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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의 탕평책 ●

▶ 영조는 즉위 후 붕당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습니다.

 

▶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이며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오래 살았고, 재위 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었습니다.

 

▶ 처음에는 탕평책을 잘 썼지만, 소론 세력과의 화합에 실패해서 소론 대부분을 내쫒고 붕당 싸움에 휘말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양반의 사치스러운 생활 금지,  곡식 낭비를 줄이고자 금주령 시행, 합리적인 형벌제도, 신문고 부활, 군포 축소, 균역법 등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를 많이 한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18세기 조선 ●

 

▶ 17세기 동안 전후 복구를 위해 애쓴 덕분에 논에 물을 대는 저수지를 많이 만들고 모내기법이 활성화 되어 벼의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 토지 매매가 유행하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발생하고 땅을 잃은 농민들은 수공업이나 광산, 포구로 일거리를 찾아나서게 됩니다.

이에 자연스레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거래를 위한 화폐로 상평통보가 널리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 정조 ●

 

▶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붕당이 다시 한번 갈라졌는데, 사도세자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쪽을 벽파,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던 쪽을 시파라고 불렀습니다.

벽파에는 노론 대부분이 속했고, 시파에는 소론과 노론 일부, 남인이 속해있었습니다.

 

▶ 벽파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세손의 즉위를 막았지만 정조는 무사히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 붕당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붕당에 상관없이 사람됨과 능력을 보고 인재를 뽑아 쓰고자 했습니다.

젊고 능력있는 인재들은 규장각으로 모아 공부에 매진하게 하고 많은 도서를 간행하고 수집하도록 하였습니다.

 

▶ 왕의 특별 부대인 장용영을 만들어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고 시전의 특권을 없애고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상업을 발달시켰기도 합니다.

 

▶ 노론의 텃밭인 한양을 벗어나 새로운 정치를 하고자 수원에 화성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규장각 출신의 정약용이 거중기, 유형거를 개발하여 화성 공사가 단기간에 완공될수 있었습니다.

 

▶ 수원 화성은, 화성 공사에 대해 빠짐없이 정리한 화성 성역 의궤 덕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 정조는 궁 밖 행차를 할 때마다 백성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했고, 노비 제도를 없애 모든 노비를 양인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생전에 노비 해방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사후 관청의 공노비들을 실제로 해방이 되었습니다.

 

 

 

● 실학 ●

 

▶ 조선 후기에는 현실을 개혁하고 백성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현실적인 학문, 실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실학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 실학의 선구자 유형원은 저서 [반계수록] 에서 자신이 목격한 조선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농업에서 찾았고, 모든 땅을 나라의 것으로 삼은 후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눠 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형원의 아이디어를 좀 더 현실적인 모습으로 바꾼 이익도 대표적인 실학자가 되겠습니다.

 

▶ 우리땅, 우리역사에 관심을 보인 실학자로는 발해고를 쓴 유득공,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 택리지를 쓴 이중환 등이 있었고,

▶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 조선의 상업구조의 문제점을 밝혔고 양반전이나 호질에서 양반들의 위선과 사회 문제들을 꼬집었습니다.

 

박지원은 청나라를 다녀 온 후 열하일기를 통해 외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고 상공업을 발전시켜 경제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북학파라고 합니다.

 

▶ 규장각 학자 출신인 박제가도 북학의를 통해 청나라 기술을 알리고 조선의 문제점과 대책을 기술하였습니다.

 

▶ 홍대용은 모든 사람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신분제도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으며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야 조선이 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실학은 정약용 덕분에 더욱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약용은 조선 정치, 경제, 과학, 역사, 철학 등 모든 분야의 학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조가 죽은 후 다시 노론이 득세하자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18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유배 생활동안 500여권의

책을 썼으며 대표적인 책이 목민심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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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 ●

 

▶임진왜란으로 불안해진 조선, 선조는 후궁의 아이로 태어난 광해군의 총명함을 믿고 세자로 책봉한다.

 

▶선조가 새로 맞은 중전이 영창대군을 낳아 광해군의 입지가 불안해졌으나, 아직 아기였던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올릴 수 없었기에

선조가 죽은 후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왕위에 등극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몸소 전쟁터에 참가해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겪었던 광해군은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토지 크기에 따라 쌀로 통일하여 세금을 내게 하는 대동법 시행

동의보감 완성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펴내어 백성 교화

성곽 수리, 궁궐 재건등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고 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중립 실리 외교를 펼쳐서 전쟁을 다시 겪지 않도록 노력했다.

 

▶성리학의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 세력이 광해군이 서자 출신이라는 것과 명나라 홀대를 이유로 들어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 때 도움을 준 세력의 부추김으로 영창 대군과 친형 임해군 살해를 묵인하였고, 인목 대비를 폐위시킨 잘못이 있었다.

전후 재건을 위한 궁궐공사로 백성의 원망도 높아져 갔다.

 

▶결국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조카인 인조에게 왕위를 내어주게 된다.

 

 

● 효종과 호란 ●

 

▶인조가 즉위한 이후 조선은 친명배금 정책을 썼기 때문에 후금의 미움을 받았다. 이에 1627년 1월 후금이 기습 공격해왔는데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양국간 형제의 나라가 되기로 협상하였지만, 1636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군신관계와 공물을 요구하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인조가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두 왕자는 이후 행보가 달랐다. 소현 세자는 청 대신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서양문물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봉림 대군은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기며 청에 복수하고자 했다.

 

▶ 나중에 두 왕자가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인조는 소현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봉림 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봉림 대군이 후에 효종이 된다.

 

▶ 효종은 척화파를 등용하고 군비 강화에 힘쓰는 등 북벌을 추진했다. 하지만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는 청나라의 요구로 인해 나선정벌에 나서게 된다.

 

▶ 한양의 정예부대인 훈련도감을 자꾸 늘리자 그에 따라 군비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게 되었다. 지방은 빌어먹는 백성들이 늘고 도적떼가 들끓었다.

 

●현종과 당쟁●

 

▶ 임진왜란 전 4번의 사화 끝에 훈구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사림파는 김효원과 신의겸 사이에 이조전랑이라는 벼슬자리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자

정치에 대한 입장 차이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동인은 또다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졌다.

 

▶ 효종이 죽자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을것인가에 대해 대립이 생겼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은 당시 권력을 쥐고 있는 서인들의 말에 따랐으나 뒤에 효종비가 죽었을 때에는 남인의 말을 따라 이후 서인이 쫒겨나고

남인이 권력을 잡게 된다.

 

▶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양쪽 붕당이 번갈아가며 조정 일을 맡아보는 '환국' 정치 방식을 이용했는데, 이  때문에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한층 심각해졌다.

 

▶ 서인 집안이었던 인현왕후와 남인 집안이었던 장희빈의 싸움도 이런 붕당정치의 상황과 맞물려있었다.

 

▶ 공납 제도 때문에 중간에서 이득을 꾀하는 무리들의 방납 관행이 퍼지면서 공물을 쌀이나 베로 통일시킨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들의 부담이 커지고 일반 백성들의 고통은 줄었으며, 나라에 물품을 대주는 공인이라는 직업이 생겨 수공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 서인도 남인과 겨루는 과정에서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뉘게 되었다.

숙종의 후사를 두고 장희빈의 아들을 지지한 소론과, 무수리 사이에서 태어난 연잉군을 지지한 노론이 대립하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 후 4년만에

죽고 연잉군(영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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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정리_사림의 시대, 조선

 

 

조선건국을 둘러싸고 신진사대부들은 개혁의 방향을 두고 서로 맞서기 시작했다.

 

정도전, 권근 등은 조선을 세우는데 적극 참여한 반면 정몽주, 길재 등은 조선 건국에 반대하였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잡아 조선을 건국했다. 정몽주는 죽임을 당하였고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성리학을 공부하며 제자를 길렀는데, 이들이 사림의 뿌리이다.

 

 

유교는 공자가 세운 사상이고, 성리학은 송나라 주희가 유학을 연구하여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시킨 주자학을 말한다.

 

 

단종의 자리를 빼앗아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반발한 사림은 세조를 왕으로 세운 훈구파 (한명회, 유자광 등) 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훈구파는 각종 정변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높은 벼슬을 하던 무리를 일컫는 말로 불법으로 토지를 빼앗는 등 백성을 괴롭히는 자가 많았다.

 

 

어진 임금이었던 성종 때에 이르러 김종직 같은 사림을 인재로 등용했는데, 이들이 형성한 집단을 사림파라고 하였다.

 

 

삼사의 요직에 앉았던 사림파는 훈구파의 비리를 집중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사림파와 훈구파와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사림파는 몇 차례 큰 화를 당하는데 이를 사화라고 한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이 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의 조의제문이 사초(실록의 원고)에 실리자, 이를 빌미로 많은 사림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사약을 받아 죽은 일을 가지고 이에 가담한 신하들을 죽인 사건이었는데 훈구파, 사림파 둘 다 피해가 컸다. 이때 이미 죽은 한명회의 무덤을 파헤쳐서 처형시킬 정도로(부관참시) 연산군의 분노가 컸다.

 

 

위협을 느낀 훈구파는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키게 된다.

 

 

중종은 경연을 새로 열고 성균관을 부활시키는 등 새로 유학을 일으켜 제대로 된 정치를 하고싶었으나 반정 공신들의 힘에 눌려 실현하기 힘들자 조광조 같은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현량과, 향약 등 여러 개혁을 추진하였고 공로가 없이 반정공신 목록에 들어간 인물을 삭제하라는 상소를 올려 위훈삭제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불만을 품은 훈구파는 주초위왕 사건을 만들어 중종이 조광조를 내치도록 종용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 김구, 김식등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를 기묘사화라고 한다.

 

 

인종을 지지하던 사림이 화를 입은 을사사화 이후 권력을 잡은 윤원형이 비리를 저질러 나라가 어려워지자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는 등 백성들의 저항이 거세졌다.

 

 

이로써 훈구파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사림파가 다시 등장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였다.

 

 

 

선조 때에 이루러 사림이 조정의 중요한 자리를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고 생각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토론하는 붕당정치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이조 전랑직을 두고 이효원을 추천한 자들은 동인, 심의겸을 추천한 자들은 서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광조의 죽음으로 흐지부지된 향약(향촌의 안정을 꾀하는 규약)은 선조때에 이르러 이황, 이이의 활약으로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향약은 고을의 질서를 유지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기능뿐 아니라 지방관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기능도 하였다. 이로 인해 향약을 주도한 사림의 지위와 역할도 강력해졌다.

 

 

사림은 지방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도 설립해나갔다. 서원에서 학문을 연구할 뿐 아니라 선현들의 제사를 지내고, 서적을 만드는 일도 하였다.

 

 

선비들은 성리학 이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최고로 생각했다.

 

 

아무 무늬가 없는 순수한 백자에는 깨끗함을 추구하는 선비들의 이상이 담겨있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학파는 퇴계 이황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퇴계 학파와 율곡 이이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율곡학파가 있었다.

 

 

이황은 성리학의 핵심 내용을 열개의 그림으로 정리한 <성학십도>를 선조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마음 수양을 중시해서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내려가 제자 양성에 힘썼다.

 

 

율곡 이이는 아홉번이나 장원 급제를 할 정도로 똑똑했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선비의 포부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격몽요결> <성학집요> 등을 저술했다.

 

 

이밖에도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한 조식, 독학으로 공부한 화담 서경덕, 서경덕의 제자로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 이황과 8년동안 사단칠정 논쟁을 한 고봉 기대승 등 성리학을 발전시킨 학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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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8년,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세종은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애초에 세자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 세자교육을 소홀히 하고 놀기에만 열중하자 태종은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임명하였는데, 그가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 세종은 학문을 사랑하고 책읽기를 무척 좋아하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 세종은 유교의 정치 이념에 따라 민본 정치, 애민 정치를 실현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그 다음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병으로 일찍 죽었고, 문종의 어린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단종은 12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해서 김종서, 성삼문 등 관료들의 도움으로 정치를 해 나갔는데, 이 때문에 왕권이 약화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단종의 삼촌인 수양 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는데 (계유정난) 그가 바로 세조입니다. 왕위 찬탈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막상 왕이 되고 나서는 강력한 왕권 강화를 발판으로 삼아 제도와 문화 정비 작업을 활발하게 추진하는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 조선 최고의 법전 경국대전의 편찬 작업도 이때 시작되었습니다.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선비들을 사육신, 단종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절의를 지킨 선비들을 생육신이라고 부릅니다.

 

○ 세조 다음의 왕인 예종도 문종 처럼 일찍 죽고 13세의 성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어린 나이때문에 정희 대비가 성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성종이 스무살이 되어서는 직접 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세종과 마찬가지로 어진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세조 때 없어진 경전 제도(신하와 왕이 경전을 읽으며 토론하고 국가 일을 의논)를 시행하고 홍문관을 학술 연구 기관으로 삼았습니다.

 

○ 성종의 왕비 윤씨가 투기가 심해 성종 얼굴에 생채기를 내는 일이 발생하자 사약을 내렸는데, 이 일로 아들 연산군때 사화가 발생하게 됩니다.

 

 

 

 

 

 

○ 세종 때 특별히 집현전을 아껴서 학문이 뛰어난 선비들을 뽑아 학문 연구에만 힘쓰도록 장려하였는데, 그 덕분에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와 같은

뛰어난 학자가 많이 나오게 됩니다.

 

○ 집현전에서 고려사, 오례의, 팔도지리지, 용비어천가, 삼강행실도, 의방유취 등의 서적을 편찬하여 학문과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습니다.

 

○ 세종은 우리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고, 문서를 읽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1446년 훈민정음을 널리 반포하게 됩니다. 많은 조정 관료들이 한자를 쓰지 않고 다른 문자를 쓰는 것이 오랑캐와 같다며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백성들을 위해 단호하게 훈민정음을 시행시킵니다.

 

○ 세종이 독자적인 천문학을 발달시키고자 경북궁 내 간의대라는 천문대를 설치하고 한양의 해, 달, 별을 관찰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측우기를 발명하게 해서 비의 양을 측정하는 등 과학에 관심을 많이 보였습니다.

 

○ 세종의 과학 사랑 덕분에 노비 장영실은 과학자로 출세하게 되었고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아 간의,  자격루, 혼천의, 앙부일구 등의 발명품을 남겼습니다.

 

○ 우리나라 토지와 기후에 알맞게 농업 기술을 정리하여 농사직설을 편찬하였습니다.

 

 

 

 

○ 외교적으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도 참고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를 수입하였습니다.

 

○ 덕분에 명나라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수시로 조선에 처들어와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와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 세종 때 이종무가 쓰시마 섬을 정벌하여 다시는 조선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왜구의 약속을 받아옵니다.

 

○ 조선 초 한반도 북쪽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여진족과 압록강, 두만강 일대에서 잦은 싸움이 일어났는데, 세종 때 김종서가 두만강 근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함으로써 오늘날과 비슷한 국경이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 세조 때 시작한 조선 최초의 종합 법전인 경국대전이 성종 때 간행되었습니다. 고려때에는 왕의 말 한마디 한마디로 일이 정해졌기 때문에 구체적인 법에 의해 통치되는 법치국가로서의 조선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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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이란 말은 문신과 무신을 아울러 지칭하는 말인데, 유명한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같은 사람들은 문과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해 나라의 행정을 담당하였고

무신은 무과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해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무신으로는 이순신을 들 수 있겠네요.

 

◆ 나중에는 관직에 직접 몸담은 사람뿐 아니라 신분이나 지체가 높은 지배층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됩니다.

 

◆ 양반의 기본 재산은 토지와 노비를 들 수 있어요. 농업이 가장 중요한 기간 산업이었으므로 논밭이 제일의 재산으로 쳤고, 이 논밭을 일구는 노비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이 모두

양반들이 먹고 사는데 필요한 재산 가치였던 것이죠.

 

◆ 양반으로서 떳떳하게 행세하기 위해서 관직이 필요했는데, 관직을 얻는 방법으로는 1, 과거급제 2. 음서 3. 유일이라는 방법이 있었어요.

과거 급제는 말 그대로 과거라는 시험을 치는 것이고, 음서는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의 아들이 과거를 스킵하고 바로 관직을 받을수 있는 일종의 낙하산이었던 거구요.

유일은 추천제를 말합니다. 학식이나 덕망이 높은 경우 추천을 받아서 관직을 얻게 되는 방법입니다.

 

◆ 하지만 조선사회에서는 음서는 좀 쪽팔리는 일로 알아서 대부분 과거시험 준비를 하는 분위기였다고 하네요.

 

◆ 과거에는 문과, 무과외에도 외국어, 의학, 천문학 등의 전문기술직을 뽑는 잡과도 있었대요.

 

◆ 조선은 무신보다 문신을 우대하는 경향이 강했고 임진왜란 이후 무과를 더욱 대거 뽑아 합격자수가 많아지다보니 무과는 더욱 천시받게 되었습니다.

과거급제라 하면 보통 문과 급제를 말하는데, 이는 자신뿐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기도 할만큼 양반들 사이에 워너비 목표라고 할 수 있었어요.

 

◆ 과거의 1차 관문인 소과에 응시하기 위해 지방에서는 향교를 다니고 서울에서는 사부학당(사학)을 다녔는데, 나중에는 지방에서도 국립인 향교보다는 사립인 서원이 더 인기가 있어

서원으로 많이 몰렸다고 합니다. 일단 소과에 합격한 사람들은 성균관(태학)에 들어가 대과시험을 준비했죠.

 

 

 

 

◆ 관료가 되면 나라에서 급료의 개념으로 녹봉을 받고, 농민 땅에서 나오는 세금을 대신 받을 수 있는 세금징수권인 과전도 따로 받았습니다.

조선시대 관료들은 국상, 부모상을 당하거나 명절이 아니고서는 매일 출근했다고 하네요 ^^ 주5일제는 꿈도 못꿀 이야기 ㅋㅋ

 

◆ 양반들의 생각과 행동의 밑바닥은 유교가 깔려있었습니다. 유학을 공부하며 자라고 유교 정치를 하고 유교 의식으로 장례를 치뤘으니 유학을 모르고서는 양반 행세를 할 수 없었지요.

 

◆ 천자문을 떼고 나면 동몽선습, 효경, 소학등을 배우고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 중국 역사책등을 배우는 것이 양반들의 유학 커리큘럼이었습니다.

 

◆ 유교 사상은 충효가 기본이 되었고, 양반사회에서는 특히나 주자가례에 의한 예를 중시하였습니다.

 

◆ 조선시대 양반은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여 형식에 얽매이는 폐단이 있었지만 명예를 중시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 조선시대에는 신분이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나뉘어졌는데, 천인은 천한 신분인 노비를 뜻했고

양인은 천인 이외의 사람을 일컬었어요. 양인은 또다시 양반, 중인, 평민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같은 양인이어도 양반이냐 중인이냐 평민이냐에 따라 빈부차, 지위차이, 교육차이가 뚜렷했어요.

 

◆ 노비는 평민과 결혼을 하더라도 한쪽이 노비면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되었기 때문에 노비의 수는 날이 갈수록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조선 중기에는 전 인구의 50프로 가까이가 노비였다고 하네요 ;

 

◆ 평민들은 농업, 어업, 수공업, 상업에 종사하여 나라의 세금 가운데 가장 큰 몫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세금에는 토지세인 조(租), 군역인 용, 특산물 생산인 조(調), 세 가지가 있었고

군역은 처음에는 양반에게도 부과되었지만 점차 평민에게만 부과되었다고 합니다.

 

◆ 평민들은 살림이 넉넉치 못했고 한 살 이전에 죽는 아이도 많았다고 하네요. 어쩌다 한살을 넘겨도 천연두, 홍역같은 질병등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태어나자마자부터 삶이 고단했을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재밌게 읽으셨나요? ^^

 

 다음 포스팅에서는 조선시대의 문화를 좀 더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구요~행복한 불금 되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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