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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

 

 

 

 

주몽, 고구려를 세우다.

 

 

 

건국설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와 하늘의 신 해모수가 사랑에 빠졌다.

 

 

 

이를 알게 된 하백이 유화를 내쫒았는데, 부여의 금와왕이 이를 불쌍하게 여겨 유화를 거두었다.

 

 

 

알에서 태어난 고주몽이 활 실력도 뛰어나고 각종 무예에 뛰어나니 금와왕의 왕자들이 자신들의 자리에 위협을 느껴 주몽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남쪽땅으로 내려와 졸본에 자리를 잡고 고구려를 세웠다.

 

 

 

유리왕, 대무신왕.. 고국천왕 등 왕위를 이어오면서 왕권이 더욱더 강해졌고, 계루부 고씨가 계속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

 

였다.

 

 

 

220년 한나라가 망한 후 중국은 위,,오 세 나라로 갈라져 전쟁이 극심해졌다.

 

 

 

이 중 힘이 센 위나라가 고구려를 자주 침범했고, 동천왕, 미천왕때에 위와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고국원왕때는 전연이라는 나라가 침입하여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잡아가고, 미천왕의 무덤을 훼손하는 등 비통

 

한 일들을 겪었다.

 

 

 

고국원왕 자신도 백제(근초고왕때) 와의 싸움에서 백제 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소수림왕은 전연과 백제에 복수하는 것을 미루고, 나라에 제도를 정비하는 데 먼저 힘을 기울였다.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이라는 교육 기관을 세웠으며, 율령을 반포하였다.

 

 

 

 

 

 

고구려의 성장

 

 

 

 

391년 광개토대왕이 17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잃어버린 고구려의 땅을 되찾기 위해 백제와 전연(->후연)의 정복활동을 시작하였다.

 

 

 

백제의 관미성과 한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다.

 

 

 

고구려가 왜의 침입을 받고 있는 신라를 구원하러 간 사이, 후연이 침입하여 땅을 빼앗아 갔고, 이로써 본격적인 후연 정복 활동을 함으로써 동북아시아 최고 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즉위한 후, 중국과는 외교적으로 정면충돌을 피하고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고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반발하는 백제가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맞섰으나 장수왕은 백제 도읍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

 

왕을 죽였다.

 

 

 

신라도 공격하고 남한강 가에 중원 고구려비를 세웠다.

 

 

 

 

 

 

고구려의 문화

 

 

 

 

 

 

 

 

 

 

 

 

 

 

 

 

 

 

 

 

 

신랑이 신부집에서 머물며 일을 해주다가 아이를 낳고 , 그 아이가 다 자라면 신랑집으로 돌아가는 데릴사위제였다.

 

 

 

고구려의 거문고 연주자인 왕산악이 거문고를 연주하면,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출 정도였다고 한다.

 

 

 

씨름이나 수박회, 활쏘기 등으로 무예 실력을 겨루었다.

 

 

 

성쌓기를 잘해서 수많은 산성을 연결한 덕분에, 물샐틈 없는 방어막을 구축하였다.

 

 

 

 

 

흔들리는 고구려

 

 

 

 

장수왕이 죽은 후 왕권이 점차 약해지다가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심해져 나라가 혼란에 휩싸였다.

 

 

 

백제와 신라가 손을 잡고 쳐들어와 한강 유역을 도로 빼앗아 갔다.

 

 

 

위쪽으로는 돌궐족이 자주 침범해와서 남북으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589,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 하였다.

 

 

 

수 문제 때 고구려를 쳐들어왔으나 장마로 인해 되돌아갔다.

 

 

 

수 양제 때 우중문을 선두로 다시 쳐들어왔으나 을지문덕 장군의 전략에 말려 살수에서 전멸하였다.(살수대첩)

 

 

 

수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처음에는 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모든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을 빌미로 당이 처들어왔

 

.

 

 

 

패전을 거듭하다 마지막 안시성을 남겨두고 지친 당나라 군대가 철수함으로써 다시 한번 고구려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중국과의 기나긴 전쟁으로 고구려 국력이 급격이 쇠퇴하였다.

 

 

 

 

 

 

 

 

 

 

 

 

 

 

 

 

 

 

 

 

 

고구려의 멸망

 

 

 

백성의 삶이 고달파졌고, 연개소문의 독재로 기득권층의 원성도 자자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무너뜨리고 고구려에 처들어왔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치열한 권력다툼과, 지배자층의 배신으로 인해 나당연합군에 멸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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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이란 말은 문신과 무신을 아울러 지칭하는 말인데, 유명한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같은 사람들은 문과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해 나라의 행정을 담당하였고

무신은 무과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해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무신으로는 이순신을 들 수 있겠네요.

 

◆ 나중에는 관직에 직접 몸담은 사람뿐 아니라 신분이나 지체가 높은 지배층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됩니다.

 

◆ 양반의 기본 재산은 토지와 노비를 들 수 있어요. 농업이 가장 중요한 기간 산업이었으므로 논밭이 제일의 재산으로 쳤고, 이 논밭을 일구는 노비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이 모두

양반들이 먹고 사는데 필요한 재산 가치였던 것이죠.

 

◆ 양반으로서 떳떳하게 행세하기 위해서 관직이 필요했는데, 관직을 얻는 방법으로는 1, 과거급제 2. 음서 3. 유일이라는 방법이 있었어요.

과거 급제는 말 그대로 과거라는 시험을 치는 것이고, 음서는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의 아들이 과거를 스킵하고 바로 관직을 받을수 있는 일종의 낙하산이었던 거구요.

유일은 추천제를 말합니다. 학식이나 덕망이 높은 경우 추천을 받아서 관직을 얻게 되는 방법입니다.

 

◆ 하지만 조선사회에서는 음서는 좀 쪽팔리는 일로 알아서 대부분 과거시험 준비를 하는 분위기였다고 하네요.

 

◆ 과거에는 문과, 무과외에도 외국어, 의학, 천문학 등의 전문기술직을 뽑는 잡과도 있었대요.

 

◆ 조선은 무신보다 문신을 우대하는 경향이 강했고 임진왜란 이후 무과를 더욱 대거 뽑아 합격자수가 많아지다보니 무과는 더욱 천시받게 되었습니다.

과거급제라 하면 보통 문과 급제를 말하는데, 이는 자신뿐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기도 할만큼 양반들 사이에 워너비 목표라고 할 수 있었어요.

 

◆ 과거의 1차 관문인 소과에 응시하기 위해 지방에서는 향교를 다니고 서울에서는 사부학당(사학)을 다녔는데, 나중에는 지방에서도 국립인 향교보다는 사립인 서원이 더 인기가 있어

서원으로 많이 몰렸다고 합니다. 일단 소과에 합격한 사람들은 성균관(태학)에 들어가 대과시험을 준비했죠.

 

 

 

 

◆ 관료가 되면 나라에서 급료의 개념으로 녹봉을 받고, 농민 땅에서 나오는 세금을 대신 받을 수 있는 세금징수권인 과전도 따로 받았습니다.

조선시대 관료들은 국상, 부모상을 당하거나 명절이 아니고서는 매일 출근했다고 하네요 ^^ 주5일제는 꿈도 못꿀 이야기 ㅋㅋ

 

◆ 양반들의 생각과 행동의 밑바닥은 유교가 깔려있었습니다. 유학을 공부하며 자라고 유교 정치를 하고 유교 의식으로 장례를 치뤘으니 유학을 모르고서는 양반 행세를 할 수 없었지요.

 

◆ 천자문을 떼고 나면 동몽선습, 효경, 소학등을 배우고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 중국 역사책등을 배우는 것이 양반들의 유학 커리큘럼이었습니다.

 

◆ 유교 사상은 충효가 기본이 되었고, 양반사회에서는 특히나 주자가례에 의한 예를 중시하였습니다.

 

◆ 조선시대 양반은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여 형식에 얽매이는 폐단이 있었지만 명예를 중시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 조선시대에는 신분이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나뉘어졌는데, 천인은 천한 신분인 노비를 뜻했고

양인은 천인 이외의 사람을 일컬었어요. 양인은 또다시 양반, 중인, 평민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같은 양인이어도 양반이냐 중인이냐 평민이냐에 따라 빈부차, 지위차이, 교육차이가 뚜렷했어요.

 

◆ 노비는 평민과 결혼을 하더라도 한쪽이 노비면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되었기 때문에 노비의 수는 날이 갈수록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조선 중기에는 전 인구의 50프로 가까이가 노비였다고 하네요 ;

 

◆ 평민들은 농업, 어업, 수공업, 상업에 종사하여 나라의 세금 가운데 가장 큰 몫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세금에는 토지세인 조(租), 군역인 용, 특산물 생산인 조(調), 세 가지가 있었고

군역은 처음에는 양반에게도 부과되었지만 점차 평민에게만 부과되었다고 합니다.

 

◆ 평민들은 살림이 넉넉치 못했고 한 살 이전에 죽는 아이도 많았다고 하네요. 어쩌다 한살을 넘겨도 천연두, 홍역같은 질병등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태어나자마자부터 삶이 고단했을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재밌게 읽으셨나요? ^^

 

 다음 포스팅에서는 조선시대의 문화를 좀 더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구요~행복한 불금 되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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