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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의 외할아버지였던 이자겸은 자기의 두 딸을 다시 인종에게 시집을 보내어,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 되었습니다.

혼인을 통해 왕실과 겹겹이 밀접한 관계를 맺어 권세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 실제로 이자겸의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몰랐으며 막대한 부까지 누렸습니다.

 

● 이자겸에게 위협을 느낀 인종이 외척 세력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이자겸이 도리어 난을 일으켜  궁궐로 쳐들어오게 됩니다.

 

이자겸의 난을 도와준 장수 척준경과 이자겸 사이가 틀어지자, 이를 기회로 이자겸을 몰아내 유배시키고 후에는 척준경도 정지상에 의해 탄핵당하고 맙니다.

이로써 외척가문 경원 이씨 세력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대한 태도와, 쇠락한 개경의 운을 버리고 도읍을 옮기자는 의견에 대한

생각이 달라 두 파로 나뉘었습니다.

 

서경파 (정지상, 묘청 등)

  신진 관리

 금나라에 사대 반대, 금나라 정벌 주장

독자적 연호 사용을 주장

 개경의 기운이 다하였으니 서경으로 도읍을 이전할 것을 주장

개경파 (김부식 등)

  개경 문벌 귀족

 나라의 안위를 위해 사대 필요. 금나라 연호를 사용할 것을주장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이 고생하니, 서경으로 도읍 이전을 반대

 

 

● 인종은 처음에는 서경에서 새로이 시작해보고자 새 궁궐인 대화궁 공사도 시작했으나 여러번 궁궐이 벼락을 맞아 불타는 일을 겪고서는

서경 천도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 서경 천도가 무산이 되자 묘청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서경으로 가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인종에게 서경으로 와 황제에 오르기를 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한 토벌군이 정지상 등 묘청과 가까운 인물을 다 죽여버리고

서경을 포위, 반란군을 진압하게 됩니다.

 

● 이로써 김부식은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 묘청의 난이 실패한 이후 북방 영토에 대한 고려의 관심도 점차 수그러들었고,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란 생각도 점차 약화되어 갔습니다.

한편 신라의도읍이었던 경주 출신 김부식은 고려가 고구려 보다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계승한 나라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 생각을 반영해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 고려가 건국되기 전 300년 가까이 중국을 다스리던 당나라가 멸망하고, 거란이 이후 요나라를 건설합니다.

 

● 이에 맞서 한족이 세운 송나라도 세력을 넓히면서 요와 송이 건국초부터 대립 양상을 띄다가, 요나라가 망한 뒤에는

여진족의 금나라가 다시 송나라와 대치되는 형국을 이루었습니다.

 

●  중국대륙은 어느 대국에 의해 통일되지 못하고 크고 작은 여러 나라가 서로 대립하며 전쟁을 하는 때였기 때문에

고려는 오히려 중국의 영향을 덜 받고 비교적 자유로운 국제 무대 환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동아시아에서의 위상이 높아진 고려는 스스로를 황제의 나라라고 칭하는 등 그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국가적 행사였던 팔관회에서도 다른 나라의 관리, 상인들이 고려의 왕에게 인사를 올린 후 선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 고려는 벽란도를 중심으로 해서 바닷길을 통한 무역이 특히 활발했습니다.

 

● 송나라가 주요 무역상대국이었고, 그 뒤를 이어 여진족, 일본, 대식국(아라비아) 상인들과도 교류를 늘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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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건국초부터 친척의 나라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원수의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태조 왕건은 거란이 선물로 보낸 낙타를 만부교에서 굶어죽게 하고 사신을 유배 보내는 등

적대적이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 하지만 이때에는 거란이 여진족 토벌, 발해 부흥 운동 진압등 할일이 많아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다가

이후 요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나서는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한족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우면서 송과 고려가 우호적으로 지내자 위기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 거란이 소손녕을 보내 고려를 침략하고 항복을 요구해올 때 , 고려는 서희가 강화 회담에 나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 고려가 요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여진족 때문이니, 함께 여진족을 몰아내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하면

송과 관계를 끊고 요와 교류하겠다고 제안하자, 소손녕도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이로써 고려가 강동6주를 차지하게 됩니다.

 

● 한동안 평화로웠던 고려에 또 한번 혼란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어린 왕을 쫒아내고 새 왕을 세우려던 강조의 정변을 핑계삼아 문책한다는 명분으로 거란이 또다시 침입합니다. (ㄱㅓ란의 2차 침입)

하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 실제로는 군사적 요충지인 강동 6주를 빼앗기 위한 기회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 강동6주의 하나인 홍화진성의 양규장군 부대의 눈부신 활약에도 거란은 개경까지 내려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습니다.

 

● 고려는 현종이 직접 요에 조공한다는 조건을 걸어 전쟁을 종결시켰지만 , 전쟁 후 조공을 거절하여

요나라가 다시 침입해 옵니다. (거란의 3차 침입)

 

●  이 때 강감찬 장군이 고려의 지휘관이었는데 삼교천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거란군의 사기를 꺾어놓았습니다.

 그 뒤에도 거란군은 가는 곳마다 고려군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군사를 돌리게 됩니다.

 

퇴각하던 거란군은 귀주에서 다시 한번 강감찬 부대와 부딪혔고 이때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겨우 수천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  이 후 요나라는 더이상의 고려 침입을 포기하고 고려와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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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요, 금나라와는 공식적인 거래인 조공과 하사품의 형식의 공무역을 주로 하였고,

송나라와는 정식 국교가 없을 때에도 끊임없이 상인들이 개별적으로 오고가며 거래하는 사무역이 이어졌습니다.

 

● 송나라는 중국 영대 왕조중 가장 융성한 문화와 문물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고려는 사신, 상인의 왕래를 통해 송의 앞선 문물을 들여오는데 괌심이 많았습니다.

 

●  종묘사직을 비롯하여 제사에 유교 사상을 따르는 제도를 받아들인 것도 바로 송을 통해서 였습니다.

 

여진족은 삼국시대에 말갈족이라고 불리웠던 부족으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었으나, 후에는 발해에 포함되었다가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여진족은 조선 시대에 가서는 야인 , 그리고 만주족이라고 불렸습니다.

 

●  고려와 여진족이 함경도에서 무력 충돌이 났을 때 고려가 크게 패하고 말았는데, 고려는 패전 이유가 기병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기병 중심의 별무반을 새로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몇 년 뒤 윤관의 지휘하에 별무반 군사가 여진족 정벌에 나서 여진족을 몰아낸 자리에 동북 9성을 쌓았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족은 집요하게 공격을 계속하면서 9성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조공을 약속 받고 고려는 9성에서 군대를 철수하게 됩니다.

 

● 1113년 여진족은 막강한 세력으로 커져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와 송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킨 후 100여년간 영화를 누리다가 몽골족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고려는 정리를 해도 이야기할 게 많이 나오네요 ^^

 

다음 포스팅에서도 고려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꿉꿉한 장마철에 몸과 마음.. 지배당하지 마시구요.

 

이런 날일 수록 더 파이팅하는 거 , 아시죠?^^

 

 

그럼 다음 시간에 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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