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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정리_사림의 시대, 조선

 

 

조선건국을 둘러싸고 신진사대부들은 개혁의 방향을 두고 서로 맞서기 시작했다.

 

정도전, 권근 등은 조선을 세우는데 적극 참여한 반면 정몽주, 길재 등은 조선 건국에 반대하였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잡아 조선을 건국했다. 정몽주는 죽임을 당하였고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성리학을 공부하며 제자를 길렀는데, 이들이 사림의 뿌리이다.

 

 

유교는 공자가 세운 사상이고, 성리학은 송나라 주희가 유학을 연구하여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시킨 주자학을 말한다.

 

 

단종의 자리를 빼앗아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반발한 사림은 세조를 왕으로 세운 훈구파 (한명회, 유자광 등) 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훈구파는 각종 정변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높은 벼슬을 하던 무리를 일컫는 말로 불법으로 토지를 빼앗는 등 백성을 괴롭히는 자가 많았다.

 

 

어진 임금이었던 성종 때에 이르러 김종직 같은 사림을 인재로 등용했는데, 이들이 형성한 집단을 사림파라고 하였다.

 

 

삼사의 요직에 앉았던 사림파는 훈구파의 비리를 집중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사림파와 훈구파와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사림파는 몇 차례 큰 화를 당하는데 이를 사화라고 한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이 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의 조의제문이 사초(실록의 원고)에 실리자, 이를 빌미로 많은 사림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사약을 받아 죽은 일을 가지고 이에 가담한 신하들을 죽인 사건이었는데 훈구파, 사림파 둘 다 피해가 컸다. 이때 이미 죽은 한명회의 무덤을 파헤쳐서 처형시킬 정도로(부관참시) 연산군의 분노가 컸다.

 

 

위협을 느낀 훈구파는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키게 된다.

 

 

중종은 경연을 새로 열고 성균관을 부활시키는 등 새로 유학을 일으켜 제대로 된 정치를 하고싶었으나 반정 공신들의 힘에 눌려 실현하기 힘들자 조광조 같은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현량과, 향약 등 여러 개혁을 추진하였고 공로가 없이 반정공신 목록에 들어간 인물을 삭제하라는 상소를 올려 위훈삭제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불만을 품은 훈구파는 주초위왕 사건을 만들어 중종이 조광조를 내치도록 종용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 김구, 김식등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를 기묘사화라고 한다.

 

 

인종을 지지하던 사림이 화를 입은 을사사화 이후 권력을 잡은 윤원형이 비리를 저질러 나라가 어려워지자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는 등 백성들의 저항이 거세졌다.

 

 

이로써 훈구파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사림파가 다시 등장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였다.

 

 

 

선조 때에 이루러 사림이 조정의 중요한 자리를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고 생각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토론하는 붕당정치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이조 전랑직을 두고 이효원을 추천한 자들은 동인, 심의겸을 추천한 자들은 서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광조의 죽음으로 흐지부지된 향약(향촌의 안정을 꾀하는 규약)은 선조때에 이르러 이황, 이이의 활약으로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향약은 고을의 질서를 유지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기능뿐 아니라 지방관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기능도 하였다. 이로 인해 향약을 주도한 사림의 지위와 역할도 강력해졌다.

 

 

사림은 지방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도 설립해나갔다. 서원에서 학문을 연구할 뿐 아니라 선현들의 제사를 지내고, 서적을 만드는 일도 하였다.

 

 

선비들은 성리학 이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최고로 생각했다.

 

 

아무 무늬가 없는 순수한 백자에는 깨끗함을 추구하는 선비들의 이상이 담겨있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학파는 퇴계 이황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퇴계 학파와 율곡 이이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율곡학파가 있었다.

 

 

이황은 성리학의 핵심 내용을 열개의 그림으로 정리한 <성학십도>를 선조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마음 수양을 중시해서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내려가 제자 양성에 힘썼다.

 

 

율곡 이이는 아홉번이나 장원 급제를 할 정도로 똑똑했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선비의 포부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격몽요결> <성학집요> 등을 저술했다.

 

 

이밖에도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한 조식, 독학으로 공부한 화담 서경덕, 서경덕의 제자로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 이황과 8년동안 사단칠정 논쟁을 한 고봉 기대승 등 성리학을 발전시킨 학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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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_삼국시대, 삼국의 외교

 

 

<<삼국과 동아시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나라의 기틀을 갖춰갈 때 중국은 516국 시대로 혼란의 시대였다.

 

고구려는 이 나라중 전진과, 백제는 동진과 교류하면서 불교를 들여왔다.

 

 

 

백제가 받아들인 불교는 다시 왜로 전해졌다. 백제는 불교뿐 아니라 한문학, 도자기, 무기 제작 기술등도 왜에 알려주었

 

.

 

 

 

중국의 516국 시대가 끝나고 북쪽은 북위, 남쪽은 송나라가 세워졌는데

 

고구려는 북위와, 백제는 송나라와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신라가 뒤늦게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갈 때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고 수나라와 국경을 접한 고구려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가 돌궐과 동맹을 맺게 되고, 신라 백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와 동맹을 맺는다.

 

 

 

신라와 적대관계였던 백제가 고구려에 힘을 실어줌과 동시에 왜를 끌어들였다

 

 

 

 

돌궐+고구려+백제+<--------------------> 수나라+신라

 

 

 

 

중국과 책봉, 조공의 절차를 거쳐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구려가 직접 서역과 무역을 하려고 하자, 고구려와 서역간의 중개 무역으로 이익을 챙겼던 당나라와의 사이가 멀어지

 

게 되었다.

 

 

 

수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당태종은 고구려를 정복시키겠다는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고구려는 동맹국을 찾

 

아나서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고구려는 서역의 나라인 돌궐과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 하였다.

 

 

 

고구려는 서역뿐 아니라 유럽의 로마와도 문물 교류를 하였고, 이러한 다양한 문물은 백제나 신라에까지 전해졌다.

 

 

한강 유역을 먼저 차지했었던 백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항해 기술이 특히 뛰어났다. 그래서 배를 타고 해외로 나가 교류

 

를 했고, 특히 왜와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그래서 일본에는 지금도 백제와 관련된 마을 이름이나 유물이 많이 남아있

 

.

 

 

 

고구려 승려 혜자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백제의 오경박사 왕인도 왜의 사신으로 가서 태자와 신하들을 가르쳤다.

 

 

 

고구려 승려 담징은 왜의 호류사에 금당벽화를 남겼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말이 같고 풍습이 비슷했지만, 세력 다툼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고구려+ 신라 vs 백제 :

 

고구려 백제가 세력 다툼을 할 때 신라는 새로운 문물을 고구려를 통해 접했고, 고구려는 신라를 보살펴야 할 나라로 생각했다.

 

고구려 vs 신라 + 벡제 :

 

고구려가 신라를 신하국처럼 대하고 내정에 간섭하자, 신라는 차츰 백제와 교류를 시작했다. 고구려가 이에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백제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고구려 vs 신라 vs 백제 :

 

동맹을 맺은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아 한강 상류는 신라가, 한강 하류는 백제가 차지하게 되었다. 신라는 곧 동맹국이었던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일대의 땅까지 빼앗아버렸다.

 

고구려 + 백제 vs 신라 :

 

한강을 차지한 신라가 당나라와 마음껏 교류하고 세력을 확장하자, 고구려와 백제가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하기도 하였.

 

 

 

블로그 정비 과정중에 삭제된 한국사 포스팅을 다시 게재하는 바람에

 

연대순으로 정리되지 못하고 뒤죽박죽 되어버렸네요 ㅜㅜ

 

조선시대까지 정리된 포스팅이 이미 있기 때문에

 

다음 포스팅부터는 조선시대 이후부터 정리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공부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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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_ 철의 나라 가야연맹

 

 

가야 연맹의 탄생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세워질 무렵 남동부 지방에 가야 연맹이 생겨났다.

 

 

 

기원전 108, 한나라 공격으로 고조선이 망하고, 고조선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해 오면서 변한 지역으로 많이 몰려왔

 

.

 

 

 

고조선 사람들은 변한 지역 사람들에게 쇠 만드는 기술을 전해주어 변한 지역은 철 기술이 눈에 띄게 발달하게 되었다.

 

 

 

금관가야가 변한의 철 무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중국과 왜를 연결하는 해상무역을 이끌었다. 그러면서 연맹전체가 금

 

관가야의 원래 이름(구야국)을 따라 가야로 불리게 되었다.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낙동강을 가지고 있는 금관가야를 반드시 거쳐야 외국과의 교류가 가능했으므

 

, 금관가야의 지위가 점차 높아져갔고, 다른 가야 지역보다 먼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 연맹 중에는 강력한 왕권이 없었기 때문에 각 나라 왕이 자기 나라를 다스리는 연맹 형태의 국

 

가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금관 가야의 발전과 쇠퇴

 

 

 

 

금관가야는 무역 중개로, 철의 수출로 부귀를 누렸다.

 

 

 

300년대에 들어와 금관가야가 무역을 독차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8 나라가 금관가야에 반기를 들었다.

 

 

 

때마침 고구려 미천왕이 한반도에서 낙랑군과 대방군등 중국 세력을 몰아내자, 무역으로 이득을 얻었던 금관가야는 큰

 

타격을 입었다.

 

 

 

금관가야에 불만을 품었던 8 나라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금관가야를 공격하였으나, 금관가야가 신라에 도움을 청하

 

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사건으로 금관가야의 지위가 추락하였고, 신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 후 마한의 여러 나라를 통합한 백제가 들어서고, 중국과 왜의 무역을 연결하는 새로운 교역 중심지가 되었다. 가야의

 

여러 나라가 백제 편으로 넘어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교역하고는 했는데, 금관가야도 하는 수 없이 대세를 따를 수 밖에 없

 

었다. 이러한 이유로 백제와 친한 왜가 신라를 공격하도록 길을 터주었고, 신라는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러 와 신라 땅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달아나는 왜군을 따라 금관가야 지역까지 밀어

 

닥치다보니 금관가야의 땅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가야 연맹은 깨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서는 가야

 

 

 

고구려의 공격 때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인 고령일대에 자리 잡았던 대가야는 농사를 지으며 서서히 나라의 힘을

 

키워갔다.

 

 

 

철제 기술자들까지 대가야로 모여들자 비옥한 땅, 철기 기술까지 얻게 되어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주변나라를 끌어

 

들여 가야 연맹을 다시 만들었다.

 

 

 

500년 무렵 안정을 찾은 백제와 신라가 가야땅을 넘보기 시작하였다.

 

 

 

백제 무령왕이 가야를 공격하여 땅을 빼앗아가자 대가야의 이뇌왕은 신라의 법흥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백제를 견제하고

 

자 했다.

 

 

 

하지만 신라에는 다른 속셈이 있었으므로 529년 가야지역을 공격하였고 가야연맹은 신라, 백제의 공격을 받아 쇠퇴해

 

갔다.

 

 

 

532년 신라의 공격으로 금관가야가 멸망하였다.

 

 

 

554년 백제와 신라간의 싸움에서, 남은 가야 연맹은 백제의 편에서 싸움에 가세하였는데, 신라가 이김으로써 백제뿐

 

아니라 가야연맹도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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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 휘둘리는 고려

 

○ 원나라는 충렬왕을 물러나게 하고, 그 뒤를 이은 충선왕도 얼마 안 가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등

고려 왕을 제멋대로 바꾸었습니다.

 

○ 원나라 공주와 고려왕이 정략 결혼을 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는 고려왕의 부부 사이까지 간섭을 했고 , 고려 여인으로 원나라 황제의 부인이 된

기황후 집안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친원세력의 횡포가 심했습니다.

 

○ 원나라에 바칠 공녀를 뽑기 위해 고려의 처녀들은 결혼을 금지 당했고, 공녀로 뽑힌 처녀의 집안은 밤낮으로 울음이 그치지 않았으며,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목매 죽는 사람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 권력을 가진 권문세족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땅과 노비를 늘려 거대한 농장을 운영해 나갔습니다.

 

○ 홍수, 가뭄으로 먹고 살일이 막막해지자, 부모는 아이를 팔고 남편은 아내를 팔고 주인은 자기 노비를 시장에 늘어놓고 파는 사람 시장도 생겨났습니다.

 

○ 권문 세족 뿐 아니라 사대부, 절 마저도 농장도 늘리기 위해 열을 올렸고 권문 세족 가운데에는 세금을 내지 않는 집안이 많아

힘없는 백성들이 부족한 세수를 메우는데 애를 쓸 수 밖에 없었고 ,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가거나 노비가 되는 백성도 생겨났습니다.

 

 

 

하루 아침이 다 가도록 도토리를 줍지만 도토리는 광주리에 차지 않고, 두 다리만 나무토막처럼 굳고 , 주린 창자는 소리쳐 운다. <상률가 中>

 

 

 

살리라 살리로다

청산에 살리로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리로다.

얄리얄리 얄랑셩 알라리 얄라 <청산별곡 >

 

○  원나라에 대항하여 일어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두차례에 걸쳐 고려 영토로 쳐들어왔으나 모두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  왜구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끊임없이 쳐들어왔고 세금으로 걷는 곡식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공격하거나 세금 보관 창고를 약탈, 사람도 잡아가는 등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 최영은 홍건적과 왜구를 대상으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성계는 황산 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습니다.

 

○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다시 부는 개혁의 바람

 

 

○ 스무세살의 젊은 나이로 즉위한 공민왕은 원나라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원과 연을 끊고 고려를 바로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 공민왕은 불법으로 빼앗은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고, 몽고식 복장과 머리모양을 금지하였으며 권문세족을 압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공민왕은 이름 없는 승려인 신돈에게 최고 관직을 내려주고 권문세족을 척결하고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도록 권력을 주었습니다.

 

○ 권문세족이 반발하여 신돈에게 반역죄를 씌워 상소를 올렸고, 공민왕의 신임을 잃은 신돈은 귀양을 갔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 신돈이 죽은 후 공민왕은 새로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새로 중국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 정몽주, 정도전, 권근 같은 성리학자들의 세력을 신진 사대부라고 하는데, 이 신진 사대부가 공민왕의 지지를 받아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 이후 공민왕은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 명나라가 고려 땅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보이자, 명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 집권층간의 첨예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 우왕은 명나라에서 고려로 들어오는 길목인 요동을 침으로써 명을 혼내주기로 결심하고 요동정벌 부대를 결성합니다.

 

○ 계속 되는 장마와 군 사기가 떨어지자 희망이 없는 전투라고 여긴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리기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을 하고 이를 막는 최영 장군까지 죽여버립니다.

 

○ 최영 장군이 처형 당하는 날 개경 사람들은 장사를 걷고 시장을 닫았으며 길가의 사람들이면 누구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 우왕은 공민왕과 신돈의 하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데, 이성계는 우왕을 공민왕의 자손으로 보지 않고 신돈의 아들이라고 모략하며

왕위를 폐하고 죽이게 됩니다. 우왕의 아들 창왕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 이성계는 자신의 친척인 공양왕을 왕으로 추천하였는데, 공양왕이 이성계 반대세력과 친하게 지내자

 

공양왕을 물러나게 하고 본인이 왕위에 올라 조선왕조를

열게 됩니다.

 

 

 

 

 

오늘은 혼란스러운 고려 말기의 역사 내용을 정리해봤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라요 ^^

 

다음 시간에는 드디어 조선시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있어하는 파트라서 더 기대되네요~

 

다음 포스팅으로 다시 만나요 ♡

 

 

 

TGIF!!!!

씐나는 불금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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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벨라입니다.

 

저번 시간에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던 통일신라와 발해에 관해 배워봤어요.

 

오늘은 혼란한 남북국 시대를 대통합한 고려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약 정리한 거 여러번 읽어보는 사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역사의 숲을 보는 눈이 생기리라 확신합니다 ^^

 

출처: google

 

신라의 쇠락

 

○ 장보고가 죽은 이후 표면적으로는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 처럼 보였던 신라였지만, 실제로는 골품제로 인한 사회 모순이 깊어져 가던 시기였습니다.

 

○ 6두품 출신의 최치원도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한 인재였지만 골품제로 인해 정치의 핵심 인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 명문장가 강수, 승려 원효, 원효의 아들 설총 등도 6두품이었는데, 후삼국 시대부터는 많은 6두품 출신들이 신라에 등을 돌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지방에서는 귀족들이 사치생활을 하고, 세금을 과하게 걷는 등 횡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도 높아져가고 있었습니다.

 

○ 한편 골품제로 조정의 관리가 될 수 없었던 지방의 유능하고 학식있는 사람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모아 스스로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 정부에서 과도한 세금을 요구하자 몇 년 째 흉년에 힘들었던 농민들이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들불처럼 봉기를 넓혀나갔습니다.

 

○ 반란이 퍼지면서 지방 세력가들은 지역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이 지방 세력가들은 몇 개의 마을을 아우르며 세력을 넓히고 군사 조직도 갖추면서 '호족'이라는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했습니다.

 

○ 기훤이나 양길과 같은 사람이 호족 중 하나였는데, 궁예가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대접을 제대로 못받자 양길의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후삼국 시대의 시작

 

○ 신라의 장교 출신인 견훤은 가는 곳 마다 환영을 받아 짧은 시간안에 엄청난 추종자를 모았습니다.

 

○ 견훤은 완산주에 후백제를 세우고 국가 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 백제를 세운 뒤 쉴 새 없이 전쟁을 벌여 옛 백제 영토 대부분을 되찾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 신라의 승려였던 궁예는 농민 봉기로 나라가 혼란해지자 절을 떠나 기훤의 부하로 들어갔으나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자

양길의 수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 후에 철원을 차지한 궁예가 근방 호족을 평정하고 송악으로 도읍을 옮겨 주변 김포와 강화도까지 손에 넣는 등 세력을 떨쳤습니다.

 

○ 901년에 왕이 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천명하였습니다. (후고구려)

 

○ 궁예는 스스로 미륵이라고 칭하면서 백성들이 자신을 신성하게 보기를 바랐습니다.

 

 

 

 

○ 견훤과 궁예가 활발하게 영토를 넓히는 동안 신라의 영토는 경주 일대로 비참하게 쪼글어들었습니다.

 

 

 

 

 

후삼국 통일과 고려 건국

 

 

왕건이 아버지와 함께 궁예 밑으로 들어가 부하가 되었는데,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많은 영토를 빼앗아 오는 등 활약이 대단해서 궁예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왕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성품이 온화하여 많은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 한편 궁예는 점차 성품이 포악해져갔고 많은 사람을 모함해서 죽이는 등 살벌한 정치를 했습니다.

 

○ 궁예의 포악한 정치에 시달렸던 여러 장수들이 왕건을 설득하여 왕이 되기를 간청했다고 합니다.

 

○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습니다. 궁예는 산골에 숨어 있다 농민의 보리 이삭을 먹다 들켜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출처: Wi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90901003584&subctg1=&subctg2=kimedia Commons

 

왕건의 모습

 

 

○ 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한반도는 견훤과 왕권이라는 양대 산맥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 남은 신라땅을 차지 하기 위해 견훤이 신라로 군대를 보냈는데, 신라가 고려로 구원군을 요청하자 고려가 신라의 구원군으로 출병하게 됩니다.

 

○ 이로써 후백제와 고려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부딪히게 됩니다.

 

○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죽이고 왕경을 차지 하는 등 한동안 후백제쪽으로 기세가 기울었으나 930년 전세가 뒤집히게 됩니다.

 

○ 고창에서 충돌한 두나라 중 결국 고려군이 크게 이겼고, 주변의 100여개가 넘는 고을의 호족들이 고려로 자진 항복해 왔습니다.

 

○ 신라 왕의 초대를 받고 신라 왕경에 머물다 간 왕건은 신라 사람들에게까지 민심을 얻게 됩니다.

 

○ 한편 견훤은 자식들에 의해 금산사에 갇히는 꼴을 겪게 되고, 이에 격분한 견훤은 고려의 왕건에게로 도망쳤습니다.

 

○ 신라 왕 김부는 스스로 왕건에게 나라를 바칩니다. 이로써 화려했던 통일신라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 견훤은 왕건에게 후백제를 공격해달라고 계속 요청하였고, 실제로 후백제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맙니다.

 

○ 후백제가 멸망 한 후 견훤은 바로 병이 들어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합니다. (화병이 아니었을까요?)

 

○ 신라왕 김부가 스스로 고려에 나라를 넘겨 줄 때 태자가 울면서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살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집니다. (마의태자)

 

 

 

○ 태조 왕건이 즉위한 후 지방마다 사절을 보내 호족에게 선물을 주는 등 지방 호족들을 다독이는 데 힘썼습니다.

 

○ 충성하는 호족에게 왕씨 성을 주고, 혼인으로 얽히고 설킨 가족형태를 취해 반란을 예방하고 , 사심관 제도와 기인제도 등으로 호족 통합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 태조 왕건은 고구려를 잇는 나라임을 분명히 하고, 같은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유민들을 모두 받아들입니다.

 

○ 그리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게 강한 적개심을 가지면서 화친을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 후계자를 위한 당부의 말을 쓴 <훈요10조>를 직접 지었습니다.

 

 

 

간촉사 미륵불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46616429@N00/159254020/sizes/o/in/set-72157594153961797/

저자 the Chosun Bimbo (http://www.flickr.com/photos/46616429@N00/)

 

 

 

 

고려시대 이야기,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사실 부끄럽지만 한국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는데, 포스팅을 하면서 저도 공부하게 되니

 

새로운 눈이 생기는 기분이 들어요.

 

몰라서 재미없는거지, 알면 재미있다 던 옛 스승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

 

 

오늘 하루도 열공 즐공하시구요.

 

다음 시간에도 함께 한국사 공부 해보자구요~

 

See you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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