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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 ●

 

▶임진왜란으로 불안해진 조선, 선조는 후궁의 아이로 태어난 광해군의 총명함을 믿고 세자로 책봉한다.

 

▶선조가 새로 맞은 중전이 영창대군을 낳아 광해군의 입지가 불안해졌으나, 아직 아기였던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올릴 수 없었기에

선조가 죽은 후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왕위에 등극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몸소 전쟁터에 참가해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겪었던 광해군은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토지 크기에 따라 쌀로 통일하여 세금을 내게 하는 대동법 시행

동의보감 완성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펴내어 백성 교화

성곽 수리, 궁궐 재건등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고 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중립 실리 외교를 펼쳐서 전쟁을 다시 겪지 않도록 노력했다.

 

▶성리학의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 세력이 광해군이 서자 출신이라는 것과 명나라 홀대를 이유로 들어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 때 도움을 준 세력의 부추김으로 영창 대군과 친형 임해군 살해를 묵인하였고, 인목 대비를 폐위시킨 잘못이 있었다.

전후 재건을 위한 궁궐공사로 백성의 원망도 높아져 갔다.

 

▶결국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조카인 인조에게 왕위를 내어주게 된다.

 

 

● 효종과 호란 ●

 

▶인조가 즉위한 이후 조선은 친명배금 정책을 썼기 때문에 후금의 미움을 받았다. 이에 1627년 1월 후금이 기습 공격해왔는데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양국간 형제의 나라가 되기로 협상하였지만, 1636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군신관계와 공물을 요구하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인조가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두 왕자는 이후 행보가 달랐다. 소현 세자는 청 대신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서양문물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봉림 대군은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기며 청에 복수하고자 했다.

 

▶ 나중에 두 왕자가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인조는 소현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봉림 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봉림 대군이 후에 효종이 된다.

 

▶ 효종은 척화파를 등용하고 군비 강화에 힘쓰는 등 북벌을 추진했다. 하지만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는 청나라의 요구로 인해 나선정벌에 나서게 된다.

 

▶ 한양의 정예부대인 훈련도감을 자꾸 늘리자 그에 따라 군비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게 되었다. 지방은 빌어먹는 백성들이 늘고 도적떼가 들끓었다.

 

●현종과 당쟁●

 

▶ 임진왜란 전 4번의 사화 끝에 훈구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사림파는 김효원과 신의겸 사이에 이조전랑이라는 벼슬자리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자

정치에 대한 입장 차이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동인은 또다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졌다.

 

▶ 효종이 죽자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을것인가에 대해 대립이 생겼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은 당시 권력을 쥐고 있는 서인들의 말에 따랐으나 뒤에 효종비가 죽었을 때에는 남인의 말을 따라 이후 서인이 쫒겨나고

남인이 권력을 잡게 된다.

 

▶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양쪽 붕당이 번갈아가며 조정 일을 맡아보는 '환국' 정치 방식을 이용했는데, 이  때문에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한층 심각해졌다.

 

▶ 서인 집안이었던 인현왕후와 남인 집안이었던 장희빈의 싸움도 이런 붕당정치의 상황과 맞물려있었다.

 

▶ 공납 제도 때문에 중간에서 이득을 꾀하는 무리들의 방납 관행이 퍼지면서 공물을 쌀이나 베로 통일시킨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들의 부담이 커지고 일반 백성들의 고통은 줄었으며, 나라에 물품을 대주는 공인이라는 직업이 생겨 수공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 서인도 남인과 겨루는 과정에서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뉘게 되었다.

숙종의 후사를 두고 장희빈의 아들을 지지한 소론과, 무수리 사이에서 태어난 연잉군을 지지한 노론이 대립하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 후 4년만에

죽고 연잉군(영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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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과 명나라 정복의 야심도 키워갔다.

 

◆ 일본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통신사가 파견되었는데, 그들 중 황윤길은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고 선조에게 보고했고 김성일은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 당시 조선은 동인이 주도하는 정국이었으므로 같은 동인이었던 김성일의 보고를 받아들여 왜침에 대비하지 않았다.

 

◆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어달라는 터무니 없는 억지를 부리며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왔다.

 

수령과 군관들은 모두 도주하고 농민들이 장수 이일의 지휘 아래 일본군에 맞섰으나 역부족이었고 조선 제일의 명장 신립 장군도 탄금대 전투에서 지고 말았다.

 

사실상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 뻥 뚫린 셈이었다.

 

 

◆ 동래 부사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는 명언을 남기고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이 불타 조선왕조 200년의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다.

 

◆ 피난하지 않고 평양을 지키겠다고 약속한 선조는 약속을 어기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으며 그 바람에 일본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여

 

6월 15일에 평양을 점령했다.

 

 

 

 

 

 

◆ 조정과 관군이 도망가버리자 평민 , 노비 할 것 없이 의병이 되어 일본군에 맞서 일어났다.

 

◆ 의병은 의령에서 유생 곽재우를 시작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곽재우는 매복, 기습 등 유격전술로 일본군에 맞서 싸워 활약이 뛰어났다.

 

전라도의 의병이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켜준 덕분에 조선군의 식량을 마련하고 일본군에 반격할 수 있는 중요한 바탕이 다져졌다.

 

◆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 이순신의 활약에 막혀 일본군의 수륙 병진 작전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익진 전술로 일본 수군을 섬멸시킨 한산도 대첩은

 

세계 해전 역사에서도 유례 없는 빛나는 승리로 평가받고 있다.

 

◆ 일본은 조총이 있었지만 조선은 천미터 사정거리를 지닌 대형 화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신무기인 비격진천뢰가 개발되어 크게 힘을 발휘하였다.

 

 

◆ 조선의 요청으로 명군까지 동원된 싸움은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였다. 행주산성에서는 권율 장군의 지휘 아래 아녀자를 비롯한 모든 백성이 총동원되어 싸워 일본군의 사기를 한껏 꺾어놓았다.

 

◆ 명나라는 조선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의견은 무시한 채 일본과 강화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만 끌었고

 

그 사이 명과 일본군은 조선에 장기간 주둔하면서 백성을 약탈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 강화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자 일본은 1597년 다시 조선을 침략하는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거짓 정보를 믿지 않았던 이순신을

 

도리어 선조는 수군통제사에서 해직시키고 원균을 그자리에 앉혔다. 부산으로 침략한 일본군은 원균이 이끄는 조선군을 가뿐히 제압하고 전라도를 점령하였다.

 

◆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조선은 다시 이순신을 등용했다. 이순신은 전함 12척으로 명량(울돌목) 에서 일본함 130척의 진격을 좌절시켰다.

 

◆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의 새 지도부는 일본군의 철수 명령을 내렸다. 후퇴하는 일본군을 곱게 놓아줄리 없던 이순신은

 

일본군의 후퇴 길목을 막는 노량 해전을 치르게 되었고, 그 가운데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로써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이 났다.

 

◆ 조선에 군대를 보냈던 명나라는 오랜 전쟁으로 농민반란과 극심한 당쟁으로 몸살을 앓았고,

 

그 사이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워 명을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 조선에서는 전쟁의 혼란을 틈 타 많은 노비가 도망가고 노비 문서가 없어지면서 신분제가 흔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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