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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 휘둘리는 고려

 

○ 원나라는 충렬왕을 물러나게 하고, 그 뒤를 이은 충선왕도 얼마 안 가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등

고려 왕을 제멋대로 바꾸었습니다.

 

○ 원나라 공주와 고려왕이 정략 결혼을 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는 고려왕의 부부 사이까지 간섭을 했고 , 고려 여인으로 원나라 황제의 부인이 된

기황후 집안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친원세력의 횡포가 심했습니다.

 

○ 원나라에 바칠 공녀를 뽑기 위해 고려의 처녀들은 결혼을 금지 당했고, 공녀로 뽑힌 처녀의 집안은 밤낮으로 울음이 그치지 않았으며,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목매 죽는 사람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 권력을 가진 권문세족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땅과 노비를 늘려 거대한 농장을 운영해 나갔습니다.

 

○ 홍수, 가뭄으로 먹고 살일이 막막해지자, 부모는 아이를 팔고 남편은 아내를 팔고 주인은 자기 노비를 시장에 늘어놓고 파는 사람 시장도 생겨났습니다.

 

○ 권문 세족 뿐 아니라 사대부, 절 마저도 농장도 늘리기 위해 열을 올렸고 권문 세족 가운데에는 세금을 내지 않는 집안이 많아

힘없는 백성들이 부족한 세수를 메우는데 애를 쓸 수 밖에 없었고 ,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가거나 노비가 되는 백성도 생겨났습니다.

 

 

 

하루 아침이 다 가도록 도토리를 줍지만 도토리는 광주리에 차지 않고, 두 다리만 나무토막처럼 굳고 , 주린 창자는 소리쳐 운다. <상률가 中>

 

 

 

살리라 살리로다

청산에 살리로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리로다.

얄리얄리 얄랑셩 알라리 얄라 <청산별곡 >

 

○  원나라에 대항하여 일어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두차례에 걸쳐 고려 영토로 쳐들어왔으나 모두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  왜구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끊임없이 쳐들어왔고 세금으로 걷는 곡식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공격하거나 세금 보관 창고를 약탈, 사람도 잡아가는 등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 최영은 홍건적과 왜구를 대상으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성계는 황산 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습니다.

 

○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다시 부는 개혁의 바람

 

 

○ 스무세살의 젊은 나이로 즉위한 공민왕은 원나라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원과 연을 끊고 고려를 바로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 공민왕은 불법으로 빼앗은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고, 몽고식 복장과 머리모양을 금지하였으며 권문세족을 압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공민왕은 이름 없는 승려인 신돈에게 최고 관직을 내려주고 권문세족을 척결하고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도록 권력을 주었습니다.

 

○ 권문세족이 반발하여 신돈에게 반역죄를 씌워 상소를 올렸고, 공민왕의 신임을 잃은 신돈은 귀양을 갔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 신돈이 죽은 후 공민왕은 새로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새로 중국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 정몽주, 정도전, 권근 같은 성리학자들의 세력을 신진 사대부라고 하는데, 이 신진 사대부가 공민왕의 지지를 받아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 이후 공민왕은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 명나라가 고려 땅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보이자, 명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 집권층간의 첨예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 우왕은 명나라에서 고려로 들어오는 길목인 요동을 침으로써 명을 혼내주기로 결심하고 요동정벌 부대를 결성합니다.

 

○ 계속 되는 장마와 군 사기가 떨어지자 희망이 없는 전투라고 여긴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리기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을 하고 이를 막는 최영 장군까지 죽여버립니다.

 

○ 최영 장군이 처형 당하는 날 개경 사람들은 장사를 걷고 시장을 닫았으며 길가의 사람들이면 누구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 우왕은 공민왕과 신돈의 하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데, 이성계는 우왕을 공민왕의 자손으로 보지 않고 신돈의 아들이라고 모략하며

왕위를 폐하고 죽이게 됩니다. 우왕의 아들 창왕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 이성계는 자신의 친척인 공양왕을 왕으로 추천하였는데, 공양왕이 이성계 반대세력과 친하게 지내자

 

공양왕을 물러나게 하고 본인이 왕위에 올라 조선왕조를

열게 됩니다.

 

 

 

 

 

오늘은 혼란스러운 고려 말기의 역사 내용을 정리해봤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라요 ^^

 

다음 시간에는 드디어 조선시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있어하는 파트라서 더 기대되네요~

 

다음 포스팅으로 다시 만나요 ♡

 

 

 

TGIF!!!!

씐나는 불금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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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정변>

● 대표적인 문벌 귀족으로 위세가 대단했던 김부식의 아들이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그을리게 하여 조롱하는 등

문신들이 무신을 얕잡아 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 장군, 여진족을 정벌한 윤관 장군도 모두 문신의 신분으로 군사 지식마저도 뛰어나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일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없는 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자 문인들은 더이상의 무술 연마를 게을리하고 시, 문장 짓는 일에 몰두하면서 점차 무예와 무인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 의종이 행차 중에 오병 수박희라고 불리는 무예 겨루기를 무신들에게 시켰는데, 늙은 장군인 이소응이 대결 중 몸을 피하자 젊은 문신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본 문신들을 매우 격노하였고, 무신 정중부, 이의방 등이 앞장 서서 정변을 일으킵니다.

 

● 이 무신정변에서 한뢰가 죽임을 당하고, 수많은 문신들이 살해를 당하고 맙니다.

 

● 무신들은 의종을 내쫒고 명종을 세웠으며, 정중부는 문신만이 오를 수 있었던 최고 지위인 문하시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명종은 무신들의 눈치만 보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하였고 무신 집권자들간의 권력 다툼으로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 순으로 권력의 이동도 계속 되었습니다.

 

● 천민 출신 이의민이 최고 권력자가 되는 것을 지켜본 백성들은 더이상 불만을 억누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무신 집권자들의 친인척 횡포와 가혹한 수탈에 못견딘 백성들은 전국 여기저기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 조위총의 난, 만적의 난, 망이 망소이의 난, 전주 관노의 난, 김사미 효심의 난 등 전국 곳곳에서 난이 일어났으나 결국 모두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최씨 정권>

 

● 이의민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말뿐인 개혁안, 봉사10조를 올리면서

뒤로는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주무르려 하였고, 자신의 호위 부대인 도방도 만들어 반란의 싹을 자르려 했습니다.

 

● 최충헌이 죽은 뒤 아들 최우, 손자, 증손자까지 권력을 대물림하여 4대간 독재를 할만큼 그 권력이 어마어마했던 것 같습니다.

 

●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무신들에게 약했던 문학, 행정 관련된 일을 도맡아 해줄 문인 집단인 서방을 설치하고, 최씨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색출하는 야별초를 만드는 등 권력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나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60여년간 독재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고려VS몽고의 30년 전쟁>

 

● 최씨 정권의 안정기에 몽고의 칭기즈칸은 러시아, 페르시아까지 아우르는 무자비한 정복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 힘을 합쳐 거란과 싸웠던 고려와 몽고는 이후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몽고는 턱없이 많은 물품을 조공으로 요구하고 사신의 행동도 무례하였다고 합니다.

저고여라는 몽고 사신이 본국으로 가던 중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몽고는 고려의 짓이라고 믿으며 외교 단절을 단행합니다.

 

● 1231년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이 고려로 쳐들어왔고, 각 지역으로 퍼져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점령한 성들에 몽고 관리인 다루가치를 두었습니다.

 

 

● 1232년 최우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다루가치를 죽이며 몽고에 저항하기로 결심합니다.

강화도는 몽고의 침입에 비교적 안전한 지리적 요건을 가지고 있었기에 강화도는 새로운 도읍으로서 활발하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몽고의 침입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은 거의 유일한 지역이 바로 이 임시 도읍지인 강화도였습니다.

 

● 몽고는 고려가 도읍을 몰래 옮기고 다루가치까지 죽인 사실을 알고 6차에 걸쳐 30여년간 고려를 침략하였고 고려 땅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 무신정권은 강화도 지키기에만 급급하였고, 몽고군의 칼받이로 백성들을 앞세웠습니다.

 

● 몽고군에 순순히 항복하지 않았던 문대. 살리타를 죽인 승려 김윤후, 목숨바쳐 성을 지켜낸 충주성 노비들, 그리고 귀주성 백성과 박서.

이들은 무신정권의 무능한 몽고와의 항쟁에서 빛나는 고려인의 정신을 보여준 이들이었습니다.

 

● 몽고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자 많은 관리와 백성들이 십수년간 정성을 바쳐 팔만대장경을 완성시켰습니다.

 

 

 

 

 

<무신정권 종말과 삼별초 항쟁>

 

● 백성들이 죽어가고 강화도마저 관리들이 굶어 죽을 정도로 나라가 피폐해져 가는데도 집권자인 최의는 본인의 권력 유지를 위해

전쟁을 계속 하자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 이에 다른 무신들이 삼별초를 시켜 최의를 제거함으로써 최씨 정권의 60년 독재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 고려태자가 몽고 칸에게 인사를 드리는 조건으로 고려와 몽고는 전쟁을 중지하고 강화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때 쿠빌라이가 칸이 되어 나라 이름을 '원'이라고 칭하였습니다.

 

●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몽고 제국은 작은 나라 고려를 끝끝내 차지하지 못하였고, 고려도 몽고 제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립국으로 보장받았습니다.

 

● 최의가 제거된 이후에도 권력이 이동하며 무신정권이 지속되었지만, 왕인 원종은 이전의 왕처럼 눌려지내지 않았습니다.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고 있던 원종이었으므로 몇차례 위기를 겪었으나 결국 다시 왕의 자리로 돌아와 무신정권에 마침표를 찍고 다시 도읍을 개경으로 옮기게 됩니다.

 

● 최우가 창설한 야별초에서 시작된 부대인 삼별초는 원나라 군대가 지키고 있는 개경으로 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무신 정권을 지지하는 부대였기 때문에

원종과의 사이도 좋지 않은 터였습니다.

 

● 원종이 삼별초 해산을 명하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삼별초는 원나라와의 항쟁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됩니다.

 

●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옮기며 항쟁을 계속하던 삼별초는 고려 원 연합군에 의해 1273년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고려와 원>

 

● 쿠빌라이의 막내딸과 원종의 아들인 충렬왕이 혼인을 하면서, 이때부터 으레 고려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 사위인 고려 왕을 통해 고려 정치에 간섭하려는 속셈으로 고려와 원과의 혼인을 주도하고,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고려를 관리하려 들었습니다.

 

● 충렬왕이 즉위한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제후국이므로 , 폐하 대신 전하, 짐 대신 고, 태자 대신 세자를 쓰도록 압박하였습니다.

 

● 충렬왕부터 공민왕 이전까지 왕 이름에 '충'자가 들어가는 것은 원나라 황제에게 충성하였다는 의미였습니다.

 

(● 몽고 제국의 영토가 아시아, 유럽을 아우르고 있어 사람들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습니다. 베네치아 상인인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서 머물다

돌아가 지은 책이 바로 동방견문록입니다. )

 

●  충렬왕은 몽고식 변발을 하고 신하들에게도 변발과 몽고옷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 원과의 활발한 교류로 몽고의 용어와 물건들이 들어오고, 원으로 유학을 가는 젊은이도 많아졌으며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하는 상인들도 활동도 활발했다고 합니다.

 

 

 

 

 

 

제 포스팅이 도움이 좀 되셨나요??

 

다음시간에는 고려 말의 역사와 새 나라 조선이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할게요 ^^

 

 

 

즐겁고 씐나게~ 공부하시고,

다음 시간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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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의 외할아버지였던 이자겸은 자기의 두 딸을 다시 인종에게 시집을 보내어,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 되었습니다.

혼인을 통해 왕실과 겹겹이 밀접한 관계를 맺어 권세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 실제로 이자겸의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몰랐으며 막대한 부까지 누렸습니다.

 

● 이자겸에게 위협을 느낀 인종이 외척 세력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이자겸이 도리어 난을 일으켜  궁궐로 쳐들어오게 됩니다.

 

이자겸의 난을 도와준 장수 척준경과 이자겸 사이가 틀어지자, 이를 기회로 이자겸을 몰아내 유배시키고 후에는 척준경도 정지상에 의해 탄핵당하고 맙니다.

이로써 외척가문 경원 이씨 세력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대한 태도와, 쇠락한 개경의 운을 버리고 도읍을 옮기자는 의견에 대한

생각이 달라 두 파로 나뉘었습니다.

 

서경파 (정지상, 묘청 등)

  신진 관리

 금나라에 사대 반대, 금나라 정벌 주장

독자적 연호 사용을 주장

 개경의 기운이 다하였으니 서경으로 도읍을 이전할 것을 주장

개경파 (김부식 등)

  개경 문벌 귀족

 나라의 안위를 위해 사대 필요. 금나라 연호를 사용할 것을주장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이 고생하니, 서경으로 도읍 이전을 반대

 

 

● 인종은 처음에는 서경에서 새로이 시작해보고자 새 궁궐인 대화궁 공사도 시작했으나 여러번 궁궐이 벼락을 맞아 불타는 일을 겪고서는

서경 천도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 서경 천도가 무산이 되자 묘청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서경으로 가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인종에게 서경으로 와 황제에 오르기를 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한 토벌군이 정지상 등 묘청과 가까운 인물을 다 죽여버리고

서경을 포위, 반란군을 진압하게 됩니다.

 

● 이로써 김부식은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 묘청의 난이 실패한 이후 북방 영토에 대한 고려의 관심도 점차 수그러들었고,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란 생각도 점차 약화되어 갔습니다.

한편 신라의도읍이었던 경주 출신 김부식은 고려가 고구려 보다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계승한 나라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 생각을 반영해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 고려가 건국되기 전 300년 가까이 중국을 다스리던 당나라가 멸망하고, 거란이 이후 요나라를 건설합니다.

 

● 이에 맞서 한족이 세운 송나라도 세력을 넓히면서 요와 송이 건국초부터 대립 양상을 띄다가, 요나라가 망한 뒤에는

여진족의 금나라가 다시 송나라와 대치되는 형국을 이루었습니다.

 

●  중국대륙은 어느 대국에 의해 통일되지 못하고 크고 작은 여러 나라가 서로 대립하며 전쟁을 하는 때였기 때문에

고려는 오히려 중국의 영향을 덜 받고 비교적 자유로운 국제 무대 환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동아시아에서의 위상이 높아진 고려는 스스로를 황제의 나라라고 칭하는 등 그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국가적 행사였던 팔관회에서도 다른 나라의 관리, 상인들이 고려의 왕에게 인사를 올린 후 선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 고려는 벽란도를 중심으로 해서 바닷길을 통한 무역이 특히 활발했습니다.

 

● 송나라가 주요 무역상대국이었고, 그 뒤를 이어 여진족, 일본, 대식국(아라비아) 상인들과도 교류를 늘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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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건국초부터 친척의 나라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원수의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태조 왕건은 거란이 선물로 보낸 낙타를 만부교에서 굶어죽게 하고 사신을 유배 보내는 등

적대적이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 하지만 이때에는 거란이 여진족 토벌, 발해 부흥 운동 진압등 할일이 많아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다가

이후 요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나서는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한족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우면서 송과 고려가 우호적으로 지내자 위기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 거란이 소손녕을 보내 고려를 침략하고 항복을 요구해올 때 , 고려는 서희가 강화 회담에 나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 고려가 요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여진족 때문이니, 함께 여진족을 몰아내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하면

송과 관계를 끊고 요와 교류하겠다고 제안하자, 소손녕도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이로써 고려가 강동6주를 차지하게 됩니다.

 

● 한동안 평화로웠던 고려에 또 한번 혼란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어린 왕을 쫒아내고 새 왕을 세우려던 강조의 정변을 핑계삼아 문책한다는 명분으로 거란이 또다시 침입합니다. (ㄱㅓ란의 2차 침입)

하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 실제로는 군사적 요충지인 강동 6주를 빼앗기 위한 기회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 강동6주의 하나인 홍화진성의 양규장군 부대의 눈부신 활약에도 거란은 개경까지 내려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습니다.

 

● 고려는 현종이 직접 요에 조공한다는 조건을 걸어 전쟁을 종결시켰지만 , 전쟁 후 조공을 거절하여

요나라가 다시 침입해 옵니다. (거란의 3차 침입)

 

●  이 때 강감찬 장군이 고려의 지휘관이었는데 삼교천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거란군의 사기를 꺾어놓았습니다.

 그 뒤에도 거란군은 가는 곳마다 고려군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군사를 돌리게 됩니다.

 

퇴각하던 거란군은 귀주에서 다시 한번 강감찬 부대와 부딪혔고 이때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겨우 수천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  이 후 요나라는 더이상의 고려 침입을 포기하고 고려와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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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요, 금나라와는 공식적인 거래인 조공과 하사품의 형식의 공무역을 주로 하였고,

송나라와는 정식 국교가 없을 때에도 끊임없이 상인들이 개별적으로 오고가며 거래하는 사무역이 이어졌습니다.

 

● 송나라는 중국 영대 왕조중 가장 융성한 문화와 문물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고려는 사신, 상인의 왕래를 통해 송의 앞선 문물을 들여오는데 괌심이 많았습니다.

 

●  종묘사직을 비롯하여 제사에 유교 사상을 따르는 제도를 받아들인 것도 바로 송을 통해서 였습니다.

 

여진족은 삼국시대에 말갈족이라고 불리웠던 부족으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었으나, 후에는 발해에 포함되었다가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여진족은 조선 시대에 가서는 야인 , 그리고 만주족이라고 불렸습니다.

 

●  고려와 여진족이 함경도에서 무력 충돌이 났을 때 고려가 크게 패하고 말았는데, 고려는 패전 이유가 기병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기병 중심의 별무반을 새로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몇 년 뒤 윤관의 지휘하에 별무반 군사가 여진족 정벌에 나서 여진족을 몰아낸 자리에 동북 9성을 쌓았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족은 집요하게 공격을 계속하면서 9성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조공을 약속 받고 고려는 9성에서 군대를 철수하게 됩니다.

 

● 1113년 여진족은 막강한 세력으로 커져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와 송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킨 후 100여년간 영화를 누리다가 몽골족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고려는 정리를 해도 이야기할 게 많이 나오네요 ^^

 

다음 포스팅에서도 고려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꿉꿉한 장마철에 몸과 마음.. 지배당하지 마시구요.

 

이런 날일 수록 더 파이팅하는 거 , 아시죠?^^

 

 

그럼 다음 시간에 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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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벨라입니다 ^^

 

오늘은 공부 내용 요약정리하는 포스팅에서 잠시 벗어나,

 

학원 강사라는 직업의 매력을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ㅎㅎ

 

왜냐구요?

 

제가 학원 강사거든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금은 육아에 올인하면서 내 아이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는 엄마이지만,

 

전직 10년에 빛나는 영어강사이자,

 

앞으로도 이 길을 쭈욱 걸을 강사 바라기입니다.

 

 

대학교 졸업생들중에 취업 시즌이 다가오면서 학원 강사를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많을거라고 생각됩니다.

 

학원 강사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진입장벽이 낮아서 첫발을 들이기가 아주 쉬운 직업중 하나이죠.

 

저 역시 수능 치고 서울로 상경하자마자 대학교 1학년 수업도 듣기전에 학원에 취업해서

 

학업과 강사라는 일을 병행하기 시작했거든요.

 

스무살 때 발을 들였던 학원강사라는 직업이 평생 밥 벌어먹을 일이 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때였어요.

 

 

대학교 4년동안 학원강사로 중고등부 영어 전담을 하면서 번 돈으로 학비, 생활비를 충당하고

 

저도 꽤 큰 중견기업의 회장비서로 취업을 했었습니만...

 

거지같은 회장의 성추행과 여사원의 상식을 벗어난 텃새를 참지 못하고 바로 관둘 수 밖에 없었어요.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정말.....

 

치가 떨리네요.

 

 

일단 강사는요.

 

걸어다니는 일인 기업이죠.

 

내 몸이 곧 브랜드, 내 이름이 곧 사업체인 셈이죠.

 

굉장히 개인적으로 진행되는 일이라 성추행에 노출되는 빈도가 저는 상대적으로 적은 직종이라고 생각해요.

 

내 수업 들어가서 내 수업 치기 바빠죽겠는데

 

원장 즉 상사와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기가 일반 회사에 비해서는 가능성이 적은 것 같아요.

 

 

실제로 대기업 뺨치게 큰 회사형태로 운영되는 학원에서는 성추행 사건으로

 

또 한번의 피해자가 되는 불운을 겪었지만,

 

다른 학원에서는 한번도 그 비스무리한 일을 겪지 않았답니다.

 

젊은 여선생이라면 이 부분, 민감하게 고려할 부분이잖아요.

 

수업이 빡빡하게 짜여있는게 대부분이라 다른 강사와 마찰을 가질 여지도 적구요.

 

철저히 개인플레이란거.

 

제 성격상 딱이더라구요.

 

 

 

 

 

회식, 단합대회 딱 싫어하고

 

여럿이서 팀플레이 하는 게 적성에 안 맞다면 강사라는 직업이

 

적성에 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강사는 월급쟁이이긴 하지만, 성과연봉제의 특성을 좀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능력, 즉 강의력이 뛰어나면

 

강사 페이가 훌쩍 뛰어서 일반 사기업 사원보다 더 많은 월급을 거머지게 되구요.

 

초짜에 강의력까지 그저그렇다면

 

초반엔 쥐꼬리 만한 페이로 좀 힘든 시기를 거쳐야 할 수도 있어요.

 

 

능력제!

 

본인이 잘 가르친다면,

 

강의력 하나는 끝내준다면,

 

능력껏 보상이 따르는 직업입니다.

 

 

 

M 모 인터넷 일타 강사들 연봉이 100억이 넘는다고들 하죠.

 

한편 한달에 100만원도 안되는 월급으로 주6일 주7일 하루 9시간 이상 강의를 뛰는 분들도 있는 세계가 바로 강사의 세계이죠.

 

 

 

 

 

시간만 잘 조절한다면

 

학원에서 따박따박 받는 고정월급 이외에

 

개인교습 즉 과외로 짭잘한 부수입도 노려볼만 합니다.

 

 

오전 시간은 대부분 프리하고

 

입시학원 기준으로 보통 출근이 오후 2시 왔다갔다거든요.

 

오전에는 영화를 보든 헬스장을 가든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여유로운 오전 시간을 누릴 수 있죠.

 

저 같은 올빼미형 인간에게는

 

저녁, 밤 타임에 일하는 강사가 제격이더라구요 ㅎㅎㅎ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정년!

 

 

강사는 정년이 없어요.

 

몸이 받쳐주고 체력이 받쳐주는 한

 

원할 때 까지 할 수 있는 일이 강사입니다.

 

 

원장 밑에서 일하는 월급쟁이 강사라면 나이제한이란 게 있겠지만

 

나이들어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강사나

 

본인의 학원을 운영한다면

 

정년 따위 걱정할 필요 없지요.

 

 

늙어서도 현장 강의를 할 수 있는 - 천직이라는 사명감으로 평생 일하는 강사가 되고 싶다면

 

체력관리, 건강관리는 필수랍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또래보다 젊은 감각을 유지하기 쉽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쓰는 표현들도 알게 모르게 배울 수 있고

 

말이 통하는 선생님,

 

젊어 보이는 선생님이 되기위해

 

패션에도 신경을 쓰고 트렌드에 민감해지려고 노력하다보면

 

어느새 주변 친구들은 펑퍼짐한 아지매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어 있는데,

 

나는 그에 비하면 좀 봐줄만하다~ 가 되는거죠^^

 

 

 

 

그리고

 

내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밤을 세워 만든 프린트물로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는데

 

내 제자들 성적이 쑥쑥 오르고

 

 

공부에 관심 없던 녀석이 갑자기 공부 좀 해보려고 덤벼들 때

 

 

강사로서의 보람을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뿌듯하고 벅차답니다.

 

 

나는 인성을 가르치고 인간다운 인간을 만드는 교사, 스승이 아니라

 

너네 성적을 올려주고 원하는 대학에 가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시니컬하게 말해놔도

 

선생님 사랑해요

 

선생님 감사해요

 

라며 정성들여 쓴 손편지를 건네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내가 진짜 직업 하나는 기똥차게 골랐구나.

 

강사하는 보람이 있다.

 

요런 생각이 마구마구 샘솟는답니다. ^^

 

 

 

 

 

 

학원가에는 자신의 진짜 직업을 찾기 위해 잠시 돈 벌기 위한 알바 장소로 발을 들여놓는

 

대학 졸업생이 어마무시하게 많습니다.

 

 

그 중 대부분이 최하의 페이와 대우를 받으면서 강사 생활을 유지하다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서거나

 

아님 그냥 그 페이에 머물러 존재감 없는 강사로 살아가요.

 

 

 

 

본인의 자존감을 훼손하는, 별볼일 없는 강사로 살지 마세요.

 

온 학원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오고

 

최소 자기가 발 들여놓은 학원에서만큼은 최고로 인기 좋은 일타강사가 되도록

 

수업 연구도 하고 치열하게 공부도 하면서

 

강사로서의 퀄리티를 높혀가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사교육 시장에서 멋진 강사로서의 첫발을 내딛을 예비 강사님들께

 

강사라는 직업의 매력을 알려드리는

 

포스팅이 되길 바라면서 전 이만 물러갑죠~^^

 

 

 

넉넉한 저녁 되시구요~

 

우리 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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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벨라입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영문법 카테고리로 포스팅을 작성하는 것 같아요.

 

요즘 영어보다 제가 한국사 공부에 빠져가지고.. 흑흑 죄송합니다 ㅜ_ㅜ

 

지난 시간에 명사에 관해서 간단하게 요약정리 해봤는데요. 오늘은 관사에 관해서 공부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지요 ^^

 

 

관사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A?

The?

 

네 맞아요.

 

엄밀하게 말해서 a, an 을 부정관사라고 이름 붙이구요.

the 를 정관사라고 부른답니다.

 

a cat 처럼 자음 발음 앞에서는 a 를 붙이고

an apple 처럼 모음 발음 앞에서는 an 을 붙인다는 거 중학교때 아마 배웠을거에요.

 

hour 이 h 로 시작하니 a hour 아니냐? 하면 안됩니다.

스펠링보고 결정하는 게 아니라, 발음으로 결정한다는 거! 기억하세요.

 

발음이 /auer/ 아우얼 , 모음으로 시작하니까 an hour 이 되야 되는 것이죠.

 

부정관사 a/ an

 

◆ 명사를 처음으로 말하는 경우

 

이야기 할 때 맨처음 사용하게 되는 명사에는 the 가 아닌 a 로 시작합니다.

I saw a dog. The dog was cute.

처음에 dog 를 언급할 때는 a 를 붙이고, 그 다음 언급할 때 부터는 이미 알고 있는 대상이니 the 를 붙이게 되는거에요.

◆ 셀 수 있는 명사라는 걸 의미한다.

 

셀 수 있는 명사는 절대 혼자 단독으로 쓰지 않아요. 반드시 a, the, 아님 소유격이라도 앞에 써야 하지요.

즉  cat 이라는 말은 없어요.

a cat 이거나 the cat 이거나 my cat 이거나 해야 된다는 거죠.

즉 부정관사가 붙었다는 건 셀 수 있는 명사를 언급한다는 걸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I signed a contract for the apartment.

굳이 나는 하나의 계약서에 사인했다라는 어색한 해석을 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아파트 계약서에 사인했다. 라고 해석하면 됩니다. contract가 셀 수 있는 명사이기 때문에 a 를 동반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 있는 그대로 '하나의'의 뜻이기도 하다.

Rome was not built in a day.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는 '하나의' 라는 뜻이 중요하게 해석되죠.

 

◆ 종족 전체를 뜻한다.

A dag is a faithful animal.

여기서는 개 한마리가 충성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개라는 모든 동물은 충성스러운 동물이다라는 뜻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처럼 종족 전체를 뜻하기도 하는데 그럴땐 A dog, The dog, dogs 중에 아무거나 써도 됩니다.

 

◆ 같은(the same) 의 뜻

We are all of an age.

우리는 모두 하나의 나이다? 해석이 이상하게 됩니다.

문장에 따라서 '같은'이라는 뜻을 가지는 a 가 있어요.

이 문장에서도 우리는 모두 같은 나이이다. 라고 해석이 되어집니다.

 

 

 

 

 

정관사  The 는 좀 더 활용폭이 넓습니다.

 

한번 알아볼까요?

 

◆ 앞에 나온 명사의 반복.

 

I saw a dog. The dog was cute.

 

앞에서 a dog 라고 언급한 녀석을 다시 언급할 때는 화자, 청자 모두 아는 대상이기 때문에 the dog 로 받습니다.

 

최상급 앞에서 쓰인다.

 

The only

the best

the youngest

처럼 유일, 최상급 앞에서는 정관사 the 를 붙인다는 거 기억해주세요.

 

유일한 것 앞에 쓰인다.

 

the moon, the universe, the sky, the sun  등 유일무이한 것 앞에도 the 를 사용합니다.

 

강, 바다, 산맥 등의 이름 앞에도 the 를 수반하고요. 열차, 배, 공공건물, 신문이나 잡지 등의 이름 앞에도 the 가 붙습니다.

 

이런건 일일이 외우려 들지 마시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심 돼요.

 

자주 보면 익혀지는 것이지, 억지로 외우려 들지 마세요 아셨죠? ^^

 

 

수식어구로 한정 될 때

 

The woman wearing glasses is my mother.

 

처음 언급하는 대상은 부정관사 a 를 붙인다고 했는데, 왜 여기서는 A woman 이 아닌 The woman 일까요?

 

뒤에 밑줄쳐진 wearing glasses 라는 구의 수식을 받는 대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어떤 한 여자가 아닌, 안경 쓴 여자라고 범위가 좁혀졌죠?

 

이렇게 어떤 절이나 구의 수식을 받아 범위가 한정 될 때는 The 라는 정관사를 붙이게 됩니다.

 

 

 

서수 앞에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 처럼 서수에도 the 를 붙여요.

 

 

 

 

 

 

이렇게 부정관사랑 정관사의 대표적인 쓰임새에 관해 배워봤어요.

 

이외에도 관사의 위치도 중요하게 알아둬야 합니다. 생각보다 원서를 읽거나, 시험 문제를 풀거나 하면 많이 등장하는 부분이

 

so 형 a 명

 

같은 관사 위치, 순서에 관한 거거든요.

 

so 다음에 형용사 , 그다음에 부정관사인 a, 그 다음 명사가 온다는 이야기에요.

 

비슷한 걸로

 

as 형 a 명

too 형 a 명

how 형 a 명

however 형 a  명

 

요런게 있어요.

 

too pretty a waman

how pretty a woman 처럼요.

순서가 있으니까 이 순서는 알아두셔야 해요.

 

 

 

such a 형 명

quite a 형 명

many a 형 명

what a 형 명

 

얘네들은 순서가 이렇게 되네요.

 

such a pretty girl

quite a strange story

처럼요.

 

 

정관사 같은 경우는 특히 원어민들이 이유없이 습관적으로 붙이기도 하고, 붙이지 않기도 하고

명사마다 달라요.

 

보통 나라는 일반적으로 무관사인데 the netherland 처럼 the 를 붙이기도 하거든요.

 

이처럼 정관사 붙이는 명사에는 규칙성이 없기 때문에 어떤 문장을 볼 때 마다 하나씩 알아나가는 재미로

 

편안하게 보시면 좋겠어요. 억지로 외우려들면 금방 지친답니다.

 

 

외우기에는 광범위한 부분이라, 제가 추천드릴 건 쇼크잉글리쉬의 영문법 쇼크 2권 148페이지에서 152페이지까지

스토리를 만들어서 외우는 데 도움을 주도록 잘 쓰여져 있더라구요. 도서관에서 빌리셔서 그 부분만 따로 참고해 보시면

도움이 되실거에요 ^^

 

 

벌써 금요일이네요~

 

씐나는 불금 되시고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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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벨라입니다.

 

저번 시간에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던 통일신라와 발해에 관해 배워봤어요.

 

오늘은 혼란한 남북국 시대를 대통합한 고려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약 정리한 거 여러번 읽어보는 사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역사의 숲을 보는 눈이 생기리라 확신합니다 ^^

 

출처: google

 

신라의 쇠락

 

○ 장보고가 죽은 이후 표면적으로는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 처럼 보였던 신라였지만, 실제로는 골품제로 인한 사회 모순이 깊어져 가던 시기였습니다.

 

○ 6두품 출신의 최치원도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한 인재였지만 골품제로 인해 정치의 핵심 인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 명문장가 강수, 승려 원효, 원효의 아들 설총 등도 6두품이었는데, 후삼국 시대부터는 많은 6두품 출신들이 신라에 등을 돌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지방에서는 귀족들이 사치생활을 하고, 세금을 과하게 걷는 등 횡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도 높아져가고 있었습니다.

 

○ 한편 골품제로 조정의 관리가 될 수 없었던 지방의 유능하고 학식있는 사람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모아 스스로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 정부에서 과도한 세금을 요구하자 몇 년 째 흉년에 힘들었던 농민들이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들불처럼 봉기를 넓혀나갔습니다.

 

○ 반란이 퍼지면서 지방 세력가들은 지역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이 지방 세력가들은 몇 개의 마을을 아우르며 세력을 넓히고 군사 조직도 갖추면서 '호족'이라는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했습니다.

 

○ 기훤이나 양길과 같은 사람이 호족 중 하나였는데, 궁예가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대접을 제대로 못받자 양길의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후삼국 시대의 시작

 

○ 신라의 장교 출신인 견훤은 가는 곳 마다 환영을 받아 짧은 시간안에 엄청난 추종자를 모았습니다.

 

○ 견훤은 완산주에 후백제를 세우고 국가 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 백제를 세운 뒤 쉴 새 없이 전쟁을 벌여 옛 백제 영토 대부분을 되찾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 신라의 승려였던 궁예는 농민 봉기로 나라가 혼란해지자 절을 떠나 기훤의 부하로 들어갔으나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자

양길의 수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 후에 철원을 차지한 궁예가 근방 호족을 평정하고 송악으로 도읍을 옮겨 주변 김포와 강화도까지 손에 넣는 등 세력을 떨쳤습니다.

 

○ 901년에 왕이 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천명하였습니다. (후고구려)

 

○ 궁예는 스스로 미륵이라고 칭하면서 백성들이 자신을 신성하게 보기를 바랐습니다.

 

 

 

 

○ 견훤과 궁예가 활발하게 영토를 넓히는 동안 신라의 영토는 경주 일대로 비참하게 쪼글어들었습니다.

 

 

 

 

 

후삼국 통일과 고려 건국

 

 

왕건이 아버지와 함께 궁예 밑으로 들어가 부하가 되었는데,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많은 영토를 빼앗아 오는 등 활약이 대단해서 궁예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왕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성품이 온화하여 많은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 한편 궁예는 점차 성품이 포악해져갔고 많은 사람을 모함해서 죽이는 등 살벌한 정치를 했습니다.

 

○ 궁예의 포악한 정치에 시달렸던 여러 장수들이 왕건을 설득하여 왕이 되기를 간청했다고 합니다.

 

○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습니다. 궁예는 산골에 숨어 있다 농민의 보리 이삭을 먹다 들켜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출처: Wi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90901003584&subctg1=&subctg2=kimedia Commons

 

왕건의 모습

 

 

○ 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한반도는 견훤과 왕권이라는 양대 산맥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 남은 신라땅을 차지 하기 위해 견훤이 신라로 군대를 보냈는데, 신라가 고려로 구원군을 요청하자 고려가 신라의 구원군으로 출병하게 됩니다.

 

○ 이로써 후백제와 고려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부딪히게 됩니다.

 

○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죽이고 왕경을 차지 하는 등 한동안 후백제쪽으로 기세가 기울었으나 930년 전세가 뒤집히게 됩니다.

 

○ 고창에서 충돌한 두나라 중 결국 고려군이 크게 이겼고, 주변의 100여개가 넘는 고을의 호족들이 고려로 자진 항복해 왔습니다.

 

○ 신라 왕의 초대를 받고 신라 왕경에 머물다 간 왕건은 신라 사람들에게까지 민심을 얻게 됩니다.

 

○ 한편 견훤은 자식들에 의해 금산사에 갇히는 꼴을 겪게 되고, 이에 격분한 견훤은 고려의 왕건에게로 도망쳤습니다.

 

○ 신라 왕 김부는 스스로 왕건에게 나라를 바칩니다. 이로써 화려했던 통일신라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 견훤은 왕건에게 후백제를 공격해달라고 계속 요청하였고, 실제로 후백제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맙니다.

 

○ 후백제가 멸망 한 후 견훤은 바로 병이 들어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합니다. (화병이 아니었을까요?)

 

○ 신라왕 김부가 스스로 고려에 나라를 넘겨 줄 때 태자가 울면서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살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집니다. (마의태자)

 

 

 

○ 태조 왕건이 즉위한 후 지방마다 사절을 보내 호족에게 선물을 주는 등 지방 호족들을 다독이는 데 힘썼습니다.

 

○ 충성하는 호족에게 왕씨 성을 주고, 혼인으로 얽히고 설킨 가족형태를 취해 반란을 예방하고 , 사심관 제도와 기인제도 등으로 호족 통합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 태조 왕건은 고구려를 잇는 나라임을 분명히 하고, 같은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유민들을 모두 받아들입니다.

 

○ 그리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게 강한 적개심을 가지면서 화친을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 후계자를 위한 당부의 말을 쓴 <훈요10조>를 직접 지었습니다.

 

 

 

간촉사 미륵불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46616429@N00/159254020/sizes/o/in/set-72157594153961797/

저자 the Chosun Bimbo (http://www.flickr.com/photos/46616429@N00/)

 

 

 

 

고려시대 이야기,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사실 부끄럽지만 한국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는데, 포스팅을 하면서 저도 공부하게 되니

 

새로운 눈이 생기는 기분이 들어요.

 

몰라서 재미없는거지, 알면 재미있다 던 옛 스승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

 

 

오늘 하루도 열공 즐공하시구요.

 

다음 시간에도 함께 한국사 공부 해보자구요~

 

See you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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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왕도 -

 

 

 

안녕하세요~ 벨라입니다.

 

오늘은 공부하다가 지칠 때, 놀고 싶을 때, 마음이 콩밭으로 갔을 때 -

 

마음을 다지고 가다듬기에 좋은 책 한 권을 소개할 까 해요.

 

바로 공부하는 삶이라는 책입니다.

 

 

 

 저자 -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쥬

 역자 - 이재만

 출판사 - 유유

 

 

 

 

 

 

배우고 익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이라는 부제가 달린

 

그야말로 문맥 그대로 공부하는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클래식한 책이라고 생각되네요.

 

 

1920년에 지어진 책인데, 아직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는 책이니만큼

 

공부에 관한 정통서로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책입니다 ^^

 

 

 

오늘은 책의 앞부분 내용을 살짝 소개해 드릴게요.

 

모쪼록 와닿는 글귀가 되어,  공부하는 마음을 갖추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공부하는 삶이란 우리가 선택하는 삶이 아니라, 공부라는 소명을 받아들이는 삶이다.

공부를 위해 절제하고 신체를 돌보고 식사와 수면에 신경을 쓰고 일상 생활을 단순화하고, 사교 활동을 삼가고 내면의 고요를 유지하라 

지성인이란 지적인 일이라는 소명에 따라 신성한 일에 쓰이도록 선택받은 존재이다.  

공부하는 삶을 평생 걸어갈 의지를 가져라 

지성인은 게으름, 육욕, 자만, 시기심, 짜증 처럼 공부를 방해하는 악덕을 부단히 물리쳐야 하며, 야망이나 허영심 같은 이기적인 동기를 따를 것이 아니라 소명에 따라 참된 것과 선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 

야망은 진리를 자기 아래에 둠으로써 영원한 진리를 거스른다. 

고독을 활력을 불어넣지만, 고립은 우리를 무기력하고 메마르게 만든다. 

인격적 자질, 면학과 절제, 기도하는 정신, 신체 규율은 지성인의 4대 덕목이다. 

사유가 순수하려면 영혼이 순수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천 단계를 단단히 다지기 전에는 둘째 단계로 향하지 않는다. 

 훌륭한 신체에 고결한 영혼이 깃든다- 아리스토텔레스

공부하기 위해 매일 운동하라 .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사람은 반드시 아픈 시간이 있을 것이다.

식사에 신경을 써라. 손쉬운 방법으로 조리한 담백하고 가벼운 식사를 적당량 먹으면 자유롭게 기민하게 공부할 수 있다. 

영혼의 도구인 신체를 돌보는 것이 덕이요, 지혜이다. 

금욕은 공부에 꼭 필요하며 그 자체만으로 선명한 시야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일상을 단순하게 만들어라. 삶의 속도를 늦추어라. 

사교활동은 공부에 치명적이다. 과시욕과 방탕한 정신은 사유를 파멸시키는 적이다. 

공부와 공부를 돕는 환경 이외의 사소한 일을 하느라 돈과 집중력을 낭비하기 보다는 장서를 모으고 유익한 여행이나 평온한 휴가를 준비하고 영감을 되살리는 음악을 듣는 편이 훨씬 낫다. 

무익한 외출을 삼가라 

자만심이나 경쟁심 없이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기 위해 모인 친구들은 서로를 살찌운다.

 

 

 

 

 

 

 

 

옛날에 지어진 책이라 현대에는 적용하기 힘든 부분도 더러 있더군요.

 

예를 들어 남편이 공부하는 삶을 살 때 여자는 묵묵히 내조를 잘하라던가 뭐 그런거요 ㅎㅎㅎ

 

 

시대적으로 적용하기 맞지 않는 내용들은 알아서 스킵하시고

 

공부하려는 마음, 의욕을 되살리는 불씨가 될 만한 문구들을 찾아서

 

메모도 하고 필사도 하면서 읽어보세요.

 

 

공부 하기 싫다가도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자세도 갑자기 정비하게 되고

 

마음도 경건해지는게 , 공부 시작 전 워밍업으로 읽기 딱인 책이에요 ^^

 

 

자극되는 글귀가 너무 많은 책이라, 오늘 포스팅에는 다 담지 못했어요.

 

다음 포스팅에도 공부하는 삶에 나오는 자극 뿜뿜 글귀들 소개들로 만나요 ♡

 

 

See you s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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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 

 

●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는 멸망한 후에도 당의 지배를 반대하며 부흥운동을 계속했다.

 

● 당나라와 사이가 틀어진 신라도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도왔고, 고구려 왕족 안승과 귀족 검모잠등이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 당나라 영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말갈족 걸사비우가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며 당나라와의 전투를 이어나갔지만

그 무렵 둘 다 죽고나서 이들의 운명은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에게 달리게 되었다.

 

●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흑수말갈 제외)을 이끌고 동모산으로 가 새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진이라고 했다.

 

● 대조영은 돌궐, 신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말갈족을 흡수하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아 나갔다.

 

● 713년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 719년 대조영이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 무왕은 흑수말갈을 공격하여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흑수말갈과 당나라와의 외교를 차단시켰다.

 

● 당나라가 발해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차례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 3대 문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당나라와의 관계가 친선관계로 바뀌었다.

 

● 문왕은 당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빌해의 제도를 정비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 당나라의 정치 제도를 본떠 3성 6부제의 중앙 통치 기구를 만들되 운영방식은 발해만의 독자적인 방식을 썼다.

 

● 발해의 국력이 커져가자 당나라도 발해 군왕에서 발해 국왕으로 위치를 한 단계 격상시켜 주었다. 문왕은 커져가는 국력을 발판 삼아 주변 나라들과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 제 10대 선왕은 북쪽으로 흑수말갈을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지방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그리고 남쪽 신라를 공격하여 대동강까지 진출하였다.

 

● 선왕 때 발해가 차지한 땅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때보다 두배 가까이 넓었다.

 

● 넓은 영토와 융성한 문화를 누리는 발해를 보고 당나라는 '동쪽의 가장 융성한 나라' 라는 뜻으로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 3대 문왕이후로 당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다보니 무덤 형식, 제도, 놀이, 물건 등 당나라 문화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 중앙의 문화가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지방에는 고구려, 당나라 문화가 아닌 말갈 문화가 보편적이었다.

 

● 중앙 문화와 지방의 말갈 문화가 서로 섞이지 못한 것은 이후 발해 쇠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10세기에 접어들면서 당나라, 통일신라 , 발해 세 나라 모두 쇠퇴의 길로 접어든 한편 서쪽의 거란족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 거란족을 통합한 야율아보기는 나라를 세우고 , 국경을 넘어와 발해땅을 자주 공격하여 발해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 통일신라는 후고구려 후백제 등 나라가 셋으로 갈라져 서로 맞서 싸우는 터라 발해를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 거란에 무너진 발해는 이후에 오랫동안 부흥운동이 일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 934년 발해 왕자 대광현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 고려로의 망명이 계속 이어져 많은 발해 사람들이 고려로 망명해 살게 되었다.

 

● 같은 고구려 후손이라는 생각으로 고려 사람들은 발해사람들을 환영했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공공의 적으로 생각했다.

 

● 고려 왕건은 거란이 보낸 낙타를 만부교 밑에서 굶어죽게 하는 등 거란과의 화친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늘은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열었던 주역인 발해에 관해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는 한국사 정리 포스팅이 되었길 바라면서

 

마무리할게요 ^^

 

 

 

열공, 즐공하시고 다음 시간에도 더욱 유익한 공부 자료들로 만나도록 합시다.

 

See you s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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