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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 휘둘리는 고려

 

○ 원나라는 충렬왕을 물러나게 하고, 그 뒤를 이은 충선왕도 얼마 안 가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등

고려 왕을 제멋대로 바꾸었습니다.

 

○ 원나라 공주와 고려왕이 정략 결혼을 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는 고려왕의 부부 사이까지 간섭을 했고 , 고려 여인으로 원나라 황제의 부인이 된

기황후 집안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친원세력의 횡포가 심했습니다.

 

○ 원나라에 바칠 공녀를 뽑기 위해 고려의 처녀들은 결혼을 금지 당했고, 공녀로 뽑힌 처녀의 집안은 밤낮으로 울음이 그치지 않았으며,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목매 죽는 사람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 권력을 가진 권문세족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땅과 노비를 늘려 거대한 농장을 운영해 나갔습니다.

 

○ 홍수, 가뭄으로 먹고 살일이 막막해지자, 부모는 아이를 팔고 남편은 아내를 팔고 주인은 자기 노비를 시장에 늘어놓고 파는 사람 시장도 생겨났습니다.

 

○ 권문 세족 뿐 아니라 사대부, 절 마저도 농장도 늘리기 위해 열을 올렸고 권문 세족 가운데에는 세금을 내지 않는 집안이 많아

힘없는 백성들이 부족한 세수를 메우는데 애를 쓸 수 밖에 없었고 ,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가거나 노비가 되는 백성도 생겨났습니다.

 

 

 

하루 아침이 다 가도록 도토리를 줍지만 도토리는 광주리에 차지 않고, 두 다리만 나무토막처럼 굳고 , 주린 창자는 소리쳐 운다. <상률가 中>

 

 

 

살리라 살리로다

청산에 살리로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리로다.

얄리얄리 얄랑셩 알라리 얄라 <청산별곡 >

 

○  원나라에 대항하여 일어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두차례에 걸쳐 고려 영토로 쳐들어왔으나 모두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  왜구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끊임없이 쳐들어왔고 세금으로 걷는 곡식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공격하거나 세금 보관 창고를 약탈, 사람도 잡아가는 등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 최영은 홍건적과 왜구를 대상으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성계는 황산 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습니다.

 

○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다시 부는 개혁의 바람

 

 

○ 스무세살의 젊은 나이로 즉위한 공민왕은 원나라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원과 연을 끊고 고려를 바로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 공민왕은 불법으로 빼앗은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고, 몽고식 복장과 머리모양을 금지하였으며 권문세족을 압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공민왕은 이름 없는 승려인 신돈에게 최고 관직을 내려주고 권문세족을 척결하고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도록 권력을 주었습니다.

 

○ 권문세족이 반발하여 신돈에게 반역죄를 씌워 상소를 올렸고, 공민왕의 신임을 잃은 신돈은 귀양을 갔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 신돈이 죽은 후 공민왕은 새로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새로 중국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 정몽주, 정도전, 권근 같은 성리학자들의 세력을 신진 사대부라고 하는데, 이 신진 사대부가 공민왕의 지지를 받아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 이후 공민왕은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 명나라가 고려 땅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보이자, 명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 집권층간의 첨예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 우왕은 명나라에서 고려로 들어오는 길목인 요동을 침으로써 명을 혼내주기로 결심하고 요동정벌 부대를 결성합니다.

 

○ 계속 되는 장마와 군 사기가 떨어지자 희망이 없는 전투라고 여긴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리기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을 하고 이를 막는 최영 장군까지 죽여버립니다.

 

○ 최영 장군이 처형 당하는 날 개경 사람들은 장사를 걷고 시장을 닫았으며 길가의 사람들이면 누구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 우왕은 공민왕과 신돈의 하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데, 이성계는 우왕을 공민왕의 자손으로 보지 않고 신돈의 아들이라고 모략하며

왕위를 폐하고 죽이게 됩니다. 우왕의 아들 창왕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 이성계는 자신의 친척인 공양왕을 왕으로 추천하였는데, 공양왕이 이성계 반대세력과 친하게 지내자

 

공양왕을 물러나게 하고 본인이 왕위에 올라 조선왕조를

열게 됩니다.

 

 

 

 

 

오늘은 혼란스러운 고려 말기의 역사 내용을 정리해봤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라요 ^^

 

다음 시간에는 드디어 조선시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있어하는 파트라서 더 기대되네요~

 

다음 포스팅으로 다시 만나요 ♡

 

 

 

TGIF!!!!

씐나는 불금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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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정변>

● 대표적인 문벌 귀족으로 위세가 대단했던 김부식의 아들이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그을리게 하여 조롱하는 등

문신들이 무신을 얕잡아 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 장군, 여진족을 정벌한 윤관 장군도 모두 문신의 신분으로 군사 지식마저도 뛰어나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일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없는 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자 문인들은 더이상의 무술 연마를 게을리하고 시, 문장 짓는 일에 몰두하면서 점차 무예와 무인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 의종이 행차 중에 오병 수박희라고 불리는 무예 겨루기를 무신들에게 시켰는데, 늙은 장군인 이소응이 대결 중 몸을 피하자 젊은 문신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본 문신들을 매우 격노하였고, 무신 정중부, 이의방 등이 앞장 서서 정변을 일으킵니다.

 

● 이 무신정변에서 한뢰가 죽임을 당하고, 수많은 문신들이 살해를 당하고 맙니다.

 

● 무신들은 의종을 내쫒고 명종을 세웠으며, 정중부는 문신만이 오를 수 있었던 최고 지위인 문하시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명종은 무신들의 눈치만 보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하였고 무신 집권자들간의 권력 다툼으로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 순으로 권력의 이동도 계속 되었습니다.

 

● 천민 출신 이의민이 최고 권력자가 되는 것을 지켜본 백성들은 더이상 불만을 억누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무신 집권자들의 친인척 횡포와 가혹한 수탈에 못견딘 백성들은 전국 여기저기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 조위총의 난, 만적의 난, 망이 망소이의 난, 전주 관노의 난, 김사미 효심의 난 등 전국 곳곳에서 난이 일어났으나 결국 모두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최씨 정권>

 

● 이의민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말뿐인 개혁안, 봉사10조를 올리면서

뒤로는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주무르려 하였고, 자신의 호위 부대인 도방도 만들어 반란의 싹을 자르려 했습니다.

 

● 최충헌이 죽은 뒤 아들 최우, 손자, 증손자까지 권력을 대물림하여 4대간 독재를 할만큼 그 권력이 어마어마했던 것 같습니다.

 

●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무신들에게 약했던 문학, 행정 관련된 일을 도맡아 해줄 문인 집단인 서방을 설치하고, 최씨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색출하는 야별초를 만드는 등 권력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나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60여년간 독재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고려VS몽고의 30년 전쟁>

 

● 최씨 정권의 안정기에 몽고의 칭기즈칸은 러시아, 페르시아까지 아우르는 무자비한 정복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 힘을 합쳐 거란과 싸웠던 고려와 몽고는 이후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몽고는 턱없이 많은 물품을 조공으로 요구하고 사신의 행동도 무례하였다고 합니다.

저고여라는 몽고 사신이 본국으로 가던 중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몽고는 고려의 짓이라고 믿으며 외교 단절을 단행합니다.

 

● 1231년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이 고려로 쳐들어왔고, 각 지역으로 퍼져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점령한 성들에 몽고 관리인 다루가치를 두었습니다.

 

 

● 1232년 최우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다루가치를 죽이며 몽고에 저항하기로 결심합니다.

강화도는 몽고의 침입에 비교적 안전한 지리적 요건을 가지고 있었기에 강화도는 새로운 도읍으로서 활발하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몽고의 침입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은 거의 유일한 지역이 바로 이 임시 도읍지인 강화도였습니다.

 

● 몽고는 고려가 도읍을 몰래 옮기고 다루가치까지 죽인 사실을 알고 6차에 걸쳐 30여년간 고려를 침략하였고 고려 땅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 무신정권은 강화도 지키기에만 급급하였고, 몽고군의 칼받이로 백성들을 앞세웠습니다.

 

● 몽고군에 순순히 항복하지 않았던 문대. 살리타를 죽인 승려 김윤후, 목숨바쳐 성을 지켜낸 충주성 노비들, 그리고 귀주성 백성과 박서.

이들은 무신정권의 무능한 몽고와의 항쟁에서 빛나는 고려인의 정신을 보여준 이들이었습니다.

 

● 몽고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자 많은 관리와 백성들이 십수년간 정성을 바쳐 팔만대장경을 완성시켰습니다.

 

 

 

 

 

<무신정권 종말과 삼별초 항쟁>

 

● 백성들이 죽어가고 강화도마저 관리들이 굶어 죽을 정도로 나라가 피폐해져 가는데도 집권자인 최의는 본인의 권력 유지를 위해

전쟁을 계속 하자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 이에 다른 무신들이 삼별초를 시켜 최의를 제거함으로써 최씨 정권의 60년 독재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 고려태자가 몽고 칸에게 인사를 드리는 조건으로 고려와 몽고는 전쟁을 중지하고 강화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때 쿠빌라이가 칸이 되어 나라 이름을 '원'이라고 칭하였습니다.

 

●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몽고 제국은 작은 나라 고려를 끝끝내 차지하지 못하였고, 고려도 몽고 제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립국으로 보장받았습니다.

 

● 최의가 제거된 이후에도 권력이 이동하며 무신정권이 지속되었지만, 왕인 원종은 이전의 왕처럼 눌려지내지 않았습니다.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고 있던 원종이었으므로 몇차례 위기를 겪었으나 결국 다시 왕의 자리로 돌아와 무신정권에 마침표를 찍고 다시 도읍을 개경으로 옮기게 됩니다.

 

● 최우가 창설한 야별초에서 시작된 부대인 삼별초는 원나라 군대가 지키고 있는 개경으로 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무신 정권을 지지하는 부대였기 때문에

원종과의 사이도 좋지 않은 터였습니다.

 

● 원종이 삼별초 해산을 명하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삼별초는 원나라와의 항쟁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됩니다.

 

●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옮기며 항쟁을 계속하던 삼별초는 고려 원 연합군에 의해 1273년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고려와 원>

 

● 쿠빌라이의 막내딸과 원종의 아들인 충렬왕이 혼인을 하면서, 이때부터 으레 고려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 사위인 고려 왕을 통해 고려 정치에 간섭하려는 속셈으로 고려와 원과의 혼인을 주도하고,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고려를 관리하려 들었습니다.

 

● 충렬왕이 즉위한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제후국이므로 , 폐하 대신 전하, 짐 대신 고, 태자 대신 세자를 쓰도록 압박하였습니다.

 

● 충렬왕부터 공민왕 이전까지 왕 이름에 '충'자가 들어가는 것은 원나라 황제에게 충성하였다는 의미였습니다.

 

(● 몽고 제국의 영토가 아시아, 유럽을 아우르고 있어 사람들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습니다. 베네치아 상인인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서 머물다

돌아가 지은 책이 바로 동방견문록입니다. )

 

●  충렬왕은 몽고식 변발을 하고 신하들에게도 변발과 몽고옷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 원과의 활발한 교류로 몽고의 용어와 물건들이 들어오고, 원으로 유학을 가는 젊은이도 많아졌으며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하는 상인들도 활동도 활발했다고 합니다.

 

 

 

 

 

 

제 포스팅이 도움이 좀 되셨나요??

 

다음시간에는 고려 말의 역사와 새 나라 조선이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할게요 ^^

 

 

 

즐겁고 씐나게~ 공부하시고,

다음 시간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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