719년 대조영이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 무왕은 흑수말갈을 공격하여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흑수말갈과 당나라와의 외교를 차단시켰다.

 

● 당나라가 발해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차례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 3대 문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당나라와의 관계가 친선관계로 바뀌었다.

 

● 문왕은 당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빌해의 제도를 정비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 당나라의 정치 제도를 본떠 3성 6부제의 중앙 통치 기구를 만들되 운영방식은 발해만의 독자적인 방식을 썼다.

 

● 발해의 국력이 커져가자 당나라도 발해 군왕에서 발해 국왕으로 위치를 한 단계 격상시켜 주었다. 문왕은 커져가는 국력을 발판 삼아 주변 나라들과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 제 10대 선왕은 북쪽으로 흑수말갈을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지방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그리고 남쪽 신라를 공격하여 대동강까지 진출하였다.

 

● 선왕 때 발해가 차지한 땅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때보다 두배 가까이 넓었다.

 

● 넓은 영토와 융성한 문화를 누리는 발해를 보고 당나라는 '동쪽의 가장 융성한 나라' 라는 뜻으로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 3대 문왕이후로 당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다보니 무덤 형식, 제도, 놀이, 물건 등 당나라 문화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 중앙의 문화가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지방에는 고구려, 당나라 문화가 아닌 말갈 문화가 보편적이었다.

 

● 중앙 문화와 지방의 말갈 문화가 서로 섞이지 못한 것은 이후 발해 쇠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10세기에 접어들면서 당나라, 통일신라 , 발해 세 나라 모두 쇠퇴의 길로 접어든 한편 서쪽의 거란족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 거란족을 통합한 야율아보기는 나라를 세우고 , 국경을 넘어와 발해땅을 자주 공격하여 발해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 통일신라는 후고구려 후백제 등 나라가 셋으로 갈라져 서로 맞서 싸우는 터라 발해를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 거란에 무너진 발해는 이후에 오랫동안 부흥운동이 일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 934년 발해 왕자 대광현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 고려로의 망명이 계속 이어져 많은 발해 사람들이 고려로 망명해 살게 되었다.

 

● 같은 고구려 후손이라는 생각으로 고려 사람들은 발해사람들을 환영했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공공의 적으로 생각했다.

 

● 고려 왕건은 거란이 보낸 낙타를 만부교 밑에서 굶어죽게 하는 등 거란과의 화친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늘은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열었던 주역인 발해에 관해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는 한국사 정리 포스팅이 되었길 바라면서

 

마무리할게요 ^^

 

 

 

열공, 즐공하시고 다음 시간에도 더욱 유익한 공부 자료들로 만나도록 합시다.

 

See you s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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