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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벨라입니다.

 

저번 시간에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던 통일신라와 발해에 관해 배워봤어요.

 

오늘은 혼란한 남북국 시대를 대통합한 고려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약 정리한 거 여러번 읽어보는 사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역사의 숲을 보는 눈이 생기리라 확신합니다 ^^

 

출처: google

 

신라의 쇠락

 

○ 장보고가 죽은 이후 표면적으로는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 처럼 보였던 신라였지만, 실제로는 골품제로 인한 사회 모순이 깊어져 가던 시기였습니다.

 

○ 6두품 출신의 최치원도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한 인재였지만 골품제로 인해 정치의 핵심 인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 명문장가 강수, 승려 원효, 원효의 아들 설총 등도 6두품이었는데, 후삼국 시대부터는 많은 6두품 출신들이 신라에 등을 돌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지방에서는 귀족들이 사치생활을 하고, 세금을 과하게 걷는 등 횡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도 높아져가고 있었습니다.

 

○ 한편 골품제로 조정의 관리가 될 수 없었던 지방의 유능하고 학식있는 사람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모아 스스로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 정부에서 과도한 세금을 요구하자 몇 년 째 흉년에 힘들었던 농민들이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들불처럼 봉기를 넓혀나갔습니다.

 

○ 반란이 퍼지면서 지방 세력가들은 지역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이 지방 세력가들은 몇 개의 마을을 아우르며 세력을 넓히고 군사 조직도 갖추면서 '호족'이라는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했습니다.

 

○ 기훤이나 양길과 같은 사람이 호족 중 하나였는데, 궁예가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대접을 제대로 못받자 양길의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후삼국 시대의 시작

 

○ 신라의 장교 출신인 견훤은 가는 곳 마다 환영을 받아 짧은 시간안에 엄청난 추종자를 모았습니다.

 

○ 견훤은 완산주에 후백제를 세우고 국가 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 백제를 세운 뒤 쉴 새 없이 전쟁을 벌여 옛 백제 영토 대부분을 되찾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 신라의 승려였던 궁예는 농민 봉기로 나라가 혼란해지자 절을 떠나 기훤의 부하로 들어갔으나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자

양길의 수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 후에 철원을 차지한 궁예가 근방 호족을 평정하고 송악으로 도읍을 옮겨 주변 김포와 강화도까지 손에 넣는 등 세력을 떨쳤습니다.

 

○ 901년에 왕이 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천명하였습니다. (후고구려)

 

○ 궁예는 스스로 미륵이라고 칭하면서 백성들이 자신을 신성하게 보기를 바랐습니다.

 

 

 

 

○ 견훤과 궁예가 활발하게 영토를 넓히는 동안 신라의 영토는 경주 일대로 비참하게 쪼글어들었습니다.

 

 

 

 

 

후삼국 통일과 고려 건국

 

 

왕건이 아버지와 함께 궁예 밑으로 들어가 부하가 되었는데,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많은 영토를 빼앗아 오는 등 활약이 대단해서 궁예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왕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성품이 온화하여 많은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 한편 궁예는 점차 성품이 포악해져갔고 많은 사람을 모함해서 죽이는 등 살벌한 정치를 했습니다.

 

○ 궁예의 포악한 정치에 시달렸던 여러 장수들이 왕건을 설득하여 왕이 되기를 간청했다고 합니다.

 

○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습니다. 궁예는 산골에 숨어 있다 농민의 보리 이삭을 먹다 들켜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출처: Wi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90901003584&subctg1=&subctg2=kimedia Commons

 

왕건의 모습

 

 

○ 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한반도는 견훤과 왕권이라는 양대 산맥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 남은 신라땅을 차지 하기 위해 견훤이 신라로 군대를 보냈는데, 신라가 고려로 구원군을 요청하자 고려가 신라의 구원군으로 출병하게 됩니다.

 

○ 이로써 후백제와 고려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부딪히게 됩니다.

 

○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죽이고 왕경을 차지 하는 등 한동안 후백제쪽으로 기세가 기울었으나 930년 전세가 뒤집히게 됩니다.

 

○ 고창에서 충돌한 두나라 중 결국 고려군이 크게 이겼고, 주변의 100여개가 넘는 고을의 호족들이 고려로 자진 항복해 왔습니다.

 

○ 신라 왕의 초대를 받고 신라 왕경에 머물다 간 왕건은 신라 사람들에게까지 민심을 얻게 됩니다.

 

○ 한편 견훤은 자식들에 의해 금산사에 갇히는 꼴을 겪게 되고, 이에 격분한 견훤은 고려의 왕건에게로 도망쳤습니다.

 

○ 신라 왕 김부는 스스로 왕건에게 나라를 바칩니다. 이로써 화려했던 통일신라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 견훤은 왕건에게 후백제를 공격해달라고 계속 요청하였고, 실제로 후백제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맙니다.

 

○ 후백제가 멸망 한 후 견훤은 바로 병이 들어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합니다. (화병이 아니었을까요?)

 

○ 신라왕 김부가 스스로 고려에 나라를 넘겨 줄 때 태자가 울면서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살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집니다. (마의태자)

 

 

 

○ 태조 왕건이 즉위한 후 지방마다 사절을 보내 호족에게 선물을 주는 등 지방 호족들을 다독이는 데 힘썼습니다.

 

○ 충성하는 호족에게 왕씨 성을 주고, 혼인으로 얽히고 설킨 가족형태를 취해 반란을 예방하고 , 사심관 제도와 기인제도 등으로 호족 통합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 태조 왕건은 고구려를 잇는 나라임을 분명히 하고, 같은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유민들을 모두 받아들입니다.

 

○ 그리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게 강한 적개심을 가지면서 화친을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 후계자를 위한 당부의 말을 쓴 <훈요10조>를 직접 지었습니다.

 

 

 

간촉사 미륵불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46616429@N00/159254020/sizes/o/in/set-72157594153961797/

저자 the Chosun Bimbo (http://www.flickr.com/photos/46616429@N00/)

 

 

 

 

고려시대 이야기,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사실 부끄럽지만 한국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는데, 포스팅을 하면서 저도 공부하게 되니

 

새로운 눈이 생기는 기분이 들어요.

 

몰라서 재미없는거지, 알면 재미있다 던 옛 스승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

 

 

오늘 하루도 열공 즐공하시구요.

 

다음 시간에도 함께 한국사 공부 해보자구요~

 

See you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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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 

 

●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는 멸망한 후에도 당의 지배를 반대하며 부흥운동을 계속했다.

 

● 당나라와 사이가 틀어진 신라도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도왔고, 고구려 왕족 안승과 귀족 검모잠등이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 당나라 영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말갈족 걸사비우가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며 당나라와의 전투를 이어나갔지만

그 무렵 둘 다 죽고나서 이들의 운명은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에게 달리게 되었다.

 

●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흑수말갈 제외)을 이끌고 동모산으로 가 새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진이라고 했다.

 

● 대조영은 돌궐, 신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말갈족을 흡수하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아 나갔다.

 

● 713년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 719년 대조영이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 무왕은 흑수말갈을 공격하여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흑수말갈과 당나라와의 외교를 차단시켰다.

 

● 당나라가 발해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차례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 3대 문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당나라와의 관계가 친선관계로 바뀌었다.

 

● 문왕은 당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빌해의 제도를 정비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 당나라의 정치 제도를 본떠 3성 6부제의 중앙 통치 기구를 만들되 운영방식은 발해만의 독자적인 방식을 썼다.

 

● 발해의 국력이 커져가자 당나라도 발해 군왕에서 발해 국왕으로 위치를 한 단계 격상시켜 주었다. 문왕은 커져가는 국력을 발판 삼아 주변 나라들과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 제 10대 선왕은 북쪽으로 흑수말갈을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지방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그리고 남쪽 신라를 공격하여 대동강까지 진출하였다.

 

● 선왕 때 발해가 차지한 땅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때보다 두배 가까이 넓었다.

 

● 넓은 영토와 융성한 문화를 누리는 발해를 보고 당나라는 '동쪽의 가장 융성한 나라' 라는 뜻으로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 3대 문왕이후로 당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다보니 무덤 형식, 제도, 놀이, 물건 등 당나라 문화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 중앙의 문화가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지방에는 고구려, 당나라 문화가 아닌 말갈 문화가 보편적이었다.

 

● 중앙 문화와 지방의 말갈 문화가 서로 섞이지 못한 것은 이후 발해 쇠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10세기에 접어들면서 당나라, 통일신라 , 발해 세 나라 모두 쇠퇴의 길로 접어든 한편 서쪽의 거란족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 거란족을 통합한 야율아보기는 나라를 세우고 , 국경을 넘어와 발해땅을 자주 공격하여 발해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 통일신라는 후고구려 후백제 등 나라가 셋으로 갈라져 서로 맞서 싸우는 터라 발해를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 거란에 무너진 발해는 이후에 오랫동안 부흥운동이 일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 934년 발해 왕자 대광현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 고려로의 망명이 계속 이어져 많은 발해 사람들이 고려로 망명해 살게 되었다.

 

● 같은 고구려 후손이라는 생각으로 고려 사람들은 발해사람들을 환영했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공공의 적으로 생각했다.

 

● 고려 왕건은 거란이 보낸 낙타를 만부교 밑에서 굶어죽게 하는 등 거란과의 화친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늘은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열었던 주역인 발해에 관해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는 한국사 정리 포스팅이 되었길 바라면서

 

마무리할게요 ^^

 

 

 

열공, 즐공하시고 다음 시간에도 더욱 유익한 공부 자료들로 만나도록 합시다.

 

See you s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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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하고 어진 애민 정치를 하였다.

 

★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도 만파식적( 온갖 풍파를 잠재우는 피리)을 나라의 보배로 삼고 평화로운 정치를 펼치고자 했다.

 

★ 신문왕의 장인 김흠돌이 난을 일으켰다. 신문왕은 김흠돌을 비롯하여 왕의 권위에 반발하는 세력을 단호하게 억누르면서 유교 사상으로 충성스러운 신하를 기르고자 국학을 설치하였다.

 

★ 신문왕 때 관리에게 관료전이라는 토지를 나누어 주었고 관직이 높은 귀족에게는 녹읍을 주었다.

관료전은 그 땅에서 나는 수확물의 일부를 가질 수 있었고, 녹읍은 수확물 뿐 아니라 그 땅에 사는 농민들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 나라의 행정구역은 9주 5소경, 군대는 9서당 10정으로 구성되었다.

 

★698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발해를 세우면서 신라가 발해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자, 원수 지간이었던 당나라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당나라, 발해, 일본과 활발한 국제교류를 하게 되었다.

 

★ 신라 승려 혜초는 서역땅(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파키스탄 등)까지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기기도 하였다.

 

 

 

★ 신라의 골품제가 통일신라에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원래 왕족인 성골은 진덕여왕을 끝으로 사라지고 무열왕부터 진골 출신이 왕위에 올랐다.

 

★ 골품에 따라 벼슬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 왕경에는 귀족들 대부분이 모여살았기 때문에 금으로 장식한 금입택 등 호화로운 집들이 많았다.

 

★ 왕경에는 사치를 부리는 귀족들과 너무나 가난하게 사는 평민들이 있어서 극심한 빈부격차가 존재했다.

 

 

 

 

★ 왕족과 귀족만이 누렸던 불교가 통일 이후 일반 백성에게까지 널리 퍼져나갔다.

 

★ 6두품 출신의 승려 원효는 진리는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아가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 진골출신의 의상은 당나라에서 화엄 사상(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부처 앞에서 평등하다) 을 공부하고 돌아와 여러 절을 지으며 제자 양성에 힘썼다.

 

★ 찬란한 불교유산 :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

 

 

 

★ 신문왕 이후 100여 년간 평화롭고 안정된 시절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742년 경덕왕이 왕위에 오른 후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경덕왕이 죽고 어린 아들 혜공왕이 즉위하자 왕권이 약해지고 반란도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 혜공왕과 왕비가 살해된 이후 왕위를 놓고 끊임없는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 김헌창의 난을 계기로 지방에서도 점차 본인의 세력을 키우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 지방 실력자 중 한명이 장보고 였는데, 당나라 해적을 단속하기 위해 설치된 청해진에 장보고가 투입되어 해적을 소탕하고 바다 무역을 주도하였다.

 

★ 장보고는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염장이라는 사람에 의해 살해당했다.

 

 

 

 

 

 

 

 

으음..

 

통일신라 시대에 대해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셨나요?

 

한국사를 공부하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정리포스팅이었길 바랍니다 ^^

 

다음시간에는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열었던 발해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죠.

 

그럼 다음시간에 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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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와 신라가 함께 손을 잡고 쇠약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나눠 가졌는데, 이 후 신라가 배신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땅을 모조리 빼앗아 가자, 백제는 신라를 원수의 나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 백제의 의자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차례로 신라땅을 차지해 나갔다.

 

○ 성공을 거듭한 의자왕은 점차 거만해져갔고 정치와 군사 훈련에 소홀해져갔는데, 신라는 이 틈을 타 역공할 방법을 모색했다.

 

○ 신라에 선덕여왕, 진덕여왕이 재위하는 동안에도 실제 권력자는 김춘추였다.

 

○ 김춘추는 고구려 연개소문을 찾아가 외교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에 당나라로 찾아가 당태종과 군사 동맹을 맺게 되었다.(나당동맹)

 

○ 한편 고구려는 끊임없는 당나라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군사 사기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

 

○ 신라의 진덕여왕이 죽고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이 되었다.

 

○ 무열왕(김춘추)은 백제 공격을 시작으로 삼국 통일 전쟁의 첫걸음을 내딛였다.

 

○ 김춘추의 사위이자 처형인 김유신이 삼국통일 전쟁을 지휘했다.

 

○ 당나라 소정방,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 이 때 백제 계백장군의 황산벌 전투가 벌어졌다. (계백 <-> 신라 관창)

 

○ 고구려 연개소문의 세 아들의 권력다툼으로 고구려도 나당연합군에 지고 말았다.

 

 

 

▽▼

 

○ 고구려, 백제를 정복한 후 당나라는 백제 땅을 지배하려는 야욕으로 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 젊은이들을 죽이는 등

극심한 횡포를 부렸다.

 

○ 백제의 장군이었던 흑치상지가 부흥군을 모집하고 부흥활동을 벌였으나 내부 분열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이후 당나라 장군이 되어 백제 부흥군 진압에 나서게 되었다.

 

○ 고구려에도 검모잠의 활약으로 부흥운동이 커져가고 있었으나, 고구려 귀족 안승의 손에 죽고 말았다.

 

○ 검모잠을 죽인 안승이 신라에 항복하고, 신라는 보덕국이라는 허울뿐인 나라를 세워 안승을 왕으로 세웠다.

 

○ 통일 전쟁 와중에 신라 태종 무열왕과 당 태종이 서거하였다. 당나라를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는 등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냈다.

 

○ 무열왕에 이어 왕이된 문무왕은 백제 땅에 남아 있는 당군을 모조리 몰아내고 당군과의 싸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당군과의 매소성, 기벌포 싸움에서 신라가 승리하여 비로소 삼국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 전쟁이 끝나고 문무왕은 평화 시대에 걸맞는 부드러운 정치, 애민 정치를 폈다.

 

 

 

 

 

 

 

도움이 좀 되었나요?

 

 

오늘은 통일신라가 되기까지 치열하게 벌어졌던 삼국 전쟁을 다루어보았습니다.

 

부끄럽지만 한국사 지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아는게 없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하나 둘 알게 되니

 

어릴때와는 달리 알게 되는 즐거움이 아주 쏠쏠하네요 ^^

 

이런 마음으로 공부했더라면 ...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가 이 공부블로그에 여러 학습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요약정리하면서 운영하고 있는데요.

 

대부분, 읽고 있는 책을 요약 정리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포스팅을 한답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었길 바라요 ♡

 

 

그럼 다음 시간에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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