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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의 습격과 게르만 민족의 이동

훈족은 아시아 초원에 살았던 유목민족이다. 

370년경 유럽 침략을 시작으로 140년 동안 유럽 대부분을 점령하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말을 이용해 이동성이 뛰어나고 활을 사용했다.

게르만족 중에서 서고트족은 훈족의 침략을 피해 로마 제국으로 대거 이동했다.

로마는 서고트족을 로마에서 살게 해주었지만 점차 서고트족을 차별하기 시작했고 화가 난 서고트족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침략하게 된다.

로마가 혼란스러워지자 다른 게르만족들도 로마로 모여들었다. 이것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다.

당시 로마는 부정부패로 썩어있었고 너무 거대한 영토로 하나로 다스리기가 힘이 들었기때문에 결국 395년에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가 되었는데, 대부분의 게르만족이 서로마로 향했다.

동로마는 비교적 경제가 튼튼하고 침입해 오는 게르만족을 잘 막아냈는데,  서로마는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는데다가 수많은 게르만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그러다 훈족이 서로마로 쳐들어왔고 서로마제국은 훈족의 왕 아틸라의 공격에 게르만족의 힘까지 빌려 이에 맞섰다.

갈리아의 카탈라우눔 전투가 그 중 하나다.

교황 레오1세가 아틸라를 만나 그를 설득해 로마를 떠나도록 했지만, 이미 서로마 제국의 기력은 쇠할데로 쇠해지고 말았다.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소년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게르만족 장군에 의해 폐위되고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프랑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끝날 무렵인 5세기 말에 프랑크 족이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프랑크 왕국의 초대 국왕인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1세가 프랑크족을 통합하고 파리를 수도로 삼았다.

메로빙거 왕조는 자손들의 분열로 힘을 잃게 되고 계속되는 내분에 의해 가장 높은 관리인 궁재(피핀3세)가 왕의 업무를 보게 되었다.

피핀3세는 스스로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어 카롤링거 왕조의 시대를 열었다.

프랑크왕국은 로마 가톨릭과 관계를 다져나가며 서유럽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피핀3세의 아들 카를1세 (카롤루스 대제)가 즉위하고는 서유럽을 완전히 장악하고 통일시켰다.

카롤루스 대제 시대에 프랑크 왕국은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또한 문예 부흥에도 힘을 쓰고 학문과 예술을 후원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계승자 루트비히1세가 죽은 후 프랑크 왕국은 세 나라로 분열되었는데 이 세 나라가 이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의 기초가 된다.

세 나라로 분열되는 당시 동프랑크, 중프랑크, 서프랑크로 나뉘어졌는데 서프랑크는 노르만족(바이킹) 침입에 시달리다가 노르만족에게 노르망디 지역 땅을 내주어 살게 했다.

동프랑크의 하인리히1세가 동프랑크의 땅을 넓혔고, 아들 오토1세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동프랑크의 통일을 추진했다. 오토1세는 이후 신성로마제국(첫 이름은 오토제국)의 창시자가 된다.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의 옛 명칭이다.

비잔티움 제국

비잔티움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몰락 후 살아남은 동로마 제국을 말한다. 

황제가 신격화되어 왕권이 강했다.

하지만 너무 넓은 영토 탓에 외부 침략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보호하는 거대한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바다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한 그리스의 불 덕분에 외세의 침입에도 1000년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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