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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 1388년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 요동으로 떠난 고려 군대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다.

○○ 이 회군을 지휘한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명령한 우왕과 최영의 명령을 어기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 이성계는 고려 말 부패한 권문세족을 비판하는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았고 반원친명정책을 폈다.


신진 사대부의 갈등

○ 신진사대부가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게 되었다.

○ 급진파 정도전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우왕은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므로 우왕의 아들, 창왕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였고 이성계의 친척인 공양왕을 세웠다.

○ 급진파는 모든 귀족과 관리가 가진 토지를 거두어들여 다시 나누는 새로운 토지 제도인 과전법을 제정하였다.


역성 혁명

○ 급진파 정도전은 왕조 자체를 바꾸는 역성 혁명을 추진했다.

○ 정몽주, 이색 등 온건파는 고려 왕조를 유지하고자 했다. 

○ 이성계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고자 했지만 실패했고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다.

○ 이성계 지지자들에 의해 이성계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된다.

○ 조선의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정도전을 새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새 나라 조선

○ 건국이념으로 유교를 선택했다.

○ 모든 고을에 국립학교 향교를 세우고, 서울에는 성균관을 세워 유교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 고려의 부패 원인을 불교라고 생각해서 팔관회, 연등회 등 불교 관련 의례를 폐지했다.

○ 도첩제를 실시하여 허가를 받아야만 승려가 될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 강하고 큰 나라는 섬기고, 일본 같은 이웃 나라와는 우호적으로 교류하겠다는 사대교린 정책을 썼다.

○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개경)을 떠나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했다.

○ 정도전은 재상중심의 정치를 원했고 태조 아들 이방원은 정도전의 생각에 가장 강력히 반발했다.

○ 태조가 둘째 부인에게서 얻은 막내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첫째 부인의 자식들은 불만이 클 수 밖에 없었고 , 개국 공신임에도 인정받지 못했던 이방원의 불만이 가장 컸다.

○ 정도전이 왕자들이 거느린 사병을 제거하려고 하자 이방원이 먼저 정도전을 제거해버린다

○ 이성계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그가 정종이 된다.

○ 정종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다시 왕자들의 싸움이 일어났고 결국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다.


태종 이방원

○ 태종 이방원은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 직접 왕에게 보고하는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 외척이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자 처남 넷을 모두 죽였다.

○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은 모두 무자비하게 죽였다

○ 전국을 8도로 나누고 여러 군현으로 나눈 후 도에 관찰사를 파견하고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여 모든 지방을 통치하고자 했다.

○ 호적제도를 정비하고 호패제를 실시했다.

○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에 의해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다시 양인으로 되돌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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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성혁명의 시작 , 위화도 회군

 

- 1388년,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 요동정벌을 하고자 고려군대는 요동으로 떠나게 됩니다.

 

- 하지만 우왕과 최영장군(우왕의 장인) 의 명령을 어기고 이성계는 부하들을 데리고 군대를 돌리는 일명 '위화도 회군' 이라 불리는 반란을 일으킵니다.

 

- 큰 명나라를 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이성계는 4불가론을 들어 요동정벌을 반대했으나 우왕과 최영장군이 그의 주장을 받아주지 않았고,

위화도에서 마침 큰 비가 내려 압록강을 건너기 어렵게 되자 군대를 돌린것이지요.

 

- 당시 이성계는 부패한 권문세족을 비판하는 신진 사대부와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정도전, 조준, 정몽주 같은 사람들이죠.

 

- 이들 신진사대부와 이성계는 권문세족을 몰아내는데 집중하였습니다. 권문세족들은 친원정책을 지지하고 이성계 라인은 친명정책을

지지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서로 생각이 달랐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 신진 사대부의 갈등

 

- 고려를 개혁하는 방향에 대해 서로 생각차가 있었던 신진 사대부들은 크게 파가 2개로 갈리어 싸우게 됩니다.

 

- 이색 , 권근 등의 온건파 신진 사대부와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파 신진 사대부로 나뉘어 지게 되는 것이죠.

 

- 우왕을 쫒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할 때 이 두 파가 본격적으로 싸우게 되는데요. 이성계와 손잡은 급진파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 우기며 우왕의 아들 창왕을 왕위에 올리기를 반대했습니다.

 

- 온건파는 이런 주장이 터무니 없다며 당연히 창왕이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 이성계와 급진파는 급기야 창왕을 몰아내고 이성계의 친척인 공양왕을 왕위에 앉히게 됩니다.

 

-토지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두 파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는데요. 결국은 급진파의 뜻대로 모든 권문세족의 토지를 거두어 들여 새로운 기준에 따라

다시 나누는 급진적인 토지개혁인 과전법을 실시하게 됩니다.

 

 

 

 

 

 

 

 

 

● 역성혁명으로 나아가다

 

 

 

- 고려 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온건파와 뜻이 달랐기 때문에, 이성계 아들 이방원은 온건파 정몽주를 만나

끈질기게 설득하였습니다.

 

 - 하지만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던 정몽주를 역성혁명을 위해 선죽교에서 제거해버립니다.

 

- 공민왕 비 안씨가 대비로 있었으므로, 형식적으로 고려 왕조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가질 수 있도록

공양왕을 폐위한다는 교서와 옥새를 강요하여 받아내게 됩니다.

 

- 몇번의 왕 추대를 거절하던 이성계는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방원의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조선을 건국하다.

 

- 조선 건국의 대표적인 공신 정도전은, 조선의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새 나라의 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 재상중심의 정치, 토지는 모두 국가 소유, 조선경국전을 기준으로 나라를 다스린다 등이 정도전이 생각한 새 나라의 모습이었습니다.

 

-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였고 왕도정치를 이상적인 정치철학으로 가졌습니다.

 

- 유교 사상으로 무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모든 고을에 국립학교인 향교를 세우고, 서울에는 성균관을 세워 유학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 고려에서 시행했던 팔관회, 연등회 등 불교 관련 의식은 모두 없애고 모든 의례를 유교 이념에 맞도록 정비하였습니다.

 

 

 

● 외교 정책

 

- 명나라처럼 강한 나라는 받들어 섬기고, 일본, 여진같은 이웃나라와는 우호적으로 교류하는

사대교린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 태조는 500년 가까이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을 떠나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습니다.

 

 

 

● 나라의 기틀

 

-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보았는데, 이에 가장 반발한 인물이 태조의 아들 이방원이었다고 합니다.

 

- 태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둘째 부인에게서 낳은 막내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이에 대해 첫째 부인 한씨의 아들들이 강한 불만은

품게 되었습니다.

 

- 조선을 세우는데 공이 컸으나 세자 책봉에도 밀려나고 개국 공신에도 들지 못한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불만이 가장 컸던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지요.

 

- 정도전은 태조가 아끼는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여 재상정치를 펼쳐보려 했기에, 이방원은 태조가 병이 난 틈을 타

정도전과 방석을 제거해버립니다.

 

- 태조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방과가 정종임금이 되었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제2차 왕자의 난으로

피바람이 불게 됩니다. 바로 방간, 방원 형제간의 왕위 다툼이었죠. 이 싸움에서 이긴 방원이 나중에 정종에게서 왕의 자리를 넘겨받게 됩니다.

 

- 이방원이 바로 태종으로 즉위한 것이지요.

 

 

 

 

 

● 태종의 정책

 

- 의정부의 힘을 약화시키고 6조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왕권 강화에 힘썼습니다. 아무리 외척이라도 권세를 과시하고 왕권에 도전하면

가차 없이 죽여버리곤 했지요.

 

- 공신들 가운데에도 태종의 정책에 불만이 있는 자는 무자비하게 제거해 나갔습니다.

 

- 사병을 이용해 권력을 쥘 수 있었던 태종은 자신과 같은 일이 또다시 벌어질것을 두려워 해 왕과 세자를 보호하는 군사 이외에는 모든 사병을 없앴습니다.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 여러 군현으로 나눈 다음 관찰사와 수령을 파견해 지방을 감시했습니다.

 

- 양전 사업을 통해 주인없는 땅을 나라의 것으로 귀속시키고 절에 소속된 토지를 나라에 귀속시켜 세금을 걷을 토지를 늘려갔습니다. 또한 국가에 대한 의무를

피하기 위해 숨는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인보제, 호포제를 실시하여 호적 제도를 정비해나갔습니다.

 

- 노비변정도감을 두어 고려 말기 노비가 된 양인들을 풀어주고 세금을 낼 양인을 확대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정책은 정말 똑똑한 정책이었던 것 같아요. @_@b )

 

 

 

 

머릿속에 잘 정리가 좀 되셨나요?^^

 

다음 시간에는 조선 시대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되 양반 중심, 유교 중심 사회로서의 조선의 특징에 좀 더 초점을 맞춘 포스팅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즐공하시고 우리 다시 만나요 ^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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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 휘둘리는 고려

 

○ 원나라는 충렬왕을 물러나게 하고, 그 뒤를 이은 충선왕도 얼마 안 가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등

고려 왕을 제멋대로 바꾸었습니다.

 

○ 원나라 공주와 고려왕이 정략 결혼을 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는 고려왕의 부부 사이까지 간섭을 했고 , 고려 여인으로 원나라 황제의 부인이 된

기황후 집안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친원세력의 횡포가 심했습니다.

 

○ 원나라에 바칠 공녀를 뽑기 위해 고려의 처녀들은 결혼을 금지 당했고, 공녀로 뽑힌 처녀의 집안은 밤낮으로 울음이 그치지 않았으며,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목매 죽는 사람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 권력을 가진 권문세족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땅과 노비를 늘려 거대한 농장을 운영해 나갔습니다.

 

○ 홍수, 가뭄으로 먹고 살일이 막막해지자, 부모는 아이를 팔고 남편은 아내를 팔고 주인은 자기 노비를 시장에 늘어놓고 파는 사람 시장도 생겨났습니다.

 

○ 권문 세족 뿐 아니라 사대부, 절 마저도 농장도 늘리기 위해 열을 올렸고 권문 세족 가운데에는 세금을 내지 않는 집안이 많아

힘없는 백성들이 부족한 세수를 메우는데 애를 쓸 수 밖에 없었고 ,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가거나 노비가 되는 백성도 생겨났습니다.

 

 

 

하루 아침이 다 가도록 도토리를 줍지만 도토리는 광주리에 차지 않고, 두 다리만 나무토막처럼 굳고 , 주린 창자는 소리쳐 운다. <상률가 中>

 

 

 

살리라 살리로다

청산에 살리로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리로다.

얄리얄리 얄랑셩 알라리 얄라 <청산별곡 >

 

○  원나라에 대항하여 일어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두차례에 걸쳐 고려 영토로 쳐들어왔으나 모두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  왜구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끊임없이 쳐들어왔고 세금으로 걷는 곡식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공격하거나 세금 보관 창고를 약탈, 사람도 잡아가는 등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 최영은 홍건적과 왜구를 대상으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성계는 황산 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습니다.

 

○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다시 부는 개혁의 바람

 

 

○ 스무세살의 젊은 나이로 즉위한 공민왕은 원나라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원과 연을 끊고 고려를 바로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 공민왕은 불법으로 빼앗은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고, 몽고식 복장과 머리모양을 금지하였으며 권문세족을 압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공민왕은 이름 없는 승려인 신돈에게 최고 관직을 내려주고 권문세족을 척결하고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도록 권력을 주었습니다.

 

○ 권문세족이 반발하여 신돈에게 반역죄를 씌워 상소를 올렸고, 공민왕의 신임을 잃은 신돈은 귀양을 갔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 신돈이 죽은 후 공민왕은 새로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새로 중국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 정몽주, 정도전, 권근 같은 성리학자들의 세력을 신진 사대부라고 하는데, 이 신진 사대부가 공민왕의 지지를 받아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 이후 공민왕은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 명나라가 고려 땅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보이자, 명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 집권층간의 첨예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 우왕은 명나라에서 고려로 들어오는 길목인 요동을 침으로써 명을 혼내주기로 결심하고 요동정벌 부대를 결성합니다.

 

○ 계속 되는 장마와 군 사기가 떨어지자 희망이 없는 전투라고 여긴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리기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을 하고 이를 막는 최영 장군까지 죽여버립니다.

 

○ 최영 장군이 처형 당하는 날 개경 사람들은 장사를 걷고 시장을 닫았으며 길가의 사람들이면 누구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 우왕은 공민왕과 신돈의 하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데, 이성계는 우왕을 공민왕의 자손으로 보지 않고 신돈의 아들이라고 모략하며

왕위를 폐하고 죽이게 됩니다. 우왕의 아들 창왕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 이성계는 자신의 친척인 공양왕을 왕으로 추천하였는데, 공양왕이 이성계 반대세력과 친하게 지내자

 

공양왕을 물러나게 하고 본인이 왕위에 올라 조선왕조를

열게 됩니다.

 

 

 

 

 

오늘은 혼란스러운 고려 말기의 역사 내용을 정리해봤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라요 ^^

 

다음 시간에는 드디어 조선시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있어하는 파트라서 더 기대되네요~

 

다음 포스팅으로 다시 만나요 ♡

 

 

 

TGIF!!!!

씐나는 불금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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