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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시작

기원전 8000년경 대부분 사람들은 수렵 채집활동을 하고 여기저기로 이동하면서 생활을 해나갔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불리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기름진 땅에 도착한 사람들은 더이상 이동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기후가 따뜻하고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해서 정착생활을 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가 바로 세계에서 처음으로 농사를 시작한 곳이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농경지 근처로 모여 살게 되고 촌락을 이루게 되었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도 촌락이 생겼고 사람들은 강 상류 산기슭에 모여살았다.

강물을 끌어와 물길을 만들고 저수지를 만드는 등 자연환경을 이용할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강 상류 뿐 아니라 강 하류로도 생활터전을 넓혀나갔다.

메소포타미아 평야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길목에 있어 유목민들이 자주 드나들었는데 수메르인들도 그런 유목민중 하나였고 기원전 35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해 살았다.

잉여농산물이 생기자 모두 농부가 될 필요가 없었기에 상인, 수공업자등 다른 직업들도 생겨났다.

촌락들은 점점 커져 도시를 이루고 도시를 중심으로하는 도시국가가 생겨났다.

수메르인들이 바로 인류최초의 문명을 일으킨 것이다.


수메르 도시국가

수메르인의 도시국가에는 다른 부족의 침략이 잦았다.

홍수,가뭄도 자주 겪어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 '지구라트' 라는 신전을 지었다.

수메르 도시 국가는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사제의 권력이 점차 커졌고, 사제가 여러가지를 기록하기 위해 '문자'의 필요성이 생겼다.

문자는 점토판에 갈대끝으로 찍어 새겼는데, 이를 쐐기문자라고 한다. 

이 쐐기문자가 인류 최초의 문자이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것은 '서기'만 할 수 있었고, 교사, 의사같은 다양한 직업들이 이때 생겨났다. 

매매 거래는 점토판으로 계약서를 만들고 도장을 사용했다.


왕권 강화

수메르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전쟁을 벌이고 다른 부족이 침략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사제 중심에서 장군 중심으로 바뀌어갔다.

장군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자신의 지위를 대물림하는 일이 생기면서 왕조가 생겨났다.

왕은 사람들로부터 신처럼 떠받들려졌고 죽으면 왕을 모실 사람들을 같이 생매장하기도 했다.

수메르 도시국가 중 리가시의 왕 우르카기나는 다른 왕들과 달리 고통 받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여러가지 개혁을 한 왕이었다.

우르카기나 왕의 칙령을 적은 문서는 현존 법률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메르의 여러 도시 국가들은 서로 경쟁하며 발전해나갔다. 

메소포타미아 근처를 떠돌던 셈족이 쳐들어와 수메르 도시 국가들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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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

 

 

 

 

주몽, 고구려를 세우다.

 

 

 

건국설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와 하늘의 신 해모수가 사랑에 빠졌다.

 

 

 

이를 알게 된 하백이 유화를 내쫒았는데, 부여의 금와왕이 이를 불쌍하게 여겨 유화를 거두었다.

 

 

 

알에서 태어난 고주몽이 활 실력도 뛰어나고 각종 무예에 뛰어나니 금와왕의 왕자들이 자신들의 자리에 위협을 느껴 주몽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남쪽땅으로 내려와 졸본에 자리를 잡고 고구려를 세웠다.

 

 

 

유리왕, 대무신왕.. 고국천왕 등 왕위를 이어오면서 왕권이 더욱더 강해졌고, 계루부 고씨가 계속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

 

였다.

 

 

 

220년 한나라가 망한 후 중국은 위,,오 세 나라로 갈라져 전쟁이 극심해졌다.

 

 

 

이 중 힘이 센 위나라가 고구려를 자주 침범했고, 동천왕, 미천왕때에 위와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고국원왕때는 전연이라는 나라가 침입하여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잡아가고, 미천왕의 무덤을 훼손하는 등 비통

 

한 일들을 겪었다.

 

 

 

고국원왕 자신도 백제(근초고왕때) 와의 싸움에서 백제 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소수림왕은 전연과 백제에 복수하는 것을 미루고, 나라에 제도를 정비하는 데 먼저 힘을 기울였다.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이라는 교육 기관을 세웠으며, 율령을 반포하였다.

 

 

 

 

 

 

고구려의 성장

 

 

 

 

391년 광개토대왕이 17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잃어버린 고구려의 땅을 되찾기 위해 백제와 전연(->후연)의 정복활동을 시작하였다.

 

 

 

백제의 관미성과 한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다.

 

 

 

고구려가 왜의 침입을 받고 있는 신라를 구원하러 간 사이, 후연이 침입하여 땅을 빼앗아 갔고, 이로써 본격적인 후연 정복 활동을 함으로써 동북아시아 최고 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즉위한 후, 중국과는 외교적으로 정면충돌을 피하고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고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반발하는 백제가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맞섰으나 장수왕은 백제 도읍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

 

왕을 죽였다.

 

 

 

신라도 공격하고 남한강 가에 중원 고구려비를 세웠다.

 

 

 

 

 

 

고구려의 문화

 

 

 

 

 

 

 

 

 

 

 

 

 

 

 

 

 

 

 

 

 

신랑이 신부집에서 머물며 일을 해주다가 아이를 낳고 , 그 아이가 다 자라면 신랑집으로 돌아가는 데릴사위제였다.

 

 

 

고구려의 거문고 연주자인 왕산악이 거문고를 연주하면,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출 정도였다고 한다.

 

 

 

씨름이나 수박회, 활쏘기 등으로 무예 실력을 겨루었다.

 

 

 

성쌓기를 잘해서 수많은 산성을 연결한 덕분에, 물샐틈 없는 방어막을 구축하였다.

 

 

 

 

 

흔들리는 고구려

 

 

 

 

장수왕이 죽은 후 왕권이 점차 약해지다가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심해져 나라가 혼란에 휩싸였다.

 

 

 

백제와 신라가 손을 잡고 쳐들어와 한강 유역을 도로 빼앗아 갔다.

 

 

 

위쪽으로는 돌궐족이 자주 침범해와서 남북으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589,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 하였다.

 

 

 

수 문제 때 고구려를 쳐들어왔으나 장마로 인해 되돌아갔다.

 

 

 

수 양제 때 우중문을 선두로 다시 쳐들어왔으나 을지문덕 장군의 전략에 말려 살수에서 전멸하였다.(살수대첩)

 

 

 

수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처음에는 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모든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을 빌미로 당이 처들어왔

 

.

 

 

 

패전을 거듭하다 마지막 안시성을 남겨두고 지친 당나라 군대가 철수함으로써 다시 한번 고구려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중국과의 기나긴 전쟁으로 고구려 국력이 급격이 쇠퇴하였다.

 

 

 

 

 

 

 

 

 

 

 

 

 

 

 

 

 

 

 

 

 

고구려의 멸망

 

 

 

백성의 삶이 고달파졌고, 연개소문의 독재로 기득권층의 원성도 자자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무너뜨리고 고구려에 처들어왔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치열한 권력다툼과, 지배자층의 배신으로 인해 나당연합군에 멸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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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 

 

●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는 멸망한 후에도 당의 지배를 반대하며 부흥운동을 계속했다.

 

● 당나라와 사이가 틀어진 신라도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도왔고, 고구려 왕족 안승과 귀족 검모잠등이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 당나라 영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말갈족 걸사비우가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며 당나라와의 전투를 이어나갔지만

그 무렵 둘 다 죽고나서 이들의 운명은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에게 달리게 되었다.

 

●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흑수말갈 제외)을 이끌고 동모산으로 가 새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진이라고 했다.

 

● 대조영은 돌궐, 신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말갈족을 흡수하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아 나갔다.

 

● 713년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 719년 대조영이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 무왕은 흑수말갈을 공격하여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흑수말갈과 당나라와의 외교를 차단시켰다.

 

● 당나라가 발해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차례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 3대 문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당나라와의 관계가 친선관계로 바뀌었다.

 

● 문왕은 당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빌해의 제도를 정비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 당나라의 정치 제도를 본떠 3성 6부제의 중앙 통치 기구를 만들되 운영방식은 발해만의 독자적인 방식을 썼다.

 

● 발해의 국력이 커져가자 당나라도 발해 군왕에서 발해 국왕으로 위치를 한 단계 격상시켜 주었다. 문왕은 커져가는 국력을 발판 삼아 주변 나라들과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 제 10대 선왕은 북쪽으로 흑수말갈을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지방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그리고 남쪽 신라를 공격하여 대동강까지 진출하였다.

 

● 선왕 때 발해가 차지한 땅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때보다 두배 가까이 넓었다.

 

● 넓은 영토와 융성한 문화를 누리는 발해를 보고 당나라는 '동쪽의 가장 융성한 나라' 라는 뜻으로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 3대 문왕이후로 당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다보니 무덤 형식, 제도, 놀이, 물건 등 당나라 문화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 중앙의 문화가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지방에는 고구려, 당나라 문화가 아닌 말갈 문화가 보편적이었다.

 

● 중앙 문화와 지방의 말갈 문화가 서로 섞이지 못한 것은 이후 발해 쇠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10세기에 접어들면서 당나라, 통일신라 , 발해 세 나라 모두 쇠퇴의 길로 접어든 한편 서쪽의 거란족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 거란족을 통합한 야율아보기는 나라를 세우고 , 국경을 넘어와 발해땅을 자주 공격하여 발해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 통일신라는 후고구려 후백제 등 나라가 셋으로 갈라져 서로 맞서 싸우는 터라 발해를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 거란에 무너진 발해는 이후에 오랫동안 부흥운동이 일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 934년 발해 왕자 대광현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 고려로의 망명이 계속 이어져 많은 발해 사람들이 고려로 망명해 살게 되었다.

 

● 같은 고구려 후손이라는 생각으로 고려 사람들은 발해사람들을 환영했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공공의 적으로 생각했다.

 

● 고려 왕건은 거란이 보낸 낙타를 만부교 밑에서 굶어죽게 하는 등 거란과의 화친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늘은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열었던 주역인 발해에 관해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는 한국사 정리 포스팅이 되었길 바라면서

 

마무리할게요 ^^

 

 

 

열공, 즐공하시고 다음 시간에도 더욱 유익한 공부 자료들로 만나도록 합시다.

 

See you s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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