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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 ●

 

▶임진왜란으로 불안해진 조선, 선조는 후궁의 아이로 태어난 광해군의 총명함을 믿고 세자로 책봉한다.

 

▶선조가 새로 맞은 중전이 영창대군을 낳아 광해군의 입지가 불안해졌으나, 아직 아기였던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올릴 수 없었기에

선조가 죽은 후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왕위에 등극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몸소 전쟁터에 참가해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겪었던 광해군은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토지 크기에 따라 쌀로 통일하여 세금을 내게 하는 대동법 시행

동의보감 완성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펴내어 백성 교화

성곽 수리, 궁궐 재건등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고 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중립 실리 외교를 펼쳐서 전쟁을 다시 겪지 않도록 노력했다.

 

▶성리학의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 세력이 광해군이 서자 출신이라는 것과 명나라 홀대를 이유로 들어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 때 도움을 준 세력의 부추김으로 영창 대군과 친형 임해군 살해를 묵인하였고, 인목 대비를 폐위시킨 잘못이 있었다.

전후 재건을 위한 궁궐공사로 백성의 원망도 높아져 갔다.

 

▶결국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조카인 인조에게 왕위를 내어주게 된다.

 

 

● 효종과 호란 ●

 

▶인조가 즉위한 이후 조선은 친명배금 정책을 썼기 때문에 후금의 미움을 받았다. 이에 1627년 1월 후금이 기습 공격해왔는데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양국간 형제의 나라가 되기로 협상하였지만, 1636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군신관계와 공물을 요구하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인조가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두 왕자는 이후 행보가 달랐다. 소현 세자는 청 대신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서양문물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봉림 대군은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기며 청에 복수하고자 했다.

 

▶ 나중에 두 왕자가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인조는 소현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봉림 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봉림 대군이 후에 효종이 된다.

 

▶ 효종은 척화파를 등용하고 군비 강화에 힘쓰는 등 북벌을 추진했다. 하지만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는 청나라의 요구로 인해 나선정벌에 나서게 된다.

 

▶ 한양의 정예부대인 훈련도감을 자꾸 늘리자 그에 따라 군비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게 되었다. 지방은 빌어먹는 백성들이 늘고 도적떼가 들끓었다.

 

●현종과 당쟁●

 

▶ 임진왜란 전 4번의 사화 끝에 훈구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사림파는 김효원과 신의겸 사이에 이조전랑이라는 벼슬자리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자

정치에 대한 입장 차이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동인은 또다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졌다.

 

▶ 효종이 죽자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을것인가에 대해 대립이 생겼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은 당시 권력을 쥐고 있는 서인들의 말에 따랐으나 뒤에 효종비가 죽었을 때에는 남인의 말을 따라 이후 서인이 쫒겨나고

남인이 권력을 잡게 된다.

 

▶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양쪽 붕당이 번갈아가며 조정 일을 맡아보는 '환국' 정치 방식을 이용했는데, 이  때문에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한층 심각해졌다.

 

▶ 서인 집안이었던 인현왕후와 남인 집안이었던 장희빈의 싸움도 이런 붕당정치의 상황과 맞물려있었다.

 

▶ 공납 제도 때문에 중간에서 이득을 꾀하는 무리들의 방납 관행이 퍼지면서 공물을 쌀이나 베로 통일시킨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들의 부담이 커지고 일반 백성들의 고통은 줄었으며, 나라에 물품을 대주는 공인이라는 직업이 생겨 수공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 서인도 남인과 겨루는 과정에서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뉘게 되었다.

숙종의 후사를 두고 장희빈의 아들을 지지한 소론과, 무수리 사이에서 태어난 연잉군을 지지한 노론이 대립하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 후 4년만에

죽고 연잉군(영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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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과 명나라 정복의 야심도 키워갔다.

 

◆ 일본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통신사가 파견되었는데, 그들 중 황윤길은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고 선조에게 보고했고 김성일은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 당시 조선은 동인이 주도하는 정국이었으므로 같은 동인이었던 김성일의 보고를 받아들여 왜침에 대비하지 않았다.

 

◆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어달라는 터무니 없는 억지를 부리며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왔다.

 

수령과 군관들은 모두 도주하고 농민들이 장수 이일의 지휘 아래 일본군에 맞섰으나 역부족이었고 조선 제일의 명장 신립 장군도 탄금대 전투에서 지고 말았다.

 

사실상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 뻥 뚫린 셈이었다.

 

 

◆ 동래 부사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는 명언을 남기고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이 불타 조선왕조 200년의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다.

 

◆ 피난하지 않고 평양을 지키겠다고 약속한 선조는 약속을 어기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으며 그 바람에 일본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여

 

6월 15일에 평양을 점령했다.

 

 

 

 

 

 

◆ 조정과 관군이 도망가버리자 평민 , 노비 할 것 없이 의병이 되어 일본군에 맞서 일어났다.

 

◆ 의병은 의령에서 유생 곽재우를 시작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곽재우는 매복, 기습 등 유격전술로 일본군에 맞서 싸워 활약이 뛰어났다.

 

전라도의 의병이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켜준 덕분에 조선군의 식량을 마련하고 일본군에 반격할 수 있는 중요한 바탕이 다져졌다.

 

◆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 이순신의 활약에 막혀 일본군의 수륙 병진 작전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익진 전술로 일본 수군을 섬멸시킨 한산도 대첩은

 

세계 해전 역사에서도 유례 없는 빛나는 승리로 평가받고 있다.

 

◆ 일본은 조총이 있었지만 조선은 천미터 사정거리를 지닌 대형 화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신무기인 비격진천뢰가 개발되어 크게 힘을 발휘하였다.

 

 

◆ 조선의 요청으로 명군까지 동원된 싸움은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였다. 행주산성에서는 권율 장군의 지휘 아래 아녀자를 비롯한 모든 백성이 총동원되어 싸워 일본군의 사기를 한껏 꺾어놓았다.

 

◆ 명나라는 조선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의견은 무시한 채 일본과 강화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만 끌었고

 

그 사이 명과 일본군은 조선에 장기간 주둔하면서 백성을 약탈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 강화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자 일본은 1597년 다시 조선을 침략하는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거짓 정보를 믿지 않았던 이순신을

 

도리어 선조는 수군통제사에서 해직시키고 원균을 그자리에 앉혔다. 부산으로 침략한 일본군은 원균이 이끄는 조선군을 가뿐히 제압하고 전라도를 점령하였다.

 

◆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조선은 다시 이순신을 등용했다. 이순신은 전함 12척으로 명량(울돌목) 에서 일본함 130척의 진격을 좌절시켰다.

 

◆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의 새 지도부는 일본군의 철수 명령을 내렸다. 후퇴하는 일본군을 곱게 놓아줄리 없던 이순신은

 

일본군의 후퇴 길목을 막는 노량 해전을 치르게 되었고, 그 가운데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로써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이 났다.

 

◆ 조선에 군대를 보냈던 명나라는 오랜 전쟁으로 농민반란과 극심한 당쟁으로 몸살을 앓았고,

 

그 사이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워 명을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 조선에서는 전쟁의 혼란을 틈 타 많은 노비가 도망가고 노비 문서가 없어지면서 신분제가 흔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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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정리_사림의 시대, 조선

 

 

조선건국을 둘러싸고 신진사대부들은 개혁의 방향을 두고 서로 맞서기 시작했다.

 

정도전, 권근 등은 조선을 세우는데 적극 참여한 반면 정몽주, 길재 등은 조선 건국에 반대하였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잡아 조선을 건국했다. 정몽주는 죽임을 당하였고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성리학을 공부하며 제자를 길렀는데, 이들이 사림의 뿌리이다.

 

 

유교는 공자가 세운 사상이고, 성리학은 송나라 주희가 유학을 연구하여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시킨 주자학을 말한다.

 

 

단종의 자리를 빼앗아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반발한 사림은 세조를 왕으로 세운 훈구파 (한명회, 유자광 등) 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훈구파는 각종 정변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높은 벼슬을 하던 무리를 일컫는 말로 불법으로 토지를 빼앗는 등 백성을 괴롭히는 자가 많았다.

 

 

어진 임금이었던 성종 때에 이르러 김종직 같은 사림을 인재로 등용했는데, 이들이 형성한 집단을 사림파라고 하였다.

 

 

삼사의 요직에 앉았던 사림파는 훈구파의 비리를 집중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사림파와 훈구파와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사림파는 몇 차례 큰 화를 당하는데 이를 사화라고 한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이 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의 조의제문이 사초(실록의 원고)에 실리자, 이를 빌미로 많은 사림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사약을 받아 죽은 일을 가지고 이에 가담한 신하들을 죽인 사건이었는데 훈구파, 사림파 둘 다 피해가 컸다. 이때 이미 죽은 한명회의 무덤을 파헤쳐서 처형시킬 정도로(부관참시) 연산군의 분노가 컸다.

 

 

위협을 느낀 훈구파는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키게 된다.

 

 

중종은 경연을 새로 열고 성균관을 부활시키는 등 새로 유학을 일으켜 제대로 된 정치를 하고싶었으나 반정 공신들의 힘에 눌려 실현하기 힘들자 조광조 같은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현량과, 향약 등 여러 개혁을 추진하였고 공로가 없이 반정공신 목록에 들어간 인물을 삭제하라는 상소를 올려 위훈삭제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불만을 품은 훈구파는 주초위왕 사건을 만들어 중종이 조광조를 내치도록 종용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 김구, 김식등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를 기묘사화라고 한다.

 

 

인종을 지지하던 사림이 화를 입은 을사사화 이후 권력을 잡은 윤원형이 비리를 저질러 나라가 어려워지자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는 등 백성들의 저항이 거세졌다.

 

 

이로써 훈구파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사림파가 다시 등장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였다.

 

 

 

선조 때에 이루러 사림이 조정의 중요한 자리를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고 생각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토론하는 붕당정치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이조 전랑직을 두고 이효원을 추천한 자들은 동인, 심의겸을 추천한 자들은 서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광조의 죽음으로 흐지부지된 향약(향촌의 안정을 꾀하는 규약)은 선조때에 이르러 이황, 이이의 활약으로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향약은 고을의 질서를 유지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기능뿐 아니라 지방관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기능도 하였다. 이로 인해 향약을 주도한 사림의 지위와 역할도 강력해졌다.

 

 

사림은 지방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도 설립해나갔다. 서원에서 학문을 연구할 뿐 아니라 선현들의 제사를 지내고, 서적을 만드는 일도 하였다.

 

 

선비들은 성리학 이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최고로 생각했다.

 

 

아무 무늬가 없는 순수한 백자에는 깨끗함을 추구하는 선비들의 이상이 담겨있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학파는 퇴계 이황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퇴계 학파와 율곡 이이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율곡학파가 있었다.

 

 

이황은 성리학의 핵심 내용을 열개의 그림으로 정리한 <성학십도>를 선조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마음 수양을 중시해서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내려가 제자 양성에 힘썼다.

 

 

율곡 이이는 아홉번이나 장원 급제를 할 정도로 똑똑했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선비의 포부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격몽요결> <성학집요> 등을 저술했다.

 

 

이밖에도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한 조식, 독학으로 공부한 화담 서경덕, 서경덕의 제자로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 이황과 8년동안 사단칠정 논쟁을 한 고봉 기대승 등 성리학을 발전시킨 학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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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_삼국시대, 삼국의 외교

 

 

<<삼국과 동아시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나라의 기틀을 갖춰갈 때 중국은 516국 시대로 혼란의 시대였다.

 

고구려는 이 나라중 전진과, 백제는 동진과 교류하면서 불교를 들여왔다.

 

 

 

백제가 받아들인 불교는 다시 왜로 전해졌다. 백제는 불교뿐 아니라 한문학, 도자기, 무기 제작 기술등도 왜에 알려주었

 

.

 

 

 

중국의 516국 시대가 끝나고 북쪽은 북위, 남쪽은 송나라가 세워졌는데

 

고구려는 북위와, 백제는 송나라와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신라가 뒤늦게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갈 때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고 수나라와 국경을 접한 고구려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가 돌궐과 동맹을 맺게 되고, 신라 백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와 동맹을 맺는다.

 

 

 

신라와 적대관계였던 백제가 고구려에 힘을 실어줌과 동시에 왜를 끌어들였다

 

 

 

 

돌궐+고구려+백제+<--------------------> 수나라+신라

 

 

 

 

중국과 책봉, 조공의 절차를 거쳐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구려가 직접 서역과 무역을 하려고 하자, 고구려와 서역간의 중개 무역으로 이익을 챙겼던 당나라와의 사이가 멀어지

 

게 되었다.

 

 

 

수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당태종은 고구려를 정복시키겠다는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고구려는 동맹국을 찾

 

아나서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고구려는 서역의 나라인 돌궐과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 하였다.

 

 

 

고구려는 서역뿐 아니라 유럽의 로마와도 문물 교류를 하였고, 이러한 다양한 문물은 백제나 신라에까지 전해졌다.

 

 

한강 유역을 먼저 차지했었던 백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항해 기술이 특히 뛰어났다. 그래서 배를 타고 해외로 나가 교류

 

를 했고, 특히 왜와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그래서 일본에는 지금도 백제와 관련된 마을 이름이나 유물이 많이 남아있

 

.

 

 

 

고구려 승려 혜자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백제의 오경박사 왕인도 왜의 사신으로 가서 태자와 신하들을 가르쳤다.

 

 

 

고구려 승려 담징은 왜의 호류사에 금당벽화를 남겼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말이 같고 풍습이 비슷했지만, 세력 다툼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고구려+ 신라 vs 백제 :

 

고구려 백제가 세력 다툼을 할 때 신라는 새로운 문물을 고구려를 통해 접했고, 고구려는 신라를 보살펴야 할 나라로 생각했다.

 

고구려 vs 신라 + 벡제 :

 

고구려가 신라를 신하국처럼 대하고 내정에 간섭하자, 신라는 차츰 백제와 교류를 시작했다. 고구려가 이에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백제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고구려 vs 신라 vs 백제 :

 

동맹을 맺은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아 한강 상류는 신라가, 한강 하류는 백제가 차지하게 되었다. 신라는 곧 동맹국이었던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일대의 땅까지 빼앗아버렸다.

 

고구려 + 백제 vs 신라 :

 

한강을 차지한 신라가 당나라와 마음껏 교류하고 세력을 확장하자, 고구려와 백제가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하기도 하였.

 

 

 

블로그 정비 과정중에 삭제된 한국사 포스팅을 다시 게재하는 바람에

 

연대순으로 정리되지 못하고 뒤죽박죽 되어버렸네요 ㅜㅜ

 

조선시대까지 정리된 포스팅이 이미 있기 때문에

 

다음 포스팅부터는 조선시대 이후부터 정리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공부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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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_ 철의 나라 가야연맹

 

 

가야 연맹의 탄생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세워질 무렵 남동부 지방에 가야 연맹이 생겨났다.

 

 

 

기원전 108, 한나라 공격으로 고조선이 망하고, 고조선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해 오면서 변한 지역으로 많이 몰려왔

 

.

 

 

 

고조선 사람들은 변한 지역 사람들에게 쇠 만드는 기술을 전해주어 변한 지역은 철 기술이 눈에 띄게 발달하게 되었다.

 

 

 

금관가야가 변한의 철 무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중국과 왜를 연결하는 해상무역을 이끌었다. 그러면서 연맹전체가 금

 

관가야의 원래 이름(구야국)을 따라 가야로 불리게 되었다.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낙동강을 가지고 있는 금관가야를 반드시 거쳐야 외국과의 교류가 가능했으므

 

, 금관가야의 지위가 점차 높아져갔고, 다른 가야 지역보다 먼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 연맹 중에는 강력한 왕권이 없었기 때문에 각 나라 왕이 자기 나라를 다스리는 연맹 형태의 국

 

가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금관 가야의 발전과 쇠퇴

 

 

 

 

금관가야는 무역 중개로, 철의 수출로 부귀를 누렸다.

 

 

 

300년대에 들어와 금관가야가 무역을 독차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8 나라가 금관가야에 반기를 들었다.

 

 

 

때마침 고구려 미천왕이 한반도에서 낙랑군과 대방군등 중국 세력을 몰아내자, 무역으로 이득을 얻었던 금관가야는 큰

 

타격을 입었다.

 

 

 

금관가야에 불만을 품었던 8 나라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금관가야를 공격하였으나, 금관가야가 신라에 도움을 청하

 

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사건으로 금관가야의 지위가 추락하였고, 신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 후 마한의 여러 나라를 통합한 백제가 들어서고, 중국과 왜의 무역을 연결하는 새로운 교역 중심지가 되었다. 가야의

 

여러 나라가 백제 편으로 넘어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교역하고는 했는데, 금관가야도 하는 수 없이 대세를 따를 수 밖에 없

 

었다. 이러한 이유로 백제와 친한 왜가 신라를 공격하도록 길을 터주었고, 신라는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러 와 신라 땅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달아나는 왜군을 따라 금관가야 지역까지 밀어

 

닥치다보니 금관가야의 땅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가야 연맹은 깨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서는 가야

 

 

 

고구려의 공격 때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인 고령일대에 자리 잡았던 대가야는 농사를 지으며 서서히 나라의 힘을

 

키워갔다.

 

 

 

철제 기술자들까지 대가야로 모여들자 비옥한 땅, 철기 기술까지 얻게 되어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주변나라를 끌어

 

들여 가야 연맹을 다시 만들었다.

 

 

 

500년 무렵 안정을 찾은 백제와 신라가 가야땅을 넘보기 시작하였다.

 

 

 

백제 무령왕이 가야를 공격하여 땅을 빼앗아가자 대가야의 이뇌왕은 신라의 법흥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백제를 견제하고

 

자 했다.

 

 

 

하지만 신라에는 다른 속셈이 있었으므로 529년 가야지역을 공격하였고 가야연맹은 신라, 백제의 공격을 받아 쇠퇴해

 

갔다.

 

 

 

532년 신라의 공격으로 금관가야가 멸망하였다.

 

 

 

554년 백제와 신라간의 싸움에서, 남은 가야 연맹은 백제의 편에서 싸움에 가세하였는데, 신라가 이김으로써 백제뿐

 

아니라 가야연맹도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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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_ 신라 총정리 (삼국통일 이전)

 

 

건국 설화 (삼국유사 ) : 서라벌 지역에 사는 대표 6명이 나정으로 가보니 말 한마리가 절을 하고 있었다.

 

말이 하늘로 올라간 후 그 자리를 보니 붉은 알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알에서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 아이가 바로 박혁거세이다.

 

 

 

신라는 사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로국의 대표가 박, , 김씨로부터 나왔는데,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신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사로국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면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갔다.

 

 

 

, , 김씨가 번갈아서 임금의 자리를 가지다가

 

사로국이 경상도 일대를 전부 복속시킬 즈음에는 김씨만이 계속 임금 자리를 이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왕권이 절대적이지 않아서 복속시킨 다른 나라는 여전히 예전의 우두머리를 따랐는데,

 

이에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금관과 거대한 무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400년경 왜가 사로국을 계속 침입해오기에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대신 왜군을 물리쳐

 

주었고

 

그 댓가로 사로국에 대한 간섭이 점점 심해지게 되었다

 

 

 

고구려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면서 남진정책을 내세우자 백제와 사로국(이후 신라)이 동맹을 맺는 나제동맹이 결성되

 

었다.

 

 

 

지증왕때 사로국에서 신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증왕은 이사부 장군을 시켜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도 정복하도록 하였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법흥왕때 율령반포, 관복 제도, 골품제 등을 만들면서 더욱 왕권을 강화시켰다.

 

 

 

이차돈의 순교로 법흥왕은 귀족들의 반대를 잠재우고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삼았다.

 

 

 

신라 진흥왕때 고구려는 귀족 세력간의 싸움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태였는데, 그 틈을 타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이로써 한강 상하류 지역을 백제와 나누어 가졌다

 

 

2년 뒤 진흥왕은 동맹국인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백제 성왕이 한강 수복을 위해 대가야, 왜를 끌어들여 함께 신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목숨

 

을 잃게 된다

 

 

 

본래 신라와 동맹이었던 대가야가 백제와 연합한 것에 분노하여 진흥왕은 이사부 장군에게 대가야를 치게 하고, 대가야

 

가 항복하자 가야 지역 다른 나라들도 줄줄이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 건국이래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강을 차지함으로써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게 되어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고, 새로운 문물을 활발하게 받아들였다.

 

 

 

 

15세 전후 남자청소년들이 모여 학문과 무예를 익히고 친목을 다지는 화랑도가 있었다.

 

 

 

진평왕은 슬하에 딸 둘만 있었으므로, 골품제에 따라서 장녀인 선덕 여왕이 그 다음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귀족들의 불만이 높았는데, 여왕의 권위를 세우고 불법(佛法)으로 나라를 다스림을 보여주

 

기 위해 진흥왕때 지어졌던 황룡사에 9층탑을 건설하게 하였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가까이 두면서 위태롭게 왕 자리를 지켰다.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이 함락되고, 이 싸움에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선덕여왕이 죽고 사촌 여동생인 진덕 여왕이 즉위했다.

 

 

 

진덕 여왕은 모든 정치를 김춘추에게 맡겼고, 김춘추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는 등 외교에 힘썼다.

 

 

 

 

 

 

-삼국통일 이후는 다음 포스팅에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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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_백제 총정리

 

 

 

 

백제의 건국

 

 

 

 

고구려의 왕 주몽이 부여에 두고 온 아들, 유리가 주몽을 찾아와 다음 왕위를 이을 태자가 되었다.

 

 

 

비류와 온조도 주몽의 아들들이나 유리의 등장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삼국사기에 나온 백제 건국설화)

 

온조가 세운 나라가 비류의 집단을 흡수하여 백제라는 나라를 지었다고 한다. (한강유역)

 

 

 

한강 주변의 수십개의 나라가 마한을 이루고 있었는데, 백제가 하나 둘씩 정복하여 한강 유역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백제 고이왕 때 관등을 만들고 복식 지정, 법 제정 등 나라의 기본 토대를 만들어갔다.

 

 

 한강을 통해 낙랑군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쇠무기와 쇠농기구를 받아들여 힘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백제의 번영

 

 

근초고왕때 중국과 직접 교류하면서 문화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근초고왕은 근처 나라를 차례로 복속시키고 중국 전연의 공격으로 힘이 쇠약해진 고구려와 전쟁하여 고구려 고국원왕

 

을 죽이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근초고왕은 왜, 중국 동진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국제 활동을 넓혔다. (동진 이후 송, 남제, 양으로 넘어갈때 까지 외교관

 

계 유지)

 

 

 

백제는 항해술이 뛰어났고, 해상 왕국으로 이름을 떨쳤다.

 

 

 

아직기는 왜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왕인은 왜에 유교 사상을 전해주었다. 대신 왜로부터 군사력을 빌려 주변 나

 

라를 견제하는데 이용했다.

 

 

 

 

 

백제의 위기

 

 

 

근초고왕이 죽고나서 왕실이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그 와중에 고구려는 광개토왕이 왕위에 올랐다.

 

 

 

광개토왕은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복수를 갚기 위해 백제를 공격해 한강 이북 땅을 빼앗아 갔다.

 

 

 

백제를 지원하러 온 왜군은 신라 약탈에만 열을 올렸고, 고구려가 왜군을 몰아내고 신라를 지켜주었다.( 이후 신라에 대

 

한 고구려의 간섭이 커짐)

 

 

 

고구려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이 즉위하고 남하정책을 실시했다.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나제 동맹이 맺어졌다. (신라+백제가 힘을 합침)

 

 

 

백제 개로왕 때 장수왕이 한성을 공격하고 개로왕을 잡아 죽였다. (고구려에 한강 이남까지 빼앗김)

 

 

 

 

 

 

 

백제의 부활 운동

 

 

 

고구려를 피해 지금의 충남 공주인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천도로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으나 동성왕이 즉위하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동성왕은 외교에 노력을 기울이고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었다.

 

 

 

무령왕이 백성을 위한 어진 정치를 하고 나라의 군사력도 점차 회복시켰다.

 

 

 

무령왕은 양나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성왕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중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성왕은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대가야까지 점령하고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백제에서 남부여로 이름도 바꾸었다.

 

 

성왕은 중앙과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하고 귀족의 힘을 약화시켰다.

 

 

 

고구려가 혼란한 틈을 타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백제는 한강 이남 지역을 도로 빼앗고, 신라는 한강 이북 지

 

역을 빼앗았다.

 

 

 

동맹국인 신라가 기습공격하여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차지한 한강 이남 지역을 다시 빼앗아갔다.

 

 

 

 

신라에 복수하기 위해 신라정벌에 나섰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은 죽임을 당하였다.

 

 

 

성왕 이후의 왕들도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아오려고 하였으나 끝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무왕은 미륵 사상으로 백제를 통합하고자 삼국시대 최대의 절인 미륵사를 지었다.

 

 

 

 

 

 

백제의 몰락

 

 

 

 

의자왕 때 신라를 공격하여 대하성의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이 죽었다.

 

 

 

김춘추가 고구려 연개소문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당나라에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였고, 자만에 빠져 있던 의자왕은 급하게 계백의 군대를 황산벌로 보냈으나 계백 군대가

 

전멸하였다.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백제는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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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

 

 

 

 

주몽, 고구려를 세우다.

 

 

 

건국설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와 하늘의 신 해모수가 사랑에 빠졌다.

 

 

 

이를 알게 된 하백이 유화를 내쫒았는데, 부여의 금와왕이 이를 불쌍하게 여겨 유화를 거두었다.

 

 

 

알에서 태어난 고주몽이 활 실력도 뛰어나고 각종 무예에 뛰어나니 금와왕의 왕자들이 자신들의 자리에 위협을 느껴 주몽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남쪽땅으로 내려와 졸본에 자리를 잡고 고구려를 세웠다.

 

 

 

유리왕, 대무신왕.. 고국천왕 등 왕위를 이어오면서 왕권이 더욱더 강해졌고, 계루부 고씨가 계속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

 

였다.

 

 

 

220년 한나라가 망한 후 중국은 위,,오 세 나라로 갈라져 전쟁이 극심해졌다.

 

 

 

이 중 힘이 센 위나라가 고구려를 자주 침범했고, 동천왕, 미천왕때에 위와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고국원왕때는 전연이라는 나라가 침입하여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잡아가고, 미천왕의 무덤을 훼손하는 등 비통

 

한 일들을 겪었다.

 

 

 

고국원왕 자신도 백제(근초고왕때) 와의 싸움에서 백제 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소수림왕은 전연과 백제에 복수하는 것을 미루고, 나라에 제도를 정비하는 데 먼저 힘을 기울였다.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이라는 교육 기관을 세웠으며, 율령을 반포하였다.

 

 

 

 

 

 

고구려의 성장

 

 

 

 

391년 광개토대왕이 17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잃어버린 고구려의 땅을 되찾기 위해 백제와 전연(->후연)의 정복활동을 시작하였다.

 

 

 

백제의 관미성과 한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다.

 

 

 

고구려가 왜의 침입을 받고 있는 신라를 구원하러 간 사이, 후연이 침입하여 땅을 빼앗아 갔고, 이로써 본격적인 후연 정복 활동을 함으로써 동북아시아 최고 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즉위한 후, 중국과는 외교적으로 정면충돌을 피하고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고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반발하는 백제가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맞섰으나 장수왕은 백제 도읍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

 

왕을 죽였다.

 

 

 

신라도 공격하고 남한강 가에 중원 고구려비를 세웠다.

 

 

 

 

 

 

고구려의 문화

 

 

 

 

 

 

 

 

 

 

 

 

 

 

 

 

 

 

 

 

 

신랑이 신부집에서 머물며 일을 해주다가 아이를 낳고 , 그 아이가 다 자라면 신랑집으로 돌아가는 데릴사위제였다.

 

 

 

고구려의 거문고 연주자인 왕산악이 거문고를 연주하면,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출 정도였다고 한다.

 

 

 

씨름이나 수박회, 활쏘기 등으로 무예 실력을 겨루었다.

 

 

 

성쌓기를 잘해서 수많은 산성을 연결한 덕분에, 물샐틈 없는 방어막을 구축하였다.

 

 

 

 

 

흔들리는 고구려

 

 

 

 

장수왕이 죽은 후 왕권이 점차 약해지다가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심해져 나라가 혼란에 휩싸였다.

 

 

 

백제와 신라가 손을 잡고 쳐들어와 한강 유역을 도로 빼앗아 갔다.

 

 

 

위쪽으로는 돌궐족이 자주 침범해와서 남북으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589,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 하였다.

 

 

 

수 문제 때 고구려를 쳐들어왔으나 장마로 인해 되돌아갔다.

 

 

 

수 양제 때 우중문을 선두로 다시 쳐들어왔으나 을지문덕 장군의 전략에 말려 살수에서 전멸하였다.(살수대첩)

 

 

 

수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처음에는 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모든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을 빌미로 당이 처들어왔

 

.

 

 

 

패전을 거듭하다 마지막 안시성을 남겨두고 지친 당나라 군대가 철수함으로써 다시 한번 고구려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중국과의 기나긴 전쟁으로 고구려 국력이 급격이 쇠퇴하였다.

 

 

 

 

 

 

 

 

 

 

 

 

 

 

 

 

 

 

 

 

 

고구려의 멸망

 

 

 

백성의 삶이 고달파졌고, 연개소문의 독재로 기득권층의 원성도 자자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무너뜨리고 고구려에 처들어왔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치열한 권력다툼과, 지배자층의 배신으로 인해 나당연합군에 멸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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