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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의 첫 나라 고조선

 

 

 

 

신석기 끝자락에 농사가 본격화 되면서 잉여 생산물이 늘었고, 이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을 중재하는, 힘있는 자가 나타

 

나 족장으로 추대받았다. 이 때가 청동기 시대이다.

 

 

 

이로써 평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부족간의 싸움이 잦아지면서 무기를 강화할 필요성이 생겨나 청동무기를 쓰게 된다. 이 당시만해도 청동검은 지배자만

 

이 사용하는 귀한 것이었다.

 

 

 

거대한 고인돌 (족장의 무덤)로 그 당시 족장의 힘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서북부 일대에서 작은 부족들이 하나둘 통합되어 조선이라는 큰 나라가 생겨나는데, 이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

 

.

 

 

 

일연의 삼국유사 속,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고조선의 첫 임금은 단군왕검이다.

 

 

 

단군은 제사장의 뜻, 왕검은 정치적인 지배자라는 뜻을 가진 의미로 고조선의 임금은 종교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지배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철기시대의 도래

 

 

 

당시 전국 시대라는 혼란기를 겪는 중국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고조선에 쇠를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이로써 고

 

조선에도 철기 시대가 도래한다. (기원전 300년경)

 

 

 

철제무기로 막강한 힘을 가진 고조선은 영토도 넓히고 왕의 힘도 커졌다. 왕은 처음에는 여러 족장의 대표자일 뿐이었

 

으나 점차 큰 힘을 가지게 되어 나머지 족장들은 신하가 되었고, 고조선은 서서히 국가의 형태를 갖추어 갔다.

 

 

 

고조선 초기에는 비파형 동검이 주로 사용-> 세형동검을 사용하게 되었다.

 

 

 

신석기 시대에는 빗살무늬 토기가 사용된 반면, 고조선 때에는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가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미송

 

리식 토기 사용)

 

 

 

철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고인돌은 더이상 만들지 않고 널무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위만조선

 

   

 

중국의 혼란스러운 전국시대를 진나라의 시황제가 마감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세워질때까지 다시한번 혼란에 휩싸인 중국에서 고조선으로 내려오는 사람

 

들이 있었고, 그 중에 위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에게 관직과 땅을 주어 압록강 유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압록강 유역에서 신망을 얻은 위만은 준왕의 자리를 노리고 왕검성을 침입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앉았다.

 

 

 

위만은 여전히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이웃 나라를 정복해가며 더 큰 강국을 만들어 나갔다.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여러 나라와 물자를 교역하였다.

 

 

 

 

 

고조선 사회의 특징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귀족-평민-노비) 신분은 자손 대대로 세습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법, 범금팔조가 만들어져서 시행되었다.

 

 

 

주인이 죽으면 노비를 같이 산채로 무덤에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이웃나라인 부여도)

 

 

 

일반백성은 삼베옷, 귀족은 비단옷을 입었다.

 

 

 

 고조선의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즉위하였다. 우거왕은 북쪽 유목 민족인 흉노족과 동맹관계를 맺었는데, 한나라는 이를 못마땅

 

하게 여겼다.

 

 

 

고조선+ 흉노족 <----> 한나라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고조선이었지만, 지배층의 내부 분열과 배신으로 왕검성이 함락되었다.

 

 

  삼국시대

 

 

 

한나라가 고조선땅을 식민지화할 생각으로 한사군을 설치하였으나 고조선 주민들의 반대로 철회하게 되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고조선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터전을 잡고 그 곳에서 쇠 만드는 기술을 전파함으로써 고구려, , 신라 등 새로운 나라가 일어서는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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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수로 지운 포스팅을 다시 올립니다~

연대기순으로 올려야 되는데 부득이 죄송하게 되었어요 ㅜㅜ

보기 불편하시더라도 양해 부탁드려용~

 

 

 

 

인류의 진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처럼 구부정한 모습으로 걷다가 허리를 펴고 똑바로 걷기 시작하는 호모 에렉투스로 진화하였다.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되면서 바다 높낮이가 변화하고 바다였던 곳이 육지로 변해, 아프리카 대륙에만 모여있던 호모

 

에렉투스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불을 사용할 줄 알았던 호모 에렉투스는 점차 창, 찌르개 같은 도구를 만들고 말을 할 줄 아는, 발달된 지능의 호모 사피

 

엔스로 진화하였다.

 

 

 

더욱더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현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서해 바다도 육지였던 때 호모 에렉투스가 한반도까지 이동해왔으나 호모 사피엔스와의 경쟁에서 밀려난 것으로 추측

 

된다.

 

 

 

 

 

 

구석기 시대

 

 

 

한반도에 호모 에렉투스가 도착하면서 구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하고, 수집, 사냥등으로 살아갔다. 먹을 것을 찾아 계속 이동생활을 하고, 근처 동굴에서 살

 

았다.

 

 

 

동물의 가죽이나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추위를 버텼다.

 

 

 

나무나 동물의 뼈, 돌을 이용해 도구를 만들어 썼다.

 

큰 돌을 쪼개서 쓰는 뗀석기를 사용했다.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긁개, 으깰때 쓰는 찍개, 나무 막대기에 달아 창처럼 쓰는 슴베찌르개, 새기개 등이 모두 뗀석기

 

이다.

 

 

 

뗀석기가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 진것이 주먹도끼였다.

 

 

 

자연적인 산불에서 불씨를 가지고 옴으로써 구석기 사람들은 불을 가지게 되었다.

 

 

 

불이 있어서 음식도 익혀 먹고, 짐승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으며 추위를 견디기가 쉬워졌다.

 

    

 

 

 

 

신석기 시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와 자연환경이 변했다. 이로써 사람들의 생활도 바뀌어 신석기 시대가 도래했다.

 

 

 

한반도에는 기원전 8천년경부터 신석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먹을 것과 마실 물이 풍부한 강가나 해안가에 움집을 짓고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조개더미 유물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신석기 시대에는 해빙기로 인해 바다 생물이 풍부해서 조개와 굴이 차고 넘쳤을

 

것이다.

 

 

 

돌을 갈아서 훨씬 날카롭게 만들었는데, 이를 간석기라고 한다.

 

 

 

낚시바늘, 그물추, 그물, 작살 등 다양한 사냥 도구를 개발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짐승도 가두어 기르기 시작했다.

 

 

반달돌칼과 토기는 신석기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한 마을에는 어머니와 형제 관계인 친척들이 대부분으로 씨족 사회였다.

 

 

 

몸을 치장하는 장신구도 만들어 썼다. (조개 목걸이, 발찌 등)

 

 

 

가락바퀴로 실을 뽑고, 뼈바늘로 가죽을 꿰어 옷을 만들어 입었다.

 

 

 

마을의 연장자가 우두머리였으나 자식에게 물려주는 자리는 아니었고 평등사회였다.

 

 

 

식량의 원천인 자연의 변화에 민감해서 애니미즘이 발생하고,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어 장례 의식을 치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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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8년,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세종은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애초에 세자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 세자교육을 소홀히 하고 놀기에만 열중하자 태종은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임명하였는데, 그가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 세종은 학문을 사랑하고 책읽기를 무척 좋아하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 세종은 유교의 정치 이념에 따라 민본 정치, 애민 정치를 실현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그 다음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병으로 일찍 죽었고, 문종의 어린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단종은 12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해서 김종서, 성삼문 등 관료들의 도움으로 정치를 해 나갔는데, 이 때문에 왕권이 약화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단종의 삼촌인 수양 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는데 (계유정난) 그가 바로 세조입니다. 왕위 찬탈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막상 왕이 되고 나서는 강력한 왕권 강화를 발판으로 삼아 제도와 문화 정비 작업을 활발하게 추진하는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 조선 최고의 법전 경국대전의 편찬 작업도 이때 시작되었습니다.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선비들을 사육신, 단종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절의를 지킨 선비들을 생육신이라고 부릅니다.

 

○ 세조 다음의 왕인 예종도 문종 처럼 일찍 죽고 13세의 성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어린 나이때문에 정희 대비가 성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성종이 스무살이 되어서는 직접 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세종과 마찬가지로 어진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세조 때 없어진 경전 제도(신하와 왕이 경전을 읽으며 토론하고 국가 일을 의논)를 시행하고 홍문관을 학술 연구 기관으로 삼았습니다.

 

○ 성종의 왕비 윤씨가 투기가 심해 성종 얼굴에 생채기를 내는 일이 발생하자 사약을 내렸는데, 이 일로 아들 연산군때 사화가 발생하게 됩니다.

 

 

 

 

 

 

○ 세종 때 특별히 집현전을 아껴서 학문이 뛰어난 선비들을 뽑아 학문 연구에만 힘쓰도록 장려하였는데, 그 덕분에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와 같은

뛰어난 학자가 많이 나오게 됩니다.

 

○ 집현전에서 고려사, 오례의, 팔도지리지, 용비어천가, 삼강행실도, 의방유취 등의 서적을 편찬하여 학문과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습니다.

 

○ 세종은 우리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고, 문서를 읽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1446년 훈민정음을 널리 반포하게 됩니다. 많은 조정 관료들이 한자를 쓰지 않고 다른 문자를 쓰는 것이 오랑캐와 같다며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백성들을 위해 단호하게 훈민정음을 시행시킵니다.

 

○ 세종이 독자적인 천문학을 발달시키고자 경북궁 내 간의대라는 천문대를 설치하고 한양의 해, 달, 별을 관찰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측우기를 발명하게 해서 비의 양을 측정하는 등 과학에 관심을 많이 보였습니다.

 

○ 세종의 과학 사랑 덕분에 노비 장영실은 과학자로 출세하게 되었고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아 간의,  자격루, 혼천의, 앙부일구 등의 발명품을 남겼습니다.

 

○ 우리나라 토지와 기후에 알맞게 농업 기술을 정리하여 농사직설을 편찬하였습니다.

 

 

 

 

○ 외교적으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도 참고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를 수입하였습니다.

 

○ 덕분에 명나라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수시로 조선에 처들어와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와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 세종 때 이종무가 쓰시마 섬을 정벌하여 다시는 조선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왜구의 약속을 받아옵니다.

 

○ 조선 초 한반도 북쪽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여진족과 압록강, 두만강 일대에서 잦은 싸움이 일어났는데, 세종 때 김종서가 두만강 근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함으로써 오늘날과 비슷한 국경이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 세조 때 시작한 조선 최초의 종합 법전인 경국대전이 성종 때 간행되었습니다. 고려때에는 왕의 말 한마디 한마디로 일이 정해졌기 때문에 구체적인 법에 의해 통치되는 법치국가로서의 조선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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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이란 말은 문신과 무신을 아울러 지칭하는 말인데, 유명한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같은 사람들은 문과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해 나라의 행정을 담당하였고

무신은 무과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해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무신으로는 이순신을 들 수 있겠네요.

 

◆ 나중에는 관직에 직접 몸담은 사람뿐 아니라 신분이나 지체가 높은 지배층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됩니다.

 

◆ 양반의 기본 재산은 토지와 노비를 들 수 있어요. 농업이 가장 중요한 기간 산업이었으므로 논밭이 제일의 재산으로 쳤고, 이 논밭을 일구는 노비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이 모두

양반들이 먹고 사는데 필요한 재산 가치였던 것이죠.

 

◆ 양반으로서 떳떳하게 행세하기 위해서 관직이 필요했는데, 관직을 얻는 방법으로는 1, 과거급제 2. 음서 3. 유일이라는 방법이 있었어요.

과거 급제는 말 그대로 과거라는 시험을 치는 것이고, 음서는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의 아들이 과거를 스킵하고 바로 관직을 받을수 있는 일종의 낙하산이었던 거구요.

유일은 추천제를 말합니다. 학식이나 덕망이 높은 경우 추천을 받아서 관직을 얻게 되는 방법입니다.

 

◆ 하지만 조선사회에서는 음서는 좀 쪽팔리는 일로 알아서 대부분 과거시험 준비를 하는 분위기였다고 하네요.

 

◆ 과거에는 문과, 무과외에도 외국어, 의학, 천문학 등의 전문기술직을 뽑는 잡과도 있었대요.

 

◆ 조선은 무신보다 문신을 우대하는 경향이 강했고 임진왜란 이후 무과를 더욱 대거 뽑아 합격자수가 많아지다보니 무과는 더욱 천시받게 되었습니다.

과거급제라 하면 보통 문과 급제를 말하는데, 이는 자신뿐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기도 할만큼 양반들 사이에 워너비 목표라고 할 수 있었어요.

 

◆ 과거의 1차 관문인 소과에 응시하기 위해 지방에서는 향교를 다니고 서울에서는 사부학당(사학)을 다녔는데, 나중에는 지방에서도 국립인 향교보다는 사립인 서원이 더 인기가 있어

서원으로 많이 몰렸다고 합니다. 일단 소과에 합격한 사람들은 성균관(태학)에 들어가 대과시험을 준비했죠.

 

 

 

 

◆ 관료가 되면 나라에서 급료의 개념으로 녹봉을 받고, 농민 땅에서 나오는 세금을 대신 받을 수 있는 세금징수권인 과전도 따로 받았습니다.

조선시대 관료들은 국상, 부모상을 당하거나 명절이 아니고서는 매일 출근했다고 하네요 ^^ 주5일제는 꿈도 못꿀 이야기 ㅋㅋ

 

◆ 양반들의 생각과 행동의 밑바닥은 유교가 깔려있었습니다. 유학을 공부하며 자라고 유교 정치를 하고 유교 의식으로 장례를 치뤘으니 유학을 모르고서는 양반 행세를 할 수 없었지요.

 

◆ 천자문을 떼고 나면 동몽선습, 효경, 소학등을 배우고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 중국 역사책등을 배우는 것이 양반들의 유학 커리큘럼이었습니다.

 

◆ 유교 사상은 충효가 기본이 되었고, 양반사회에서는 특히나 주자가례에 의한 예를 중시하였습니다.

 

◆ 조선시대 양반은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여 형식에 얽매이는 폐단이 있었지만 명예를 중시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 조선시대에는 신분이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나뉘어졌는데, 천인은 천한 신분인 노비를 뜻했고

양인은 천인 이외의 사람을 일컬었어요. 양인은 또다시 양반, 중인, 평민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같은 양인이어도 양반이냐 중인이냐 평민이냐에 따라 빈부차, 지위차이, 교육차이가 뚜렷했어요.

 

◆ 노비는 평민과 결혼을 하더라도 한쪽이 노비면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되었기 때문에 노비의 수는 날이 갈수록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조선 중기에는 전 인구의 50프로 가까이가 노비였다고 하네요 ;

 

◆ 평민들은 농업, 어업, 수공업, 상업에 종사하여 나라의 세금 가운데 가장 큰 몫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세금에는 토지세인 조(租), 군역인 용, 특산물 생산인 조(調), 세 가지가 있었고

군역은 처음에는 양반에게도 부과되었지만 점차 평민에게만 부과되었다고 합니다.

 

◆ 평민들은 살림이 넉넉치 못했고 한 살 이전에 죽는 아이도 많았다고 하네요. 어쩌다 한살을 넘겨도 천연두, 홍역같은 질병등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태어나자마자부터 삶이 고단했을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재밌게 읽으셨나요? ^^

 

 다음 포스팅에서는 조선시대의 문화를 좀 더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구요~행복한 불금 되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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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성혁명의 시작 , 위화도 회군

 

- 1388년,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 요동정벌을 하고자 고려군대는 요동으로 떠나게 됩니다.

 

- 하지만 우왕과 최영장군(우왕의 장인) 의 명령을 어기고 이성계는 부하들을 데리고 군대를 돌리는 일명 '위화도 회군' 이라 불리는 반란을 일으킵니다.

 

- 큰 명나라를 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이성계는 4불가론을 들어 요동정벌을 반대했으나 우왕과 최영장군이 그의 주장을 받아주지 않았고,

위화도에서 마침 큰 비가 내려 압록강을 건너기 어렵게 되자 군대를 돌린것이지요.

 

- 당시 이성계는 부패한 권문세족을 비판하는 신진 사대부와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정도전, 조준, 정몽주 같은 사람들이죠.

 

- 이들 신진사대부와 이성계는 권문세족을 몰아내는데 집중하였습니다. 권문세족들은 친원정책을 지지하고 이성계 라인은 친명정책을

지지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서로 생각이 달랐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 신진 사대부의 갈등

 

- 고려를 개혁하는 방향에 대해 서로 생각차가 있었던 신진 사대부들은 크게 파가 2개로 갈리어 싸우게 됩니다.

 

- 이색 , 권근 등의 온건파 신진 사대부와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파 신진 사대부로 나뉘어 지게 되는 것이죠.

 

- 우왕을 쫒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할 때 이 두 파가 본격적으로 싸우게 되는데요. 이성계와 손잡은 급진파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 우기며 우왕의 아들 창왕을 왕위에 올리기를 반대했습니다.

 

- 온건파는 이런 주장이 터무니 없다며 당연히 창왕이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 이성계와 급진파는 급기야 창왕을 몰아내고 이성계의 친척인 공양왕을 왕위에 앉히게 됩니다.

 

-토지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두 파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는데요. 결국은 급진파의 뜻대로 모든 권문세족의 토지를 거두어 들여 새로운 기준에 따라

다시 나누는 급진적인 토지개혁인 과전법을 실시하게 됩니다.

 

 

 

 

 

 

 

 

 

● 역성혁명으로 나아가다

 

 

 

- 고려 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온건파와 뜻이 달랐기 때문에, 이성계 아들 이방원은 온건파 정몽주를 만나

끈질기게 설득하였습니다.

 

 - 하지만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던 정몽주를 역성혁명을 위해 선죽교에서 제거해버립니다.

 

- 공민왕 비 안씨가 대비로 있었으므로, 형식적으로 고려 왕조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가질 수 있도록

공양왕을 폐위한다는 교서와 옥새를 강요하여 받아내게 됩니다.

 

- 몇번의 왕 추대를 거절하던 이성계는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방원의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조선을 건국하다.

 

- 조선 건국의 대표적인 공신 정도전은, 조선의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새 나라의 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 재상중심의 정치, 토지는 모두 국가 소유, 조선경국전을 기준으로 나라를 다스린다 등이 정도전이 생각한 새 나라의 모습이었습니다.

 

-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였고 왕도정치를 이상적인 정치철학으로 가졌습니다.

 

- 유교 사상으로 무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모든 고을에 국립학교인 향교를 세우고, 서울에는 성균관을 세워 유학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 고려에서 시행했던 팔관회, 연등회 등 불교 관련 의식은 모두 없애고 모든 의례를 유교 이념에 맞도록 정비하였습니다.

 

 

 

● 외교 정책

 

- 명나라처럼 강한 나라는 받들어 섬기고, 일본, 여진같은 이웃나라와는 우호적으로 교류하는

사대교린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 태조는 500년 가까이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을 떠나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습니다.

 

 

 

● 나라의 기틀

 

-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보았는데, 이에 가장 반발한 인물이 태조의 아들 이방원이었다고 합니다.

 

- 태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둘째 부인에게서 낳은 막내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이에 대해 첫째 부인 한씨의 아들들이 강한 불만은

품게 되었습니다.

 

- 조선을 세우는데 공이 컸으나 세자 책봉에도 밀려나고 개국 공신에도 들지 못한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불만이 가장 컸던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지요.

 

- 정도전은 태조가 아끼는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여 재상정치를 펼쳐보려 했기에, 이방원은 태조가 병이 난 틈을 타

정도전과 방석을 제거해버립니다.

 

- 태조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방과가 정종임금이 되었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제2차 왕자의 난으로

피바람이 불게 됩니다. 바로 방간, 방원 형제간의 왕위 다툼이었죠. 이 싸움에서 이긴 방원이 나중에 정종에게서 왕의 자리를 넘겨받게 됩니다.

 

- 이방원이 바로 태종으로 즉위한 것이지요.

 

 

 

 

 

● 태종의 정책

 

- 의정부의 힘을 약화시키고 6조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왕권 강화에 힘썼습니다. 아무리 외척이라도 권세를 과시하고 왕권에 도전하면

가차 없이 죽여버리곤 했지요.

 

- 공신들 가운데에도 태종의 정책에 불만이 있는 자는 무자비하게 제거해 나갔습니다.

 

- 사병을 이용해 권력을 쥘 수 있었던 태종은 자신과 같은 일이 또다시 벌어질것을 두려워 해 왕과 세자를 보호하는 군사 이외에는 모든 사병을 없앴습니다.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 여러 군현으로 나눈 다음 관찰사와 수령을 파견해 지방을 감시했습니다.

 

- 양전 사업을 통해 주인없는 땅을 나라의 것으로 귀속시키고 절에 소속된 토지를 나라에 귀속시켜 세금을 걷을 토지를 늘려갔습니다. 또한 국가에 대한 의무를

피하기 위해 숨는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인보제, 호포제를 실시하여 호적 제도를 정비해나갔습니다.

 

- 노비변정도감을 두어 고려 말기 노비가 된 양인들을 풀어주고 세금을 낼 양인을 확대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정책은 정말 똑똑한 정책이었던 것 같아요. @_@b )

 

 

 

 

머릿속에 잘 정리가 좀 되셨나요?^^

 

다음 시간에는 조선 시대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되 양반 중심, 유교 중심 사회로서의 조선의 특징에 좀 더 초점을 맞춘 포스팅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즐공하시고 우리 다시 만나요 ^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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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 휘둘리는 고려

 

○ 원나라는 충렬왕을 물러나게 하고, 그 뒤를 이은 충선왕도 얼마 안 가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등

고려 왕을 제멋대로 바꾸었습니다.

 

○ 원나라 공주와 고려왕이 정략 결혼을 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는 고려왕의 부부 사이까지 간섭을 했고 , 고려 여인으로 원나라 황제의 부인이 된

기황후 집안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친원세력의 횡포가 심했습니다.

 

○ 원나라에 바칠 공녀를 뽑기 위해 고려의 처녀들은 결혼을 금지 당했고, 공녀로 뽑힌 처녀의 집안은 밤낮으로 울음이 그치지 않았으며,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목매 죽는 사람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 권력을 가진 권문세족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땅과 노비를 늘려 거대한 농장을 운영해 나갔습니다.

 

○ 홍수, 가뭄으로 먹고 살일이 막막해지자, 부모는 아이를 팔고 남편은 아내를 팔고 주인은 자기 노비를 시장에 늘어놓고 파는 사람 시장도 생겨났습니다.

 

○ 권문 세족 뿐 아니라 사대부, 절 마저도 농장도 늘리기 위해 열을 올렸고 권문 세족 가운데에는 세금을 내지 않는 집안이 많아

힘없는 백성들이 부족한 세수를 메우는데 애를 쓸 수 밖에 없었고 ,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가거나 노비가 되는 백성도 생겨났습니다.

 

 

 

하루 아침이 다 가도록 도토리를 줍지만 도토리는 광주리에 차지 않고, 두 다리만 나무토막처럼 굳고 , 주린 창자는 소리쳐 운다. <상률가 中>

 

 

 

살리라 살리로다

청산에 살리로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리로다.

얄리얄리 얄랑셩 알라리 얄라 <청산별곡 >

 

○  원나라에 대항하여 일어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두차례에 걸쳐 고려 영토로 쳐들어왔으나 모두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  왜구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끊임없이 쳐들어왔고 세금으로 걷는 곡식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공격하거나 세금 보관 창고를 약탈, 사람도 잡아가는 등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 최영은 홍건적과 왜구를 대상으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성계는 황산 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습니다.

 

○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다시 부는 개혁의 바람

 

 

○ 스무세살의 젊은 나이로 즉위한 공민왕은 원나라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원과 연을 끊고 고려를 바로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 공민왕은 불법으로 빼앗은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고, 몽고식 복장과 머리모양을 금지하였으며 권문세족을 압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공민왕은 이름 없는 승려인 신돈에게 최고 관직을 내려주고 권문세족을 척결하고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도록 권력을 주었습니다.

 

○ 권문세족이 반발하여 신돈에게 반역죄를 씌워 상소를 올렸고, 공민왕의 신임을 잃은 신돈은 귀양을 갔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 신돈이 죽은 후 공민왕은 새로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새로 중국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 정몽주, 정도전, 권근 같은 성리학자들의 세력을 신진 사대부라고 하는데, 이 신진 사대부가 공민왕의 지지를 받아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 이후 공민왕은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 명나라가 고려 땅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보이자, 명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 집권층간의 첨예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 우왕은 명나라에서 고려로 들어오는 길목인 요동을 침으로써 명을 혼내주기로 결심하고 요동정벌 부대를 결성합니다.

 

○ 계속 되는 장마와 군 사기가 떨어지자 희망이 없는 전투라고 여긴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리기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을 하고 이를 막는 최영 장군까지 죽여버립니다.

 

○ 최영 장군이 처형 당하는 날 개경 사람들은 장사를 걷고 시장을 닫았으며 길가의 사람들이면 누구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 우왕은 공민왕과 신돈의 하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데, 이성계는 우왕을 공민왕의 자손으로 보지 않고 신돈의 아들이라고 모략하며

왕위를 폐하고 죽이게 됩니다. 우왕의 아들 창왕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 이성계는 자신의 친척인 공양왕을 왕으로 추천하였는데, 공양왕이 이성계 반대세력과 친하게 지내자

 

공양왕을 물러나게 하고 본인이 왕위에 올라 조선왕조를

열게 됩니다.

 

 

 

 

 

오늘은 혼란스러운 고려 말기의 역사 내용을 정리해봤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라요 ^^

 

다음 시간에는 드디어 조선시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있어하는 파트라서 더 기대되네요~

 

다음 포스팅으로 다시 만나요 ♡

 

 

 

TGIF!!!!

씐나는 불금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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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정변>

● 대표적인 문벌 귀족으로 위세가 대단했던 김부식의 아들이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그을리게 하여 조롱하는 등

문신들이 무신을 얕잡아 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 장군, 여진족을 정벌한 윤관 장군도 모두 문신의 신분으로 군사 지식마저도 뛰어나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일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없는 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자 문인들은 더이상의 무술 연마를 게을리하고 시, 문장 짓는 일에 몰두하면서 점차 무예와 무인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 의종이 행차 중에 오병 수박희라고 불리는 무예 겨루기를 무신들에게 시켰는데, 늙은 장군인 이소응이 대결 중 몸을 피하자 젊은 문신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본 문신들을 매우 격노하였고, 무신 정중부, 이의방 등이 앞장 서서 정변을 일으킵니다.

 

● 이 무신정변에서 한뢰가 죽임을 당하고, 수많은 문신들이 살해를 당하고 맙니다.

 

● 무신들은 의종을 내쫒고 명종을 세웠으며, 정중부는 문신만이 오를 수 있었던 최고 지위인 문하시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명종은 무신들의 눈치만 보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하였고 무신 집권자들간의 권력 다툼으로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 순으로 권력의 이동도 계속 되었습니다.

 

● 천민 출신 이의민이 최고 권력자가 되는 것을 지켜본 백성들은 더이상 불만을 억누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무신 집권자들의 친인척 횡포와 가혹한 수탈에 못견딘 백성들은 전국 여기저기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 조위총의 난, 만적의 난, 망이 망소이의 난, 전주 관노의 난, 김사미 효심의 난 등 전국 곳곳에서 난이 일어났으나 결국 모두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최씨 정권>

 

● 이의민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말뿐인 개혁안, 봉사10조를 올리면서

뒤로는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주무르려 하였고, 자신의 호위 부대인 도방도 만들어 반란의 싹을 자르려 했습니다.

 

● 최충헌이 죽은 뒤 아들 최우, 손자, 증손자까지 권력을 대물림하여 4대간 독재를 할만큼 그 권력이 어마어마했던 것 같습니다.

 

●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무신들에게 약했던 문학, 행정 관련된 일을 도맡아 해줄 문인 집단인 서방을 설치하고, 최씨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색출하는 야별초를 만드는 등 권력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나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60여년간 독재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고려VS몽고의 30년 전쟁>

 

● 최씨 정권의 안정기에 몽고의 칭기즈칸은 러시아, 페르시아까지 아우르는 무자비한 정복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 힘을 합쳐 거란과 싸웠던 고려와 몽고는 이후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몽고는 턱없이 많은 물품을 조공으로 요구하고 사신의 행동도 무례하였다고 합니다.

저고여라는 몽고 사신이 본국으로 가던 중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몽고는 고려의 짓이라고 믿으며 외교 단절을 단행합니다.

 

● 1231년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이 고려로 쳐들어왔고, 각 지역으로 퍼져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점령한 성들에 몽고 관리인 다루가치를 두었습니다.

 

 

● 1232년 최우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다루가치를 죽이며 몽고에 저항하기로 결심합니다.

강화도는 몽고의 침입에 비교적 안전한 지리적 요건을 가지고 있었기에 강화도는 새로운 도읍으로서 활발하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몽고의 침입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은 거의 유일한 지역이 바로 이 임시 도읍지인 강화도였습니다.

 

● 몽고는 고려가 도읍을 몰래 옮기고 다루가치까지 죽인 사실을 알고 6차에 걸쳐 30여년간 고려를 침략하였고 고려 땅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 무신정권은 강화도 지키기에만 급급하였고, 몽고군의 칼받이로 백성들을 앞세웠습니다.

 

● 몽고군에 순순히 항복하지 않았던 문대. 살리타를 죽인 승려 김윤후, 목숨바쳐 성을 지켜낸 충주성 노비들, 그리고 귀주성 백성과 박서.

이들은 무신정권의 무능한 몽고와의 항쟁에서 빛나는 고려인의 정신을 보여준 이들이었습니다.

 

● 몽고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자 많은 관리와 백성들이 십수년간 정성을 바쳐 팔만대장경을 완성시켰습니다.

 

 

 

 

 

<무신정권 종말과 삼별초 항쟁>

 

● 백성들이 죽어가고 강화도마저 관리들이 굶어 죽을 정도로 나라가 피폐해져 가는데도 집권자인 최의는 본인의 권력 유지를 위해

전쟁을 계속 하자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 이에 다른 무신들이 삼별초를 시켜 최의를 제거함으로써 최씨 정권의 60년 독재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 고려태자가 몽고 칸에게 인사를 드리는 조건으로 고려와 몽고는 전쟁을 중지하고 강화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때 쿠빌라이가 칸이 되어 나라 이름을 '원'이라고 칭하였습니다.

 

●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몽고 제국은 작은 나라 고려를 끝끝내 차지하지 못하였고, 고려도 몽고 제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립국으로 보장받았습니다.

 

● 최의가 제거된 이후에도 권력이 이동하며 무신정권이 지속되었지만, 왕인 원종은 이전의 왕처럼 눌려지내지 않았습니다.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고 있던 원종이었으므로 몇차례 위기를 겪었으나 결국 다시 왕의 자리로 돌아와 무신정권에 마침표를 찍고 다시 도읍을 개경으로 옮기게 됩니다.

 

● 최우가 창설한 야별초에서 시작된 부대인 삼별초는 원나라 군대가 지키고 있는 개경으로 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무신 정권을 지지하는 부대였기 때문에

원종과의 사이도 좋지 않은 터였습니다.

 

● 원종이 삼별초 해산을 명하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삼별초는 원나라와의 항쟁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됩니다.

 

●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옮기며 항쟁을 계속하던 삼별초는 고려 원 연합군에 의해 1273년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고려와 원>

 

● 쿠빌라이의 막내딸과 원종의 아들인 충렬왕이 혼인을 하면서, 이때부터 으레 고려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 사위인 고려 왕을 통해 고려 정치에 간섭하려는 속셈으로 고려와 원과의 혼인을 주도하고,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고려를 관리하려 들었습니다.

 

● 충렬왕이 즉위한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제후국이므로 , 폐하 대신 전하, 짐 대신 고, 태자 대신 세자를 쓰도록 압박하였습니다.

 

● 충렬왕부터 공민왕 이전까지 왕 이름에 '충'자가 들어가는 것은 원나라 황제에게 충성하였다는 의미였습니다.

 

(● 몽고 제국의 영토가 아시아, 유럽을 아우르고 있어 사람들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습니다. 베네치아 상인인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서 머물다

돌아가 지은 책이 바로 동방견문록입니다. )

 

●  충렬왕은 몽고식 변발을 하고 신하들에게도 변발과 몽고옷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 원과의 활발한 교류로 몽고의 용어와 물건들이 들어오고, 원으로 유학을 가는 젊은이도 많아졌으며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하는 상인들도 활동도 활발했다고 합니다.

 

 

 

 

 

 

제 포스팅이 도움이 좀 되셨나요??

 

다음시간에는 고려 말의 역사와 새 나라 조선이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할게요 ^^

 

 

 

즐겁고 씐나게~ 공부하시고,

다음 시간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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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의 외할아버지였던 이자겸은 자기의 두 딸을 다시 인종에게 시집을 보내어,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 되었습니다.

혼인을 통해 왕실과 겹겹이 밀접한 관계를 맺어 권세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 실제로 이자겸의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몰랐으며 막대한 부까지 누렸습니다.

 

● 이자겸에게 위협을 느낀 인종이 외척 세력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이자겸이 도리어 난을 일으켜  궁궐로 쳐들어오게 됩니다.

 

이자겸의 난을 도와준 장수 척준경과 이자겸 사이가 틀어지자, 이를 기회로 이자겸을 몰아내 유배시키고 후에는 척준경도 정지상에 의해 탄핵당하고 맙니다.

이로써 외척가문 경원 이씨 세력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대한 태도와, 쇠락한 개경의 운을 버리고 도읍을 옮기자는 의견에 대한

생각이 달라 두 파로 나뉘었습니다.

 

서경파 (정지상, 묘청 등)

  신진 관리

 금나라에 사대 반대, 금나라 정벌 주장

독자적 연호 사용을 주장

 개경의 기운이 다하였으니 서경으로 도읍을 이전할 것을 주장

개경파 (김부식 등)

  개경 문벌 귀족

 나라의 안위를 위해 사대 필요. 금나라 연호를 사용할 것을주장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이 고생하니, 서경으로 도읍 이전을 반대

 

 

● 인종은 처음에는 서경에서 새로이 시작해보고자 새 궁궐인 대화궁 공사도 시작했으나 여러번 궁궐이 벼락을 맞아 불타는 일을 겪고서는

서경 천도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 서경 천도가 무산이 되자 묘청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서경으로 가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인종에게 서경으로 와 황제에 오르기를 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한 토벌군이 정지상 등 묘청과 가까운 인물을 다 죽여버리고

서경을 포위, 반란군을 진압하게 됩니다.

 

● 이로써 김부식은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 묘청의 난이 실패한 이후 북방 영토에 대한 고려의 관심도 점차 수그러들었고,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란 생각도 점차 약화되어 갔습니다.

한편 신라의도읍이었던 경주 출신 김부식은 고려가 고구려 보다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계승한 나라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 생각을 반영해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 고려가 건국되기 전 300년 가까이 중국을 다스리던 당나라가 멸망하고, 거란이 이후 요나라를 건설합니다.

 

● 이에 맞서 한족이 세운 송나라도 세력을 넓히면서 요와 송이 건국초부터 대립 양상을 띄다가, 요나라가 망한 뒤에는

여진족의 금나라가 다시 송나라와 대치되는 형국을 이루었습니다.

 

●  중국대륙은 어느 대국에 의해 통일되지 못하고 크고 작은 여러 나라가 서로 대립하며 전쟁을 하는 때였기 때문에

고려는 오히려 중국의 영향을 덜 받고 비교적 자유로운 국제 무대 환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동아시아에서의 위상이 높아진 고려는 스스로를 황제의 나라라고 칭하는 등 그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국가적 행사였던 팔관회에서도 다른 나라의 관리, 상인들이 고려의 왕에게 인사를 올린 후 선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 고려는 벽란도를 중심으로 해서 바닷길을 통한 무역이 특히 활발했습니다.

 

● 송나라가 주요 무역상대국이었고, 그 뒤를 이어 여진족, 일본, 대식국(아라비아) 상인들과도 교류를 늘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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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건국초부터 친척의 나라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원수의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태조 왕건은 거란이 선물로 보낸 낙타를 만부교에서 굶어죽게 하고 사신을 유배 보내는 등

적대적이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 하지만 이때에는 거란이 여진족 토벌, 발해 부흥 운동 진압등 할일이 많아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다가

이후 요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나서는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한족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우면서 송과 고려가 우호적으로 지내자 위기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 거란이 소손녕을 보내 고려를 침략하고 항복을 요구해올 때 , 고려는 서희가 강화 회담에 나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 고려가 요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여진족 때문이니, 함께 여진족을 몰아내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하면

송과 관계를 끊고 요와 교류하겠다고 제안하자, 소손녕도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이로써 고려가 강동6주를 차지하게 됩니다.

 

● 한동안 평화로웠던 고려에 또 한번 혼란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어린 왕을 쫒아내고 새 왕을 세우려던 강조의 정변을 핑계삼아 문책한다는 명분으로 거란이 또다시 침입합니다. (ㄱㅓ란의 2차 침입)

하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 실제로는 군사적 요충지인 강동 6주를 빼앗기 위한 기회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 강동6주의 하나인 홍화진성의 양규장군 부대의 눈부신 활약에도 거란은 개경까지 내려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습니다.

 

● 고려는 현종이 직접 요에 조공한다는 조건을 걸어 전쟁을 종결시켰지만 , 전쟁 후 조공을 거절하여

요나라가 다시 침입해 옵니다. (거란의 3차 침입)

 

●  이 때 강감찬 장군이 고려의 지휘관이었는데 삼교천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거란군의 사기를 꺾어놓았습니다.

 그 뒤에도 거란군은 가는 곳마다 고려군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군사를 돌리게 됩니다.

 

퇴각하던 거란군은 귀주에서 다시 한번 강감찬 부대와 부딪혔고 이때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겨우 수천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  이 후 요나라는 더이상의 고려 침입을 포기하고 고려와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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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요, 금나라와는 공식적인 거래인 조공과 하사품의 형식의 공무역을 주로 하였고,

송나라와는 정식 국교가 없을 때에도 끊임없이 상인들이 개별적으로 오고가며 거래하는 사무역이 이어졌습니다.

 

● 송나라는 중국 영대 왕조중 가장 융성한 문화와 문물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고려는 사신, 상인의 왕래를 통해 송의 앞선 문물을 들여오는데 괌심이 많았습니다.

 

●  종묘사직을 비롯하여 제사에 유교 사상을 따르는 제도를 받아들인 것도 바로 송을 통해서 였습니다.

 

여진족은 삼국시대에 말갈족이라고 불리웠던 부족으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었으나, 후에는 발해에 포함되었다가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여진족은 조선 시대에 가서는 야인 , 그리고 만주족이라고 불렸습니다.

 

●  고려와 여진족이 함경도에서 무력 충돌이 났을 때 고려가 크게 패하고 말았는데, 고려는 패전 이유가 기병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기병 중심의 별무반을 새로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몇 년 뒤 윤관의 지휘하에 별무반 군사가 여진족 정벌에 나서 여진족을 몰아낸 자리에 동북 9성을 쌓았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족은 집요하게 공격을 계속하면서 9성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조공을 약속 받고 고려는 9성에서 군대를 철수하게 됩니다.

 

● 1113년 여진족은 막강한 세력으로 커져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와 송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킨 후 100여년간 영화를 누리다가 몽골족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고려는 정리를 해도 이야기할 게 많이 나오네요 ^^

 

다음 포스팅에서도 고려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꿉꿉한 장마철에 몸과 마음.. 지배당하지 마시구요.

 

이런 날일 수록 더 파이팅하는 거 , 아시죠?^^

 

 

그럼 다음 시간에 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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