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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_ 신라 총정리 (삼국통일 이전)

 

 

건국 설화 (삼국유사 ) : 서라벌 지역에 사는 대표 6명이 나정으로 가보니 말 한마리가 절을 하고 있었다.

 

말이 하늘로 올라간 후 그 자리를 보니 붉은 알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알에서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 아이가 바로 박혁거세이다.

 

 

 

신라는 사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로국의 대표가 박, , 김씨로부터 나왔는데,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신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사로국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면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갔다.

 

 

 

, , 김씨가 번갈아서 임금의 자리를 가지다가

 

사로국이 경상도 일대를 전부 복속시킬 즈음에는 김씨만이 계속 임금 자리를 이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왕권이 절대적이지 않아서 복속시킨 다른 나라는 여전히 예전의 우두머리를 따랐는데,

 

이에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금관과 거대한 무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400년경 왜가 사로국을 계속 침입해오기에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대신 왜군을 물리쳐

 

주었고

 

그 댓가로 사로국에 대한 간섭이 점점 심해지게 되었다

 

 

 

고구려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면서 남진정책을 내세우자 백제와 사로국(이후 신라)이 동맹을 맺는 나제동맹이 결성되

 

었다.

 

 

 

지증왕때 사로국에서 신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증왕은 이사부 장군을 시켜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도 정복하도록 하였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법흥왕때 율령반포, 관복 제도, 골품제 등을 만들면서 더욱 왕권을 강화시켰다.

 

 

 

이차돈의 순교로 법흥왕은 귀족들의 반대를 잠재우고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삼았다.

 

 

 

신라 진흥왕때 고구려는 귀족 세력간의 싸움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태였는데, 그 틈을 타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이로써 한강 상하류 지역을 백제와 나누어 가졌다

 

 

2년 뒤 진흥왕은 동맹국인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백제 성왕이 한강 수복을 위해 대가야, 왜를 끌어들여 함께 신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목숨

 

을 잃게 된다

 

 

 

본래 신라와 동맹이었던 대가야가 백제와 연합한 것에 분노하여 진흥왕은 이사부 장군에게 대가야를 치게 하고, 대가야

 

가 항복하자 가야 지역 다른 나라들도 줄줄이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 건국이래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강을 차지함으로써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게 되어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고, 새로운 문물을 활발하게 받아들였다.

 

 

 

 

15세 전후 남자청소년들이 모여 학문과 무예를 익히고 친목을 다지는 화랑도가 있었다.

 

 

 

진평왕은 슬하에 딸 둘만 있었으므로, 골품제에 따라서 장녀인 선덕 여왕이 그 다음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귀족들의 불만이 높았는데, 여왕의 권위를 세우고 불법(佛法)으로 나라를 다스림을 보여주

 

기 위해 진흥왕때 지어졌던 황룡사에 9층탑을 건설하게 하였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가까이 두면서 위태롭게 왕 자리를 지켰다.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이 함락되고, 이 싸움에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선덕여왕이 죽고 사촌 여동생인 진덕 여왕이 즉위했다.

 

 

 

진덕 여왕은 모든 정치를 김춘추에게 맡겼고, 김춘추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는 등 외교에 힘썼다.

 

 

 

 

 

 

-삼국통일 이후는 다음 포스팅에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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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_백제 총정리

 

 

 

 

백제의 건국

 

 

 

 

고구려의 왕 주몽이 부여에 두고 온 아들, 유리가 주몽을 찾아와 다음 왕위를 이을 태자가 되었다.

 

 

 

비류와 온조도 주몽의 아들들이나 유리의 등장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삼국사기에 나온 백제 건국설화)

 

온조가 세운 나라가 비류의 집단을 흡수하여 백제라는 나라를 지었다고 한다. (한강유역)

 

 

 

한강 주변의 수십개의 나라가 마한을 이루고 있었는데, 백제가 하나 둘씩 정복하여 한강 유역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백제 고이왕 때 관등을 만들고 복식 지정, 법 제정 등 나라의 기본 토대를 만들어갔다.

 

 

 한강을 통해 낙랑군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쇠무기와 쇠농기구를 받아들여 힘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백제의 번영

 

 

근초고왕때 중국과 직접 교류하면서 문화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근초고왕은 근처 나라를 차례로 복속시키고 중국 전연의 공격으로 힘이 쇠약해진 고구려와 전쟁하여 고구려 고국원왕

 

을 죽이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근초고왕은 왜, 중국 동진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국제 활동을 넓혔다. (동진 이후 송, 남제, 양으로 넘어갈때 까지 외교관

 

계 유지)

 

 

 

백제는 항해술이 뛰어났고, 해상 왕국으로 이름을 떨쳤다.

 

 

 

아직기는 왜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왕인은 왜에 유교 사상을 전해주었다. 대신 왜로부터 군사력을 빌려 주변 나

 

라를 견제하는데 이용했다.

 

 

 

 

 

백제의 위기

 

 

 

근초고왕이 죽고나서 왕실이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그 와중에 고구려는 광개토왕이 왕위에 올랐다.

 

 

 

광개토왕은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복수를 갚기 위해 백제를 공격해 한강 이북 땅을 빼앗아 갔다.

 

 

 

백제를 지원하러 온 왜군은 신라 약탈에만 열을 올렸고, 고구려가 왜군을 몰아내고 신라를 지켜주었다.( 이후 신라에 대

 

한 고구려의 간섭이 커짐)

 

 

 

고구려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이 즉위하고 남하정책을 실시했다.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나제 동맹이 맺어졌다. (신라+백제가 힘을 합침)

 

 

 

백제 개로왕 때 장수왕이 한성을 공격하고 개로왕을 잡아 죽였다. (고구려에 한강 이남까지 빼앗김)

 

 

 

 

 

 

 

백제의 부활 운동

 

 

 

고구려를 피해 지금의 충남 공주인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천도로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으나 동성왕이 즉위하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동성왕은 외교에 노력을 기울이고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었다.

 

 

 

무령왕이 백성을 위한 어진 정치를 하고 나라의 군사력도 점차 회복시켰다.

 

 

 

무령왕은 양나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성왕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중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성왕은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대가야까지 점령하고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백제에서 남부여로 이름도 바꾸었다.

 

 

성왕은 중앙과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하고 귀족의 힘을 약화시켰다.

 

 

 

고구려가 혼란한 틈을 타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백제는 한강 이남 지역을 도로 빼앗고, 신라는 한강 이북 지

 

역을 빼앗았다.

 

 

 

동맹국인 신라가 기습공격하여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차지한 한강 이남 지역을 다시 빼앗아갔다.

 

 

 

 

신라에 복수하기 위해 신라정벌에 나섰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은 죽임을 당하였다.

 

 

 

성왕 이후의 왕들도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아오려고 하였으나 끝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무왕은 미륵 사상으로 백제를 통합하고자 삼국시대 최대의 절인 미륵사를 지었다.

 

 

 

 

 

 

백제의 몰락

 

 

 

 

의자왕 때 신라를 공격하여 대하성의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이 죽었다.

 

 

 

김춘추가 고구려 연개소문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당나라에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였고, 자만에 빠져 있던 의자왕은 급하게 계백의 군대를 황산벌로 보냈으나 계백 군대가

 

전멸하였다.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백제는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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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

 

 

 

 

주몽, 고구려를 세우다.

 

 

 

건국설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와 하늘의 신 해모수가 사랑에 빠졌다.

 

 

 

이를 알게 된 하백이 유화를 내쫒았는데, 부여의 금와왕이 이를 불쌍하게 여겨 유화를 거두었다.

 

 

 

알에서 태어난 고주몽이 활 실력도 뛰어나고 각종 무예에 뛰어나니 금와왕의 왕자들이 자신들의 자리에 위협을 느껴 주몽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남쪽땅으로 내려와 졸본에 자리를 잡고 고구려를 세웠다.

 

 

 

유리왕, 대무신왕.. 고국천왕 등 왕위를 이어오면서 왕권이 더욱더 강해졌고, 계루부 고씨가 계속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

 

였다.

 

 

 

220년 한나라가 망한 후 중국은 위,,오 세 나라로 갈라져 전쟁이 극심해졌다.

 

 

 

이 중 힘이 센 위나라가 고구려를 자주 침범했고, 동천왕, 미천왕때에 위와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고국원왕때는 전연이라는 나라가 침입하여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잡아가고, 미천왕의 무덤을 훼손하는 등 비통

 

한 일들을 겪었다.

 

 

 

고국원왕 자신도 백제(근초고왕때) 와의 싸움에서 백제 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소수림왕은 전연과 백제에 복수하는 것을 미루고, 나라에 제도를 정비하는 데 먼저 힘을 기울였다.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이라는 교육 기관을 세웠으며, 율령을 반포하였다.

 

 

 

 

 

 

고구려의 성장

 

 

 

 

391년 광개토대왕이 17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잃어버린 고구려의 땅을 되찾기 위해 백제와 전연(->후연)의 정복활동을 시작하였다.

 

 

 

백제의 관미성과 한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다.

 

 

 

고구려가 왜의 침입을 받고 있는 신라를 구원하러 간 사이, 후연이 침입하여 땅을 빼앗아 갔고, 이로써 본격적인 후연 정복 활동을 함으로써 동북아시아 최고 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즉위한 후, 중국과는 외교적으로 정면충돌을 피하고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고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반발하는 백제가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맞섰으나 장수왕은 백제 도읍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

 

왕을 죽였다.

 

 

 

신라도 공격하고 남한강 가에 중원 고구려비를 세웠다.

 

 

 

 

 

 

고구려의 문화

 

 

 

 

 

 

 

 

 

 

 

 

 

 

 

 

 

 

 

 

 

신랑이 신부집에서 머물며 일을 해주다가 아이를 낳고 , 그 아이가 다 자라면 신랑집으로 돌아가는 데릴사위제였다.

 

 

 

고구려의 거문고 연주자인 왕산악이 거문고를 연주하면,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출 정도였다고 한다.

 

 

 

씨름이나 수박회, 활쏘기 등으로 무예 실력을 겨루었다.

 

 

 

성쌓기를 잘해서 수많은 산성을 연결한 덕분에, 물샐틈 없는 방어막을 구축하였다.

 

 

 

 

 

흔들리는 고구려

 

 

 

 

장수왕이 죽은 후 왕권이 점차 약해지다가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심해져 나라가 혼란에 휩싸였다.

 

 

 

백제와 신라가 손을 잡고 쳐들어와 한강 유역을 도로 빼앗아 갔다.

 

 

 

위쪽으로는 돌궐족이 자주 침범해와서 남북으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589,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 하였다.

 

 

 

수 문제 때 고구려를 쳐들어왔으나 장마로 인해 되돌아갔다.

 

 

 

수 양제 때 우중문을 선두로 다시 쳐들어왔으나 을지문덕 장군의 전략에 말려 살수에서 전멸하였다.(살수대첩)

 

 

 

수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처음에는 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모든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을 빌미로 당이 처들어왔

 

.

 

 

 

패전을 거듭하다 마지막 안시성을 남겨두고 지친 당나라 군대가 철수함으로써 다시 한번 고구려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중국과의 기나긴 전쟁으로 고구려 국력이 급격이 쇠퇴하였다.

 

 

 

 

 

 

 

 

 

 

 

 

 

 

 

 

 

 

 

 

 

고구려의 멸망

 

 

 

백성의 삶이 고달파졌고, 연개소문의 독재로 기득권층의 원성도 자자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무너뜨리고 고구려에 처들어왔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치열한 권력다툼과, 지배자층의 배신으로 인해 나당연합군에 멸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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