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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의 탕평책 ●

▶ 영조는 즉위 후 붕당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습니다.

 

▶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이며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오래 살았고, 재위 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었습니다.

 

▶ 처음에는 탕평책을 잘 썼지만, 소론 세력과의 화합에 실패해서 소론 대부분을 내쫒고 붕당 싸움에 휘말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양반의 사치스러운 생활 금지,  곡식 낭비를 줄이고자 금주령 시행, 합리적인 형벌제도, 신문고 부활, 군포 축소, 균역법 등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를 많이 한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18세기 조선 ●

 

▶ 17세기 동안 전후 복구를 위해 애쓴 덕분에 논에 물을 대는 저수지를 많이 만들고 모내기법이 활성화 되어 벼의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 토지 매매가 유행하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발생하고 땅을 잃은 농민들은 수공업이나 광산, 포구로 일거리를 찾아나서게 됩니다.

이에 자연스레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거래를 위한 화폐로 상평통보가 널리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 정조 ●

 

▶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붕당이 다시 한번 갈라졌는데, 사도세자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쪽을 벽파,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던 쪽을 시파라고 불렀습니다.

벽파에는 노론 대부분이 속했고, 시파에는 소론과 노론 일부, 남인이 속해있었습니다.

 

▶ 벽파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세손의 즉위를 막았지만 정조는 무사히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 붕당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붕당에 상관없이 사람됨과 능력을 보고 인재를 뽑아 쓰고자 했습니다.

젊고 능력있는 인재들은 규장각으로 모아 공부에 매진하게 하고 많은 도서를 간행하고 수집하도록 하였습니다.

 

▶ 왕의 특별 부대인 장용영을 만들어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고 시전의 특권을 없애고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상업을 발달시켰기도 합니다.

 

▶ 노론의 텃밭인 한양을 벗어나 새로운 정치를 하고자 수원에 화성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규장각 출신의 정약용이 거중기, 유형거를 개발하여 화성 공사가 단기간에 완공될수 있었습니다.

 

▶ 수원 화성은, 화성 공사에 대해 빠짐없이 정리한 화성 성역 의궤 덕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 정조는 궁 밖 행차를 할 때마다 백성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했고, 노비 제도를 없애 모든 노비를 양인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생전에 노비 해방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사후 관청의 공노비들을 실제로 해방이 되었습니다.

 

 

 

● 실학 ●

 

▶ 조선 후기에는 현실을 개혁하고 백성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현실적인 학문, 실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실학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 실학의 선구자 유형원은 저서 [반계수록] 에서 자신이 목격한 조선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농업에서 찾았고, 모든 땅을 나라의 것으로 삼은 후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눠 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형원의 아이디어를 좀 더 현실적인 모습으로 바꾼 이익도 대표적인 실학자가 되겠습니다.

 

▶ 우리땅, 우리역사에 관심을 보인 실학자로는 발해고를 쓴 유득공,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 택리지를 쓴 이중환 등이 있었고,

▶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 조선의 상업구조의 문제점을 밝혔고 양반전이나 호질에서 양반들의 위선과 사회 문제들을 꼬집었습니다.

 

박지원은 청나라를 다녀 온 후 열하일기를 통해 외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고 상공업을 발전시켜 경제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북학파라고 합니다.

 

▶ 규장각 학자 출신인 박제가도 북학의를 통해 청나라 기술을 알리고 조선의 문제점과 대책을 기술하였습니다.

 

▶ 홍대용은 모든 사람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신분제도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으며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야 조선이 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실학은 정약용 덕분에 더욱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약용은 조선 정치, 경제, 과학, 역사, 철학 등 모든 분야의 학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조가 죽은 후 다시 노론이 득세하자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18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유배 생활동안 500여권의

책을 썼으며 대표적인 책이 목민심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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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 ●

 

▶임진왜란으로 불안해진 조선, 선조는 후궁의 아이로 태어난 광해군의 총명함을 믿고 세자로 책봉한다.

 

▶선조가 새로 맞은 중전이 영창대군을 낳아 광해군의 입지가 불안해졌으나, 아직 아기였던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올릴 수 없었기에

선조가 죽은 후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왕위에 등극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몸소 전쟁터에 참가해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겪었던 광해군은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토지 크기에 따라 쌀로 통일하여 세금을 내게 하는 대동법 시행

동의보감 완성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펴내어 백성 교화

성곽 수리, 궁궐 재건등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고 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중립 실리 외교를 펼쳐서 전쟁을 다시 겪지 않도록 노력했다.

 

▶성리학의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 세력이 광해군이 서자 출신이라는 것과 명나라 홀대를 이유로 들어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 때 도움을 준 세력의 부추김으로 영창 대군과 친형 임해군 살해를 묵인하였고, 인목 대비를 폐위시킨 잘못이 있었다.

전후 재건을 위한 궁궐공사로 백성의 원망도 높아져 갔다.

 

▶결국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조카인 인조에게 왕위를 내어주게 된다.

 

 

● 효종과 호란 ●

 

▶인조가 즉위한 이후 조선은 친명배금 정책을 썼기 때문에 후금의 미움을 받았다. 이에 1627년 1월 후금이 기습 공격해왔는데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양국간 형제의 나라가 되기로 협상하였지만, 1636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군신관계와 공물을 요구하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인조가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두 왕자는 이후 행보가 달랐다. 소현 세자는 청 대신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서양문물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봉림 대군은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기며 청에 복수하고자 했다.

 

▶ 나중에 두 왕자가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인조는 소현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봉림 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봉림 대군이 후에 효종이 된다.

 

▶ 효종은 척화파를 등용하고 군비 강화에 힘쓰는 등 북벌을 추진했다. 하지만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는 청나라의 요구로 인해 나선정벌에 나서게 된다.

 

▶ 한양의 정예부대인 훈련도감을 자꾸 늘리자 그에 따라 군비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게 되었다. 지방은 빌어먹는 백성들이 늘고 도적떼가 들끓었다.

 

●현종과 당쟁●

 

▶ 임진왜란 전 4번의 사화 끝에 훈구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사림파는 김효원과 신의겸 사이에 이조전랑이라는 벼슬자리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자

정치에 대한 입장 차이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동인은 또다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졌다.

 

▶ 효종이 죽자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을것인가에 대해 대립이 생겼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은 당시 권력을 쥐고 있는 서인들의 말에 따랐으나 뒤에 효종비가 죽었을 때에는 남인의 말을 따라 이후 서인이 쫒겨나고

남인이 권력을 잡게 된다.

 

▶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양쪽 붕당이 번갈아가며 조정 일을 맡아보는 '환국' 정치 방식을 이용했는데, 이  때문에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한층 심각해졌다.

 

▶ 서인 집안이었던 인현왕후와 남인 집안이었던 장희빈의 싸움도 이런 붕당정치의 상황과 맞물려있었다.

 

▶ 공납 제도 때문에 중간에서 이득을 꾀하는 무리들의 방납 관행이 퍼지면서 공물을 쌀이나 베로 통일시킨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들의 부담이 커지고 일반 백성들의 고통은 줄었으며, 나라에 물품을 대주는 공인이라는 직업이 생겨 수공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 서인도 남인과 겨루는 과정에서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뉘게 되었다.

숙종의 후사를 두고 장희빈의 아들을 지지한 소론과, 무수리 사이에서 태어난 연잉군을 지지한 노론이 대립하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 후 4년만에

죽고 연잉군(영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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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

 

 

 

 

주몽, 고구려를 세우다.

 

 

 

건국설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와 하늘의 신 해모수가 사랑에 빠졌다.

 

 

 

이를 알게 된 하백이 유화를 내쫒았는데, 부여의 금와왕이 이를 불쌍하게 여겨 유화를 거두었다.

 

 

 

알에서 태어난 고주몽이 활 실력도 뛰어나고 각종 무예에 뛰어나니 금와왕의 왕자들이 자신들의 자리에 위협을 느껴 주몽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남쪽땅으로 내려와 졸본에 자리를 잡고 고구려를 세웠다.

 

 

 

유리왕, 대무신왕.. 고국천왕 등 왕위를 이어오면서 왕권이 더욱더 강해졌고, 계루부 고씨가 계속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

 

였다.

 

 

 

220년 한나라가 망한 후 중국은 위,,오 세 나라로 갈라져 전쟁이 극심해졌다.

 

 

 

이 중 힘이 센 위나라가 고구려를 자주 침범했고, 동천왕, 미천왕때에 위와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고국원왕때는 전연이라는 나라가 침입하여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잡아가고, 미천왕의 무덤을 훼손하는 등 비통

 

한 일들을 겪었다.

 

 

 

고국원왕 자신도 백제(근초고왕때) 와의 싸움에서 백제 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소수림왕은 전연과 백제에 복수하는 것을 미루고, 나라에 제도를 정비하는 데 먼저 힘을 기울였다.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이라는 교육 기관을 세웠으며, 율령을 반포하였다.

 

 

 

 

 

 

고구려의 성장

 

 

 

 

391년 광개토대왕이 17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잃어버린 고구려의 땅을 되찾기 위해 백제와 전연(->후연)의 정복활동을 시작하였다.

 

 

 

백제의 관미성과 한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다.

 

 

 

고구려가 왜의 침입을 받고 있는 신라를 구원하러 간 사이, 후연이 침입하여 땅을 빼앗아 갔고, 이로써 본격적인 후연 정복 활동을 함으로써 동북아시아 최고 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즉위한 후, 중국과는 외교적으로 정면충돌을 피하고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고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반발하는 백제가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맞섰으나 장수왕은 백제 도읍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

 

왕을 죽였다.

 

 

 

신라도 공격하고 남한강 가에 중원 고구려비를 세웠다.

 

 

 

 

 

 

고구려의 문화

 

 

 

 

 

 

 

 

 

 

 

 

 

 

 

 

 

 

 

 

 

신랑이 신부집에서 머물며 일을 해주다가 아이를 낳고 , 그 아이가 다 자라면 신랑집으로 돌아가는 데릴사위제였다.

 

 

 

고구려의 거문고 연주자인 왕산악이 거문고를 연주하면,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출 정도였다고 한다.

 

 

 

씨름이나 수박회, 활쏘기 등으로 무예 실력을 겨루었다.

 

 

 

성쌓기를 잘해서 수많은 산성을 연결한 덕분에, 물샐틈 없는 방어막을 구축하였다.

 

 

 

 

 

흔들리는 고구려

 

 

 

 

장수왕이 죽은 후 왕권이 점차 약해지다가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심해져 나라가 혼란에 휩싸였다.

 

 

 

백제와 신라가 손을 잡고 쳐들어와 한강 유역을 도로 빼앗아 갔다.

 

 

 

위쪽으로는 돌궐족이 자주 침범해와서 남북으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589,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 하였다.

 

 

 

수 문제 때 고구려를 쳐들어왔으나 장마로 인해 되돌아갔다.

 

 

 

수 양제 때 우중문을 선두로 다시 쳐들어왔으나 을지문덕 장군의 전략에 말려 살수에서 전멸하였다.(살수대첩)

 

 

 

수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처음에는 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모든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을 빌미로 당이 처들어왔

 

.

 

 

 

패전을 거듭하다 마지막 안시성을 남겨두고 지친 당나라 군대가 철수함으로써 다시 한번 고구려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중국과의 기나긴 전쟁으로 고구려 국력이 급격이 쇠퇴하였다.

 

 

 

 

 

 

 

 

 

 

 

 

 

 

 

 

 

 

 

 

 

고구려의 멸망

 

 

 

백성의 삶이 고달파졌고, 연개소문의 독재로 기득권층의 원성도 자자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무너뜨리고 고구려에 처들어왔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치열한 권력다툼과, 지배자층의 배신으로 인해 나당연합군에 멸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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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8년,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세종은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애초에 세자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 세자교육을 소홀히 하고 놀기에만 열중하자 태종은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임명하였는데, 그가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 세종은 학문을 사랑하고 책읽기를 무척 좋아하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 세종은 유교의 정치 이념에 따라 민본 정치, 애민 정치를 실현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그 다음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병으로 일찍 죽었고, 문종의 어린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단종은 12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해서 김종서, 성삼문 등 관료들의 도움으로 정치를 해 나갔는데, 이 때문에 왕권이 약화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단종의 삼촌인 수양 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는데 (계유정난) 그가 바로 세조입니다. 왕위 찬탈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막상 왕이 되고 나서는 강력한 왕권 강화를 발판으로 삼아 제도와 문화 정비 작업을 활발하게 추진하는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 조선 최고의 법전 경국대전의 편찬 작업도 이때 시작되었습니다.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선비들을 사육신, 단종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절의를 지킨 선비들을 생육신이라고 부릅니다.

 

○ 세조 다음의 왕인 예종도 문종 처럼 일찍 죽고 13세의 성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어린 나이때문에 정희 대비가 성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성종이 스무살이 되어서는 직접 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세종과 마찬가지로 어진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세조 때 없어진 경전 제도(신하와 왕이 경전을 읽으며 토론하고 국가 일을 의논)를 시행하고 홍문관을 학술 연구 기관으로 삼았습니다.

 

○ 성종의 왕비 윤씨가 투기가 심해 성종 얼굴에 생채기를 내는 일이 발생하자 사약을 내렸는데, 이 일로 아들 연산군때 사화가 발생하게 됩니다.

 

 

 

 

 

 

○ 세종 때 특별히 집현전을 아껴서 학문이 뛰어난 선비들을 뽑아 학문 연구에만 힘쓰도록 장려하였는데, 그 덕분에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와 같은

뛰어난 학자가 많이 나오게 됩니다.

 

○ 집현전에서 고려사, 오례의, 팔도지리지, 용비어천가, 삼강행실도, 의방유취 등의 서적을 편찬하여 학문과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습니다.

 

○ 세종은 우리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고, 문서를 읽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1446년 훈민정음을 널리 반포하게 됩니다. 많은 조정 관료들이 한자를 쓰지 않고 다른 문자를 쓰는 것이 오랑캐와 같다며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백성들을 위해 단호하게 훈민정음을 시행시킵니다.

 

○ 세종이 독자적인 천문학을 발달시키고자 경북궁 내 간의대라는 천문대를 설치하고 한양의 해, 달, 별을 관찰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측우기를 발명하게 해서 비의 양을 측정하는 등 과학에 관심을 많이 보였습니다.

 

○ 세종의 과학 사랑 덕분에 노비 장영실은 과학자로 출세하게 되었고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아 간의,  자격루, 혼천의, 앙부일구 등의 발명품을 남겼습니다.

 

○ 우리나라 토지와 기후에 알맞게 농업 기술을 정리하여 농사직설을 편찬하였습니다.

 

 

 

 

○ 외교적으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도 참고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를 수입하였습니다.

 

○ 덕분에 명나라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수시로 조선에 처들어와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와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 세종 때 이종무가 쓰시마 섬을 정벌하여 다시는 조선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왜구의 약속을 받아옵니다.

 

○ 조선 초 한반도 북쪽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여진족과 압록강, 두만강 일대에서 잦은 싸움이 일어났는데, 세종 때 김종서가 두만강 근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함으로써 오늘날과 비슷한 국경이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 세조 때 시작한 조선 최초의 종합 법전인 경국대전이 성종 때 간행되었습니다. 고려때에는 왕의 말 한마디 한마디로 일이 정해졌기 때문에 구체적인 법에 의해 통치되는 법치국가로서의 조선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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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의 외할아버지였던 이자겸은 자기의 두 딸을 다시 인종에게 시집을 보내어,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 되었습니다.

혼인을 통해 왕실과 겹겹이 밀접한 관계를 맺어 권세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 실제로 이자겸의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몰랐으며 막대한 부까지 누렸습니다.

 

● 이자겸에게 위협을 느낀 인종이 외척 세력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이자겸이 도리어 난을 일으켜  궁궐로 쳐들어오게 됩니다.

 

이자겸의 난을 도와준 장수 척준경과 이자겸 사이가 틀어지자, 이를 기회로 이자겸을 몰아내 유배시키고 후에는 척준경도 정지상에 의해 탄핵당하고 맙니다.

이로써 외척가문 경원 이씨 세력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대한 태도와, 쇠락한 개경의 운을 버리고 도읍을 옮기자는 의견에 대한

생각이 달라 두 파로 나뉘었습니다.

 

서경파 (정지상, 묘청 등)

  신진 관리

 금나라에 사대 반대, 금나라 정벌 주장

독자적 연호 사용을 주장

 개경의 기운이 다하였으니 서경으로 도읍을 이전할 것을 주장

개경파 (김부식 등)

  개경 문벌 귀족

 나라의 안위를 위해 사대 필요. 금나라 연호를 사용할 것을주장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이 고생하니, 서경으로 도읍 이전을 반대

 

 

● 인종은 처음에는 서경에서 새로이 시작해보고자 새 궁궐인 대화궁 공사도 시작했으나 여러번 궁궐이 벼락을 맞아 불타는 일을 겪고서는

서경 천도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 서경 천도가 무산이 되자 묘청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서경으로 가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인종에게 서경으로 와 황제에 오르기를 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한 토벌군이 정지상 등 묘청과 가까운 인물을 다 죽여버리고

서경을 포위, 반란군을 진압하게 됩니다.

 

● 이로써 김부식은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 묘청의 난이 실패한 이후 북방 영토에 대한 고려의 관심도 점차 수그러들었고,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란 생각도 점차 약화되어 갔습니다.

한편 신라의도읍이었던 경주 출신 김부식은 고려가 고구려 보다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계승한 나라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 생각을 반영해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 고려가 건국되기 전 300년 가까이 중국을 다스리던 당나라가 멸망하고, 거란이 이후 요나라를 건설합니다.

 

● 이에 맞서 한족이 세운 송나라도 세력을 넓히면서 요와 송이 건국초부터 대립 양상을 띄다가, 요나라가 망한 뒤에는

여진족의 금나라가 다시 송나라와 대치되는 형국을 이루었습니다.

 

●  중국대륙은 어느 대국에 의해 통일되지 못하고 크고 작은 여러 나라가 서로 대립하며 전쟁을 하는 때였기 때문에

고려는 오히려 중국의 영향을 덜 받고 비교적 자유로운 국제 무대 환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동아시아에서의 위상이 높아진 고려는 스스로를 황제의 나라라고 칭하는 등 그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국가적 행사였던 팔관회에서도 다른 나라의 관리, 상인들이 고려의 왕에게 인사를 올린 후 선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 고려는 벽란도를 중심으로 해서 바닷길을 통한 무역이 특히 활발했습니다.

 

● 송나라가 주요 무역상대국이었고, 그 뒤를 이어 여진족, 일본, 대식국(아라비아) 상인들과도 교류를 늘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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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건국초부터 친척의 나라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원수의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태조 왕건은 거란이 선물로 보낸 낙타를 만부교에서 굶어죽게 하고 사신을 유배 보내는 등

적대적이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 하지만 이때에는 거란이 여진족 토벌, 발해 부흥 운동 진압등 할일이 많아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다가

이후 요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나서는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한족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우면서 송과 고려가 우호적으로 지내자 위기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 거란이 소손녕을 보내 고려를 침략하고 항복을 요구해올 때 , 고려는 서희가 강화 회담에 나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 고려가 요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여진족 때문이니, 함께 여진족을 몰아내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하면

송과 관계를 끊고 요와 교류하겠다고 제안하자, 소손녕도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이로써 고려가 강동6주를 차지하게 됩니다.

 

● 한동안 평화로웠던 고려에 또 한번 혼란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어린 왕을 쫒아내고 새 왕을 세우려던 강조의 정변을 핑계삼아 문책한다는 명분으로 거란이 또다시 침입합니다. (ㄱㅓ란의 2차 침입)

하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 실제로는 군사적 요충지인 강동 6주를 빼앗기 위한 기회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 강동6주의 하나인 홍화진성의 양규장군 부대의 눈부신 활약에도 거란은 개경까지 내려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습니다.

 

● 고려는 현종이 직접 요에 조공한다는 조건을 걸어 전쟁을 종결시켰지만 , 전쟁 후 조공을 거절하여

요나라가 다시 침입해 옵니다. (거란의 3차 침입)

 

●  이 때 강감찬 장군이 고려의 지휘관이었는데 삼교천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거란군의 사기를 꺾어놓았습니다.

 그 뒤에도 거란군은 가는 곳마다 고려군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군사를 돌리게 됩니다.

 

퇴각하던 거란군은 귀주에서 다시 한번 강감찬 부대와 부딪혔고 이때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겨우 수천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  이 후 요나라는 더이상의 고려 침입을 포기하고 고려와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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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요, 금나라와는 공식적인 거래인 조공과 하사품의 형식의 공무역을 주로 하였고,

송나라와는 정식 국교가 없을 때에도 끊임없이 상인들이 개별적으로 오고가며 거래하는 사무역이 이어졌습니다.

 

● 송나라는 중국 영대 왕조중 가장 융성한 문화와 문물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고려는 사신, 상인의 왕래를 통해 송의 앞선 문물을 들여오는데 괌심이 많았습니다.

 

●  종묘사직을 비롯하여 제사에 유교 사상을 따르는 제도를 받아들인 것도 바로 송을 통해서 였습니다.

 

여진족은 삼국시대에 말갈족이라고 불리웠던 부족으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었으나, 후에는 발해에 포함되었다가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여진족은 조선 시대에 가서는 야인 , 그리고 만주족이라고 불렸습니다.

 

●  고려와 여진족이 함경도에서 무력 충돌이 났을 때 고려가 크게 패하고 말았는데, 고려는 패전 이유가 기병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기병 중심의 별무반을 새로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몇 년 뒤 윤관의 지휘하에 별무반 군사가 여진족 정벌에 나서 여진족을 몰아낸 자리에 동북 9성을 쌓았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족은 집요하게 공격을 계속하면서 9성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조공을 약속 받고 고려는 9성에서 군대를 철수하게 됩니다.

 

● 1113년 여진족은 막강한 세력으로 커져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와 송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킨 후 100여년간 영화를 누리다가 몽골족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고려는 정리를 해도 이야기할 게 많이 나오네요 ^^

 

다음 포스팅에서도 고려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꿉꿉한 장마철에 몸과 마음.. 지배당하지 마시구요.

 

이런 날일 수록 더 파이팅하는 거 , 아시죠?^^

 

 

그럼 다음 시간에 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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