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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성혁명의 시작 , 위화도 회군

 

- 1388년,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 요동정벌을 하고자 고려군대는 요동으로 떠나게 됩니다.

 

- 하지만 우왕과 최영장군(우왕의 장인) 의 명령을 어기고 이성계는 부하들을 데리고 군대를 돌리는 일명 '위화도 회군' 이라 불리는 반란을 일으킵니다.

 

- 큰 명나라를 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이성계는 4불가론을 들어 요동정벌을 반대했으나 우왕과 최영장군이 그의 주장을 받아주지 않았고,

위화도에서 마침 큰 비가 내려 압록강을 건너기 어렵게 되자 군대를 돌린것이지요.

 

- 당시 이성계는 부패한 권문세족을 비판하는 신진 사대부와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정도전, 조준, 정몽주 같은 사람들이죠.

 

- 이들 신진사대부와 이성계는 권문세족을 몰아내는데 집중하였습니다. 권문세족들은 친원정책을 지지하고 이성계 라인은 친명정책을

지지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서로 생각이 달랐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 신진 사대부의 갈등

 

- 고려를 개혁하는 방향에 대해 서로 생각차가 있었던 신진 사대부들은 크게 파가 2개로 갈리어 싸우게 됩니다.

 

- 이색 , 권근 등의 온건파 신진 사대부와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파 신진 사대부로 나뉘어 지게 되는 것이죠.

 

- 우왕을 쫒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할 때 이 두 파가 본격적으로 싸우게 되는데요. 이성계와 손잡은 급진파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 우기며 우왕의 아들 창왕을 왕위에 올리기를 반대했습니다.

 

- 온건파는 이런 주장이 터무니 없다며 당연히 창왕이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 이성계와 급진파는 급기야 창왕을 몰아내고 이성계의 친척인 공양왕을 왕위에 앉히게 됩니다.

 

-토지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두 파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는데요. 결국은 급진파의 뜻대로 모든 권문세족의 토지를 거두어 들여 새로운 기준에 따라

다시 나누는 급진적인 토지개혁인 과전법을 실시하게 됩니다.

 

 

 

 

 

 

 

 

 

● 역성혁명으로 나아가다

 

 

 

- 고려 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온건파와 뜻이 달랐기 때문에, 이성계 아들 이방원은 온건파 정몽주를 만나

끈질기게 설득하였습니다.

 

 - 하지만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던 정몽주를 역성혁명을 위해 선죽교에서 제거해버립니다.

 

- 공민왕 비 안씨가 대비로 있었으므로, 형식적으로 고려 왕조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가질 수 있도록

공양왕을 폐위한다는 교서와 옥새를 강요하여 받아내게 됩니다.

 

- 몇번의 왕 추대를 거절하던 이성계는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방원의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조선을 건국하다.

 

- 조선 건국의 대표적인 공신 정도전은, 조선의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새 나라의 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 재상중심의 정치, 토지는 모두 국가 소유, 조선경국전을 기준으로 나라를 다스린다 등이 정도전이 생각한 새 나라의 모습이었습니다.

 

-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였고 왕도정치를 이상적인 정치철학으로 가졌습니다.

 

- 유교 사상으로 무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모든 고을에 국립학교인 향교를 세우고, 서울에는 성균관을 세워 유학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 고려에서 시행했던 팔관회, 연등회 등 불교 관련 의식은 모두 없애고 모든 의례를 유교 이념에 맞도록 정비하였습니다.

 

 

 

● 외교 정책

 

- 명나라처럼 강한 나라는 받들어 섬기고, 일본, 여진같은 이웃나라와는 우호적으로 교류하는

사대교린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 태조는 500년 가까이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을 떠나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습니다.

 

 

 

● 나라의 기틀

 

-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보았는데, 이에 가장 반발한 인물이 태조의 아들 이방원이었다고 합니다.

 

- 태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둘째 부인에게서 낳은 막내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이에 대해 첫째 부인 한씨의 아들들이 강한 불만은

품게 되었습니다.

 

- 조선을 세우는데 공이 컸으나 세자 책봉에도 밀려나고 개국 공신에도 들지 못한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불만이 가장 컸던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지요.

 

- 정도전은 태조가 아끼는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여 재상정치를 펼쳐보려 했기에, 이방원은 태조가 병이 난 틈을 타

정도전과 방석을 제거해버립니다.

 

- 태조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방과가 정종임금이 되었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제2차 왕자의 난으로

피바람이 불게 됩니다. 바로 방간, 방원 형제간의 왕위 다툼이었죠. 이 싸움에서 이긴 방원이 나중에 정종에게서 왕의 자리를 넘겨받게 됩니다.

 

- 이방원이 바로 태종으로 즉위한 것이지요.

 

 

 

 

 

● 태종의 정책

 

- 의정부의 힘을 약화시키고 6조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왕권 강화에 힘썼습니다. 아무리 외척이라도 권세를 과시하고 왕권에 도전하면

가차 없이 죽여버리곤 했지요.

 

- 공신들 가운데에도 태종의 정책에 불만이 있는 자는 무자비하게 제거해 나갔습니다.

 

- 사병을 이용해 권력을 쥘 수 있었던 태종은 자신과 같은 일이 또다시 벌어질것을 두려워 해 왕과 세자를 보호하는 군사 이외에는 모든 사병을 없앴습니다.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 여러 군현으로 나눈 다음 관찰사와 수령을 파견해 지방을 감시했습니다.

 

- 양전 사업을 통해 주인없는 땅을 나라의 것으로 귀속시키고 절에 소속된 토지를 나라에 귀속시켜 세금을 걷을 토지를 늘려갔습니다. 또한 국가에 대한 의무를

피하기 위해 숨는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인보제, 호포제를 실시하여 호적 제도를 정비해나갔습니다.

 

- 노비변정도감을 두어 고려 말기 노비가 된 양인들을 풀어주고 세금을 낼 양인을 확대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정책은 정말 똑똑한 정책이었던 것 같아요. @_@b )

 

 

 

 

머릿속에 잘 정리가 좀 되셨나요?^^

 

다음 시간에는 조선 시대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되 양반 중심, 유교 중심 사회로서의 조선의 특징에 좀 더 초점을 맞춘 포스팅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즐공하시고 우리 다시 만나요 ^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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