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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부흥운동

668년,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지만 고구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무너뜨린 장본인이지만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가 신라까지 탐내자 당나라에 등을 돌리고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지하였다.

당나라의 인질로 잡혀갔던 보장왕이 풀려나고 말갈족까지 끌어들여 고구려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보이자 

보장왕을 다시 당나라로 끌고 가버렸다.

고구려 부흥운동을 잠시 주춤해졌지만 당나라에 자리잡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에게서 부흥 운동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대조영과 새나라 진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아들 대조영이 거란족,말갈족과 함께 당나라에 저항하였다.

비록 거란족이 당나라에 항복하였지만

걸걸중상과 말갈족의 걸사비우는 항복하지 않고 계속 세력을 키워나갔다.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걸사비우는 죽고 대조영은 지도자를 잃은 말갈족까지 다 이끌고 당나라와 싸웠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당나라의 힘이 미치지 않는 동모산 위에 새 나라 '진'을 세웠다.


발해의 탄생

 

대조영은 당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 돌궐과 신라에게 사신을 보내 새 나라 건립을 알리며 외교관계를 맺었다.

'진' 나라가 점점 세력을 넓히자 당나라도 더이상 '진'나라를 우습게 볼 수 없었고 사신을 보내 

발해 군왕이라는 벼슬을 내려 어엿한 나라로 인정하였다.

이때부터 나라 이름이 '진'에서 '발해'로 변경되었다.

발해로 흡수되지 않았던 흑수말갈족이 당나라의 편에 들어갔고, 발해는 흑수말갈족에게 선제 공격을 하면서 당나라와 다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당나라는 계속해서 발해를 공격을 해왔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당나라와 사이좋게

 

대조영의 아들 무왕 때까지만 해도 당나라와 사이가 안좋았으나 3대왕 문왕이 즉위하고는 당나라와 친선관계를 맺었다.

문왕은 당나라의 앞선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당나라의 정치 제도를 가져와 3성 6부 중앙 통치 기구를 만들었다.

3성은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

6부는 충,인,의,지,예,신으로 유교 덕목을 따서 이름지었다.

발해의 국력이 올라가자 당나라는 문왕에게 발해 군왕에서 발해 국왕으로 더 높은 벼슬을 주었다.


해동성국

 

10대 선왕 때에는 흑수 말갈 정벌, 신라의 영토도 일부 차지하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때보다 두 배 가까이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넓은 영토와 융성한 문화를 가진 발해를 당나라는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한반도 북쪽은 발해가, 아래쪽은 신라가 나라를 이루어 이 때 역사를 남북국시대라고 한다.

문화의 면에서는 발해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 문화가, 문왕때부터는 당나라 문화가 널리 퍼졌고

지방에는 말갈족의 문화가 널리 퍼져있었다.

발해의 영토가 너무 넓어서 중앙의 힘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다보니 각 지방마다 고유한 문화가 남아있었고 중앙문화와 섞이지 못해 이후 발해의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발해의 멸망

 

907년에 당나라 멸망, 통일 신라도 세개의 나라로 분열되면서 동아시아의 격변의 시대가 열렸는데 

해동성국 발해도 이들과 함께 쇠퇴하기 시작했다. 

반면 유목생활을 하던 거란족이 무섭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거란족장 야율아보기가 발해에 쳐들어와 한달만에 발해를 멸망시켰다.

발해도 예전 고구려 유민들이 그랬던것처럼 발해 부흥운동을 여기저기서 벌였지만 중심세력이 없어서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거란의 횡포를 피해 많은 발해 주민들이 고려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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