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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수로 지운 포스팅을 다시 올립니다~

연대기순으로 올려야 되는데 부득이 죄송하게 되었어요 ㅜㅜ

보기 불편하시더라도 양해 부탁드려용~

 

 

 

 

인류의 진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처럼 구부정한 모습으로 걷다가 허리를 펴고 똑바로 걷기 시작하는 호모 에렉투스로 진화하였다.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되면서 바다 높낮이가 변화하고 바다였던 곳이 육지로 변해, 아프리카 대륙에만 모여있던 호모

 

에렉투스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불을 사용할 줄 알았던 호모 에렉투스는 점차 창, 찌르개 같은 도구를 만들고 말을 할 줄 아는, 발달된 지능의 호모 사피

 

엔스로 진화하였다.

 

 

 

더욱더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현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서해 바다도 육지였던 때 호모 에렉투스가 한반도까지 이동해왔으나 호모 사피엔스와의 경쟁에서 밀려난 것으로 추측

 

된다.

 

 

 

 

 

 

구석기 시대

 

 

 

한반도에 호모 에렉투스가 도착하면서 구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하고, 수집, 사냥등으로 살아갔다. 먹을 것을 찾아 계속 이동생활을 하고, 근처 동굴에서 살

 

았다.

 

 

 

동물의 가죽이나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추위를 버텼다.

 

 

 

나무나 동물의 뼈, 돌을 이용해 도구를 만들어 썼다.

 

큰 돌을 쪼개서 쓰는 뗀석기를 사용했다.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긁개, 으깰때 쓰는 찍개, 나무 막대기에 달아 창처럼 쓰는 슴베찌르개, 새기개 등이 모두 뗀석기

 

이다.

 

 

 

뗀석기가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 진것이 주먹도끼였다.

 

 

 

자연적인 산불에서 불씨를 가지고 옴으로써 구석기 사람들은 불을 가지게 되었다.

 

 

 

불이 있어서 음식도 익혀 먹고, 짐승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으며 추위를 견디기가 쉬워졌다.

 

    

 

 

 

 

신석기 시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와 자연환경이 변했다. 이로써 사람들의 생활도 바뀌어 신석기 시대가 도래했다.

 

 

 

한반도에는 기원전 8천년경부터 신석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먹을 것과 마실 물이 풍부한 강가나 해안가에 움집을 짓고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조개더미 유물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신석기 시대에는 해빙기로 인해 바다 생물이 풍부해서 조개와 굴이 차고 넘쳤을

 

것이다.

 

 

 

돌을 갈아서 훨씬 날카롭게 만들었는데, 이를 간석기라고 한다.

 

 

 

낚시바늘, 그물추, 그물, 작살 등 다양한 사냥 도구를 개발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짐승도 가두어 기르기 시작했다.

 

 

반달돌칼과 토기는 신석기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한 마을에는 어머니와 형제 관계인 친척들이 대부분으로 씨족 사회였다.

 

 

 

몸을 치장하는 장신구도 만들어 썼다. (조개 목걸이, 발찌 등)

 

 

 

가락바퀴로 실을 뽑고, 뼈바늘로 가죽을 꿰어 옷을 만들어 입었다.

 

 

 

마을의 연장자가 우두머리였으나 자식에게 물려주는 자리는 아니었고 평등사회였다.

 

 

 

식량의 원천인 자연의 변화에 민감해서 애니미즘이 발생하고,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어 장례 의식을 치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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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8년,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세종은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애초에 세자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 세자교육을 소홀히 하고 놀기에만 열중하자 태종은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임명하였는데, 그가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 세종은 학문을 사랑하고 책읽기를 무척 좋아하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 세종은 유교의 정치 이념에 따라 민본 정치, 애민 정치를 실현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그 다음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병으로 일찍 죽었고, 문종의 어린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단종은 12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해서 김종서, 성삼문 등 관료들의 도움으로 정치를 해 나갔는데, 이 때문에 왕권이 약화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단종의 삼촌인 수양 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는데 (계유정난) 그가 바로 세조입니다. 왕위 찬탈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막상 왕이 되고 나서는 강력한 왕권 강화를 발판으로 삼아 제도와 문화 정비 작업을 활발하게 추진하는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 조선 최고의 법전 경국대전의 편찬 작업도 이때 시작되었습니다.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선비들을 사육신, 단종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절의를 지킨 선비들을 생육신이라고 부릅니다.

 

○ 세조 다음의 왕인 예종도 문종 처럼 일찍 죽고 13세의 성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어린 나이때문에 정희 대비가 성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성종이 스무살이 되어서는 직접 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세종과 마찬가지로 어진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세조 때 없어진 경전 제도(신하와 왕이 경전을 읽으며 토론하고 국가 일을 의논)를 시행하고 홍문관을 학술 연구 기관으로 삼았습니다.

 

○ 성종의 왕비 윤씨가 투기가 심해 성종 얼굴에 생채기를 내는 일이 발생하자 사약을 내렸는데, 이 일로 아들 연산군때 사화가 발생하게 됩니다.

 

 

 

 

 

 

○ 세종 때 특별히 집현전을 아껴서 학문이 뛰어난 선비들을 뽑아 학문 연구에만 힘쓰도록 장려하였는데, 그 덕분에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와 같은

뛰어난 학자가 많이 나오게 됩니다.

 

○ 집현전에서 고려사, 오례의, 팔도지리지, 용비어천가, 삼강행실도, 의방유취 등의 서적을 편찬하여 학문과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습니다.

 

○ 세종은 우리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고, 문서를 읽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1446년 훈민정음을 널리 반포하게 됩니다. 많은 조정 관료들이 한자를 쓰지 않고 다른 문자를 쓰는 것이 오랑캐와 같다며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백성들을 위해 단호하게 훈민정음을 시행시킵니다.

 

○ 세종이 독자적인 천문학을 발달시키고자 경북궁 내 간의대라는 천문대를 설치하고 한양의 해, 달, 별을 관찰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측우기를 발명하게 해서 비의 양을 측정하는 등 과학에 관심을 많이 보였습니다.

 

○ 세종의 과학 사랑 덕분에 노비 장영실은 과학자로 출세하게 되었고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아 간의,  자격루, 혼천의, 앙부일구 등의 발명품을 남겼습니다.

 

○ 우리나라 토지와 기후에 알맞게 농업 기술을 정리하여 농사직설을 편찬하였습니다.

 

 

 

 

○ 외교적으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도 참고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를 수입하였습니다.

 

○ 덕분에 명나라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수시로 조선에 처들어와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와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 세종 때 이종무가 쓰시마 섬을 정벌하여 다시는 조선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왜구의 약속을 받아옵니다.

 

○ 조선 초 한반도 북쪽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여진족과 압록강, 두만강 일대에서 잦은 싸움이 일어났는데, 세종 때 김종서가 두만강 근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함으로써 오늘날과 비슷한 국경이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 세조 때 시작한 조선 최초의 종합 법전인 경국대전이 성종 때 간행되었습니다. 고려때에는 왕의 말 한마디 한마디로 일이 정해졌기 때문에 구체적인 법에 의해 통치되는 법치국가로서의 조선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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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이란 말은 문신과 무신을 아울러 지칭하는 말인데, 유명한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같은 사람들은 문과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해 나라의 행정을 담당하였고

무신은 무과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해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무신으로는 이순신을 들 수 있겠네요.

 

◆ 나중에는 관직에 직접 몸담은 사람뿐 아니라 신분이나 지체가 높은 지배층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됩니다.

 

◆ 양반의 기본 재산은 토지와 노비를 들 수 있어요. 농업이 가장 중요한 기간 산업이었으므로 논밭이 제일의 재산으로 쳤고, 이 논밭을 일구는 노비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이 모두

양반들이 먹고 사는데 필요한 재산 가치였던 것이죠.

 

◆ 양반으로서 떳떳하게 행세하기 위해서 관직이 필요했는데, 관직을 얻는 방법으로는 1, 과거급제 2. 음서 3. 유일이라는 방법이 있었어요.

과거 급제는 말 그대로 과거라는 시험을 치는 것이고, 음서는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의 아들이 과거를 스킵하고 바로 관직을 받을수 있는 일종의 낙하산이었던 거구요.

유일은 추천제를 말합니다. 학식이나 덕망이 높은 경우 추천을 받아서 관직을 얻게 되는 방법입니다.

 

◆ 하지만 조선사회에서는 음서는 좀 쪽팔리는 일로 알아서 대부분 과거시험 준비를 하는 분위기였다고 하네요.

 

◆ 과거에는 문과, 무과외에도 외국어, 의학, 천문학 등의 전문기술직을 뽑는 잡과도 있었대요.

 

◆ 조선은 무신보다 문신을 우대하는 경향이 강했고 임진왜란 이후 무과를 더욱 대거 뽑아 합격자수가 많아지다보니 무과는 더욱 천시받게 되었습니다.

과거급제라 하면 보통 문과 급제를 말하는데, 이는 자신뿐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기도 할만큼 양반들 사이에 워너비 목표라고 할 수 있었어요.

 

◆ 과거의 1차 관문인 소과에 응시하기 위해 지방에서는 향교를 다니고 서울에서는 사부학당(사학)을 다녔는데, 나중에는 지방에서도 국립인 향교보다는 사립인 서원이 더 인기가 있어

서원으로 많이 몰렸다고 합니다. 일단 소과에 합격한 사람들은 성균관(태학)에 들어가 대과시험을 준비했죠.

 

 

 

 

◆ 관료가 되면 나라에서 급료의 개념으로 녹봉을 받고, 농민 땅에서 나오는 세금을 대신 받을 수 있는 세금징수권인 과전도 따로 받았습니다.

조선시대 관료들은 국상, 부모상을 당하거나 명절이 아니고서는 매일 출근했다고 하네요 ^^ 주5일제는 꿈도 못꿀 이야기 ㅋㅋ

 

◆ 양반들의 생각과 행동의 밑바닥은 유교가 깔려있었습니다. 유학을 공부하며 자라고 유교 정치를 하고 유교 의식으로 장례를 치뤘으니 유학을 모르고서는 양반 행세를 할 수 없었지요.

 

◆ 천자문을 떼고 나면 동몽선습, 효경, 소학등을 배우고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 중국 역사책등을 배우는 것이 양반들의 유학 커리큘럼이었습니다.

 

◆ 유교 사상은 충효가 기본이 되었고, 양반사회에서는 특히나 주자가례에 의한 예를 중시하였습니다.

 

◆ 조선시대 양반은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여 형식에 얽매이는 폐단이 있었지만 명예를 중시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 조선시대에는 신분이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나뉘어졌는데, 천인은 천한 신분인 노비를 뜻했고

양인은 천인 이외의 사람을 일컬었어요. 양인은 또다시 양반, 중인, 평민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같은 양인이어도 양반이냐 중인이냐 평민이냐에 따라 빈부차, 지위차이, 교육차이가 뚜렷했어요.

 

◆ 노비는 평민과 결혼을 하더라도 한쪽이 노비면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되었기 때문에 노비의 수는 날이 갈수록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조선 중기에는 전 인구의 50프로 가까이가 노비였다고 하네요 ;

 

◆ 평민들은 농업, 어업, 수공업, 상업에 종사하여 나라의 세금 가운데 가장 큰 몫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세금에는 토지세인 조(租), 군역인 용, 특산물 생산인 조(調), 세 가지가 있었고

군역은 처음에는 양반에게도 부과되었지만 점차 평민에게만 부과되었다고 합니다.

 

◆ 평민들은 살림이 넉넉치 못했고 한 살 이전에 죽는 아이도 많았다고 하네요. 어쩌다 한살을 넘겨도 천연두, 홍역같은 질병등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태어나자마자부터 삶이 고단했을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재밌게 읽으셨나요? ^^

 

 다음 포스팅에서는 조선시대의 문화를 좀 더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구요~행복한 불금 되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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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의 외할아버지였던 이자겸은 자기의 두 딸을 다시 인종에게 시집을 보내어,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 되었습니다.

혼인을 통해 왕실과 겹겹이 밀접한 관계를 맺어 권세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 실제로 이자겸의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몰랐으며 막대한 부까지 누렸습니다.

 

● 이자겸에게 위협을 느낀 인종이 외척 세력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이자겸이 도리어 난을 일으켜  궁궐로 쳐들어오게 됩니다.

 

이자겸의 난을 도와준 장수 척준경과 이자겸 사이가 틀어지자, 이를 기회로 이자겸을 몰아내 유배시키고 후에는 척준경도 정지상에 의해 탄핵당하고 맙니다.

이로써 외척가문 경원 이씨 세력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대한 태도와, 쇠락한 개경의 운을 버리고 도읍을 옮기자는 의견에 대한

생각이 달라 두 파로 나뉘었습니다.

 

서경파 (정지상, 묘청 등)

  신진 관리

 금나라에 사대 반대, 금나라 정벌 주장

독자적 연호 사용을 주장

 개경의 기운이 다하였으니 서경으로 도읍을 이전할 것을 주장

개경파 (김부식 등)

  개경 문벌 귀족

 나라의 안위를 위해 사대 필요. 금나라 연호를 사용할 것을주장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이 고생하니, 서경으로 도읍 이전을 반대

 

 

● 인종은 처음에는 서경에서 새로이 시작해보고자 새 궁궐인 대화궁 공사도 시작했으나 여러번 궁궐이 벼락을 맞아 불타는 일을 겪고서는

서경 천도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 서경 천도가 무산이 되자 묘청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서경으로 가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인종에게 서경으로 와 황제에 오르기를 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한 토벌군이 정지상 등 묘청과 가까운 인물을 다 죽여버리고

서경을 포위, 반란군을 진압하게 됩니다.

 

● 이로써 김부식은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 묘청의 난이 실패한 이후 북방 영토에 대한 고려의 관심도 점차 수그러들었고,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란 생각도 점차 약화되어 갔습니다.

한편 신라의도읍이었던 경주 출신 김부식은 고려가 고구려 보다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계승한 나라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 생각을 반영해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 고려가 건국되기 전 300년 가까이 중국을 다스리던 당나라가 멸망하고, 거란이 이후 요나라를 건설합니다.

 

● 이에 맞서 한족이 세운 송나라도 세력을 넓히면서 요와 송이 건국초부터 대립 양상을 띄다가, 요나라가 망한 뒤에는

여진족의 금나라가 다시 송나라와 대치되는 형국을 이루었습니다.

 

●  중국대륙은 어느 대국에 의해 통일되지 못하고 크고 작은 여러 나라가 서로 대립하며 전쟁을 하는 때였기 때문에

고려는 오히려 중국의 영향을 덜 받고 비교적 자유로운 국제 무대 환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동아시아에서의 위상이 높아진 고려는 스스로를 황제의 나라라고 칭하는 등 그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국가적 행사였던 팔관회에서도 다른 나라의 관리, 상인들이 고려의 왕에게 인사를 올린 후 선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 고려는 벽란도를 중심으로 해서 바닷길을 통한 무역이 특히 활발했습니다.

 

● 송나라가 주요 무역상대국이었고, 그 뒤를 이어 여진족, 일본, 대식국(아라비아) 상인들과도 교류를 늘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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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건국초부터 친척의 나라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원수의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태조 왕건은 거란이 선물로 보낸 낙타를 만부교에서 굶어죽게 하고 사신을 유배 보내는 등

적대적이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 하지만 이때에는 거란이 여진족 토벌, 발해 부흥 운동 진압등 할일이 많아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다가

이후 요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나서는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한족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우면서 송과 고려가 우호적으로 지내자 위기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 거란이 소손녕을 보내 고려를 침략하고 항복을 요구해올 때 , 고려는 서희가 강화 회담에 나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 고려가 요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여진족 때문이니, 함께 여진족을 몰아내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하면

송과 관계를 끊고 요와 교류하겠다고 제안하자, 소손녕도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이로써 고려가 강동6주를 차지하게 됩니다.

 

● 한동안 평화로웠던 고려에 또 한번 혼란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어린 왕을 쫒아내고 새 왕을 세우려던 강조의 정변을 핑계삼아 문책한다는 명분으로 거란이 또다시 침입합니다. (ㄱㅓ란의 2차 침입)

하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 실제로는 군사적 요충지인 강동 6주를 빼앗기 위한 기회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 강동6주의 하나인 홍화진성의 양규장군 부대의 눈부신 활약에도 거란은 개경까지 내려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습니다.

 

● 고려는 현종이 직접 요에 조공한다는 조건을 걸어 전쟁을 종결시켰지만 , 전쟁 후 조공을 거절하여

요나라가 다시 침입해 옵니다. (거란의 3차 침입)

 

●  이 때 강감찬 장군이 고려의 지휘관이었는데 삼교천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거란군의 사기를 꺾어놓았습니다.

 그 뒤에도 거란군은 가는 곳마다 고려군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군사를 돌리게 됩니다.

 

퇴각하던 거란군은 귀주에서 다시 한번 강감찬 부대와 부딪혔고 이때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겨우 수천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  이 후 요나라는 더이상의 고려 침입을 포기하고 고려와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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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요, 금나라와는 공식적인 거래인 조공과 하사품의 형식의 공무역을 주로 하였고,

송나라와는 정식 국교가 없을 때에도 끊임없이 상인들이 개별적으로 오고가며 거래하는 사무역이 이어졌습니다.

 

● 송나라는 중국 영대 왕조중 가장 융성한 문화와 문물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고려는 사신, 상인의 왕래를 통해 송의 앞선 문물을 들여오는데 괌심이 많았습니다.

 

●  종묘사직을 비롯하여 제사에 유교 사상을 따르는 제도를 받아들인 것도 바로 송을 통해서 였습니다.

 

여진족은 삼국시대에 말갈족이라고 불리웠던 부족으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었으나, 후에는 발해에 포함되었다가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여진족은 조선 시대에 가서는 야인 , 그리고 만주족이라고 불렸습니다.

 

●  고려와 여진족이 함경도에서 무력 충돌이 났을 때 고려가 크게 패하고 말았는데, 고려는 패전 이유가 기병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기병 중심의 별무반을 새로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몇 년 뒤 윤관의 지휘하에 별무반 군사가 여진족 정벌에 나서 여진족을 몰아낸 자리에 동북 9성을 쌓았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족은 집요하게 공격을 계속하면서 9성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조공을 약속 받고 고려는 9성에서 군대를 철수하게 됩니다.

 

● 1113년 여진족은 막강한 세력으로 커져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와 송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킨 후 100여년간 영화를 누리다가 몽골족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고려는 정리를 해도 이야기할 게 많이 나오네요 ^^

 

다음 포스팅에서도 고려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꿉꿉한 장마철에 몸과 마음.. 지배당하지 마시구요.

 

이런 날일 수록 더 파이팅하는 거 , 아시죠?^^

 

 

그럼 다음 시간에 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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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하고 어진 애민 정치를 하였다.

 

★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도 만파식적( 온갖 풍파를 잠재우는 피리)을 나라의 보배로 삼고 평화로운 정치를 펼치고자 했다.

 

★ 신문왕의 장인 김흠돌이 난을 일으켰다. 신문왕은 김흠돌을 비롯하여 왕의 권위에 반발하는 세력을 단호하게 억누르면서 유교 사상으로 충성스러운 신하를 기르고자 국학을 설치하였다.

 

★ 신문왕 때 관리에게 관료전이라는 토지를 나누어 주었고 관직이 높은 귀족에게는 녹읍을 주었다.

관료전은 그 땅에서 나는 수확물의 일부를 가질 수 있었고, 녹읍은 수확물 뿐 아니라 그 땅에 사는 농민들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 나라의 행정구역은 9주 5소경, 군대는 9서당 10정으로 구성되었다.

 

★698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발해를 세우면서 신라가 발해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자, 원수 지간이었던 당나라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당나라, 발해, 일본과 활발한 국제교류를 하게 되었다.

 

★ 신라 승려 혜초는 서역땅(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파키스탄 등)까지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기기도 하였다.

 

 

 

★ 신라의 골품제가 통일신라에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원래 왕족인 성골은 진덕여왕을 끝으로 사라지고 무열왕부터 진골 출신이 왕위에 올랐다.

 

★ 골품에 따라 벼슬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 왕경에는 귀족들 대부분이 모여살았기 때문에 금으로 장식한 금입택 등 호화로운 집들이 많았다.

 

★ 왕경에는 사치를 부리는 귀족들과 너무나 가난하게 사는 평민들이 있어서 극심한 빈부격차가 존재했다.

 

 

 

 

★ 왕족과 귀족만이 누렸던 불교가 통일 이후 일반 백성에게까지 널리 퍼져나갔다.

 

★ 6두품 출신의 승려 원효는 진리는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아가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 진골출신의 의상은 당나라에서 화엄 사상(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부처 앞에서 평등하다) 을 공부하고 돌아와 여러 절을 지으며 제자 양성에 힘썼다.

 

★ 찬란한 불교유산 :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

 

 

 

★ 신문왕 이후 100여 년간 평화롭고 안정된 시절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742년 경덕왕이 왕위에 오른 후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경덕왕이 죽고 어린 아들 혜공왕이 즉위하자 왕권이 약해지고 반란도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 혜공왕과 왕비가 살해된 이후 왕위를 놓고 끊임없는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 김헌창의 난을 계기로 지방에서도 점차 본인의 세력을 키우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 지방 실력자 중 한명이 장보고 였는데, 당나라 해적을 단속하기 위해 설치된 청해진에 장보고가 투입되어 해적을 소탕하고 바다 무역을 주도하였다.

 

★ 장보고는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염장이라는 사람에 의해 살해당했다.

 

 

 

 

 

 

 

 

으음..

 

통일신라 시대에 대해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셨나요?

 

한국사를 공부하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정리포스팅이었길 바랍니다 ^^

 

다음시간에는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열었던 발해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죠.

 

그럼 다음시간에 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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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와 신라가 함께 손을 잡고 쇠약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나눠 가졌는데, 이 후 신라가 배신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땅을 모조리 빼앗아 가자, 백제는 신라를 원수의 나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 백제의 의자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차례로 신라땅을 차지해 나갔다.

 

○ 성공을 거듭한 의자왕은 점차 거만해져갔고 정치와 군사 훈련에 소홀해져갔는데, 신라는 이 틈을 타 역공할 방법을 모색했다.

 

○ 신라에 선덕여왕, 진덕여왕이 재위하는 동안에도 실제 권력자는 김춘추였다.

 

○ 김춘추는 고구려 연개소문을 찾아가 외교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에 당나라로 찾아가 당태종과 군사 동맹을 맺게 되었다.(나당동맹)

 

○ 한편 고구려는 끊임없는 당나라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군사 사기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

 

○ 신라의 진덕여왕이 죽고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이 되었다.

 

○ 무열왕(김춘추)은 백제 공격을 시작으로 삼국 통일 전쟁의 첫걸음을 내딛였다.

 

○ 김춘추의 사위이자 처형인 김유신이 삼국통일 전쟁을 지휘했다.

 

○ 당나라 소정방,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 이 때 백제 계백장군의 황산벌 전투가 벌어졌다. (계백 <-> 신라 관창)

 

○ 고구려 연개소문의 세 아들의 권력다툼으로 고구려도 나당연합군에 지고 말았다.

 

 

 

▽▼

 

○ 고구려, 백제를 정복한 후 당나라는 백제 땅을 지배하려는 야욕으로 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 젊은이들을 죽이는 등

극심한 횡포를 부렸다.

 

○ 백제의 장군이었던 흑치상지가 부흥군을 모집하고 부흥활동을 벌였으나 내부 분열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이후 당나라 장군이 되어 백제 부흥군 진압에 나서게 되었다.

 

○ 고구려에도 검모잠의 활약으로 부흥운동이 커져가고 있었으나, 고구려 귀족 안승의 손에 죽고 말았다.

 

○ 검모잠을 죽인 안승이 신라에 항복하고, 신라는 보덕국이라는 허울뿐인 나라를 세워 안승을 왕으로 세웠다.

 

○ 통일 전쟁 와중에 신라 태종 무열왕과 당 태종이 서거하였다. 당나라를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는 등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냈다.

 

○ 무열왕에 이어 왕이된 문무왕은 백제 땅에 남아 있는 당군을 모조리 몰아내고 당군과의 싸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당군과의 매소성, 기벌포 싸움에서 신라가 승리하여 비로소 삼국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 전쟁이 끝나고 문무왕은 평화 시대에 걸맞는 부드러운 정치, 애민 정치를 폈다.

 

 

 

 

 

 

 

도움이 좀 되었나요?

 

 

오늘은 통일신라가 되기까지 치열하게 벌어졌던 삼국 전쟁을 다루어보았습니다.

 

부끄럽지만 한국사 지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아는게 없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하나 둘 알게 되니

 

어릴때와는 달리 알게 되는 즐거움이 아주 쏠쏠하네요 ^^

 

이런 마음으로 공부했더라면 ...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가 이 공부블로그에 여러 학습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요약정리하면서 운영하고 있는데요.

 

대부분, 읽고 있는 책을 요약 정리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포스팅을 한답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었길 바라요 ♡

 

 

그럼 다음 시간에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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