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위화도 회군

○ 1388년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 요동으로 떠난 고려 군대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다.

○○ 이 회군을 지휘한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명령한 우왕과 최영의 명령을 어기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 이성계는 고려 말 부패한 권문세족을 비판하는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았고 반원친명정책을 폈다.


신진 사대부의 갈등

○ 신진사대부가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게 되었다.

○ 급진파 정도전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우왕은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므로 우왕의 아들, 창왕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였고 이성계의 친척인 공양왕을 세웠다.

○ 급진파는 모든 귀족과 관리가 가진 토지를 거두어들여 다시 나누는 새로운 토지 제도인 과전법을 제정하였다.


역성 혁명

○ 급진파 정도전은 왕조 자체를 바꾸는 역성 혁명을 추진했다.

○ 정몽주, 이색 등 온건파는 고려 왕조를 유지하고자 했다. 

○ 이성계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고자 했지만 실패했고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다.

○ 이성계 지지자들에 의해 이성계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된다.

○ 조선의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정도전을 새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새 나라 조선

○ 건국이념으로 유교를 선택했다.

○ 모든 고을에 국립학교 향교를 세우고, 서울에는 성균관을 세워 유교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 고려의 부패 원인을 불교라고 생각해서 팔관회, 연등회 등 불교 관련 의례를 폐지했다.

○ 도첩제를 실시하여 허가를 받아야만 승려가 될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 강하고 큰 나라는 섬기고, 일본 같은 이웃 나라와는 우호적으로 교류하겠다는 사대교린 정책을 썼다.

○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개경)을 떠나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했다.

○ 정도전은 재상중심의 정치를 원했고 태조 아들 이방원은 정도전의 생각에 가장 강력히 반발했다.

○ 태조가 둘째 부인에게서 얻은 막내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첫째 부인의 자식들은 불만이 클 수 밖에 없었고 , 개국 공신임에도 인정받지 못했던 이방원의 불만이 가장 컸다.

○ 정도전이 왕자들이 거느린 사병을 제거하려고 하자 이방원이 먼저 정도전을 제거해버린다

○ 이성계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그가 정종이 된다.

○ 정종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다시 왕자들의 싸움이 일어났고 결국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다.


태종 이방원

○ 태종 이방원은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 직접 왕에게 보고하는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 외척이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자 처남 넷을 모두 죽였다.

○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은 모두 무자비하게 죽였다

○ 전국을 8도로 나누고 여러 군현으로 나눈 후 도에 관찰사를 파견하고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여 모든 지방을 통치하고자 했다.

○ 호적제도를 정비하고 호패제를 실시했다.

○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에 의해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다시 양인으로 되돌려놓았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 영조의 탕평책 ●

▶ 영조는 즉위 후 붕당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습니다.

 

▶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이며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오래 살았고, 재위 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었습니다.

 

▶ 처음에는 탕평책을 잘 썼지만, 소론 세력과의 화합에 실패해서 소론 대부분을 내쫒고 붕당 싸움에 휘말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양반의 사치스러운 생활 금지,  곡식 낭비를 줄이고자 금주령 시행, 합리적인 형벌제도, 신문고 부활, 군포 축소, 균역법 등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를 많이 한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18세기 조선 ●

 

▶ 17세기 동안 전후 복구를 위해 애쓴 덕분에 논에 물을 대는 저수지를 많이 만들고 모내기법이 활성화 되어 벼의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 토지 매매가 유행하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발생하고 땅을 잃은 농민들은 수공업이나 광산, 포구로 일거리를 찾아나서게 됩니다.

이에 자연스레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거래를 위한 화폐로 상평통보가 널리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 정조 ●

 

▶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붕당이 다시 한번 갈라졌는데, 사도세자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쪽을 벽파,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던 쪽을 시파라고 불렀습니다.

벽파에는 노론 대부분이 속했고, 시파에는 소론과 노론 일부, 남인이 속해있었습니다.

 

▶ 벽파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세손의 즉위를 막았지만 정조는 무사히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 붕당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붕당에 상관없이 사람됨과 능력을 보고 인재를 뽑아 쓰고자 했습니다.

젊고 능력있는 인재들은 규장각으로 모아 공부에 매진하게 하고 많은 도서를 간행하고 수집하도록 하였습니다.

 

▶ 왕의 특별 부대인 장용영을 만들어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고 시전의 특권을 없애고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상업을 발달시켰기도 합니다.

 

▶ 노론의 텃밭인 한양을 벗어나 새로운 정치를 하고자 수원에 화성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규장각 출신의 정약용이 거중기, 유형거를 개발하여 화성 공사가 단기간에 완공될수 있었습니다.

 

▶ 수원 화성은, 화성 공사에 대해 빠짐없이 정리한 화성 성역 의궤 덕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 정조는 궁 밖 행차를 할 때마다 백성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했고, 노비 제도를 없애 모든 노비를 양인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생전에 노비 해방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사후 관청의 공노비들을 실제로 해방이 되었습니다.

 

 

 

● 실학 ●

 

▶ 조선 후기에는 현실을 개혁하고 백성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현실적인 학문, 실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실학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 실학의 선구자 유형원은 저서 [반계수록] 에서 자신이 목격한 조선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농업에서 찾았고, 모든 땅을 나라의 것으로 삼은 후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눠 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형원의 아이디어를 좀 더 현실적인 모습으로 바꾼 이익도 대표적인 실학자가 되겠습니다.

 

▶ 우리땅, 우리역사에 관심을 보인 실학자로는 발해고를 쓴 유득공,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 택리지를 쓴 이중환 등이 있었고,

▶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 조선의 상업구조의 문제점을 밝혔고 양반전이나 호질에서 양반들의 위선과 사회 문제들을 꼬집었습니다.

 

박지원은 청나라를 다녀 온 후 열하일기를 통해 외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고 상공업을 발전시켜 경제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북학파라고 합니다.

 

▶ 규장각 학자 출신인 박제가도 북학의를 통해 청나라 기술을 알리고 조선의 문제점과 대책을 기술하였습니다.

 

▶ 홍대용은 모든 사람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신분제도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으며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야 조선이 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실학은 정약용 덕분에 더욱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약용은 조선 정치, 경제, 과학, 역사, 철학 등 모든 분야의 학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조가 죽은 후 다시 노론이 득세하자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18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유배 생활동안 500여권의

책을 썼으며 대표적인 책이 목민심서입니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 광해군 ●

 

▶임진왜란으로 불안해진 조선, 선조는 후궁의 아이로 태어난 광해군의 총명함을 믿고 세자로 책봉한다.

 

▶선조가 새로 맞은 중전이 영창대군을 낳아 광해군의 입지가 불안해졌으나, 아직 아기였던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올릴 수 없었기에

선조가 죽은 후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왕위에 등극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몸소 전쟁터에 참가해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겪었던 광해군은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토지 크기에 따라 쌀로 통일하여 세금을 내게 하는 대동법 시행

동의보감 완성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펴내어 백성 교화

성곽 수리, 궁궐 재건등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고 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중립 실리 외교를 펼쳐서 전쟁을 다시 겪지 않도록 노력했다.

 

▶성리학의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 세력이 광해군이 서자 출신이라는 것과 명나라 홀대를 이유로 들어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 때 도움을 준 세력의 부추김으로 영창 대군과 친형 임해군 살해를 묵인하였고, 인목 대비를 폐위시킨 잘못이 있었다.

전후 재건을 위한 궁궐공사로 백성의 원망도 높아져 갔다.

 

▶결국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조카인 인조에게 왕위를 내어주게 된다.

 

 

● 효종과 호란 ●

 

▶인조가 즉위한 이후 조선은 친명배금 정책을 썼기 때문에 후금의 미움을 받았다. 이에 1627년 1월 후금이 기습 공격해왔는데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양국간 형제의 나라가 되기로 협상하였지만, 1636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군신관계와 공물을 요구하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인조가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두 왕자는 이후 행보가 달랐다. 소현 세자는 청 대신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서양문물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봉림 대군은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기며 청에 복수하고자 했다.

 

▶ 나중에 두 왕자가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인조는 소현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봉림 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봉림 대군이 후에 효종이 된다.

 

▶ 효종은 척화파를 등용하고 군비 강화에 힘쓰는 등 북벌을 추진했다. 하지만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는 청나라의 요구로 인해 나선정벌에 나서게 된다.

 

▶ 한양의 정예부대인 훈련도감을 자꾸 늘리자 그에 따라 군비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게 되었다. 지방은 빌어먹는 백성들이 늘고 도적떼가 들끓었다.

 

●현종과 당쟁●

 

▶ 임진왜란 전 4번의 사화 끝에 훈구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사림파는 김효원과 신의겸 사이에 이조전랑이라는 벼슬자리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자

정치에 대한 입장 차이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동인은 또다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졌다.

 

▶ 효종이 죽자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을것인가에 대해 대립이 생겼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은 당시 권력을 쥐고 있는 서인들의 말에 따랐으나 뒤에 효종비가 죽었을 때에는 남인의 말을 따라 이후 서인이 쫒겨나고

남인이 권력을 잡게 된다.

 

▶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양쪽 붕당이 번갈아가며 조정 일을 맡아보는 '환국' 정치 방식을 이용했는데, 이  때문에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한층 심각해졌다.

 

▶ 서인 집안이었던 인현왕후와 남인 집안이었던 장희빈의 싸움도 이런 붕당정치의 상황과 맞물려있었다.

 

▶ 공납 제도 때문에 중간에서 이득을 꾀하는 무리들의 방납 관행이 퍼지면서 공물을 쌀이나 베로 통일시킨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들의 부담이 커지고 일반 백성들의 고통은 줄었으며, 나라에 물품을 대주는 공인이라는 직업이 생겨 수공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 서인도 남인과 겨루는 과정에서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뉘게 되었다.

숙종의 후사를 두고 장희빈의 아들을 지지한 소론과, 무수리 사이에서 태어난 연잉군을 지지한 노론이 대립하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 후 4년만에

죽고 연잉군(영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한국사 정리_사림의 시대, 조선

 

 

조선건국을 둘러싸고 신진사대부들은 개혁의 방향을 두고 서로 맞서기 시작했다.

 

정도전, 권근 등은 조선을 세우는데 적극 참여한 반면 정몽주, 길재 등은 조선 건국에 반대하였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잡아 조선을 건국했다. 정몽주는 죽임을 당하였고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성리학을 공부하며 제자를 길렀는데, 이들이 사림의 뿌리이다.

 

 

유교는 공자가 세운 사상이고, 성리학은 송나라 주희가 유학을 연구하여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시킨 주자학을 말한다.

 

 

단종의 자리를 빼앗아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반발한 사림은 세조를 왕으로 세운 훈구파 (한명회, 유자광 등) 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훈구파는 각종 정변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높은 벼슬을 하던 무리를 일컫는 말로 불법으로 토지를 빼앗는 등 백성을 괴롭히는 자가 많았다.

 

 

어진 임금이었던 성종 때에 이르러 김종직 같은 사림을 인재로 등용했는데, 이들이 형성한 집단을 사림파라고 하였다.

 

 

삼사의 요직에 앉았던 사림파는 훈구파의 비리를 집중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사림파와 훈구파와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사림파는 몇 차례 큰 화를 당하는데 이를 사화라고 한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이 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의 조의제문이 사초(실록의 원고)에 실리자, 이를 빌미로 많은 사림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사약을 받아 죽은 일을 가지고 이에 가담한 신하들을 죽인 사건이었는데 훈구파, 사림파 둘 다 피해가 컸다. 이때 이미 죽은 한명회의 무덤을 파헤쳐서 처형시킬 정도로(부관참시) 연산군의 분노가 컸다.

 

 

위협을 느낀 훈구파는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키게 된다.

 

 

중종은 경연을 새로 열고 성균관을 부활시키는 등 새로 유학을 일으켜 제대로 된 정치를 하고싶었으나 반정 공신들의 힘에 눌려 실현하기 힘들자 조광조 같은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현량과, 향약 등 여러 개혁을 추진하였고 공로가 없이 반정공신 목록에 들어간 인물을 삭제하라는 상소를 올려 위훈삭제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불만을 품은 훈구파는 주초위왕 사건을 만들어 중종이 조광조를 내치도록 종용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 김구, 김식등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를 기묘사화라고 한다.

 

 

인종을 지지하던 사림이 화를 입은 을사사화 이후 권력을 잡은 윤원형이 비리를 저질러 나라가 어려워지자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는 등 백성들의 저항이 거세졌다.

 

 

이로써 훈구파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사림파가 다시 등장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였다.

 

 

 

선조 때에 이루러 사림이 조정의 중요한 자리를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고 생각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토론하는 붕당정치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이조 전랑직을 두고 이효원을 추천한 자들은 동인, 심의겸을 추천한 자들은 서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광조의 죽음으로 흐지부지된 향약(향촌의 안정을 꾀하는 규약)은 선조때에 이르러 이황, 이이의 활약으로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향약은 고을의 질서를 유지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기능뿐 아니라 지방관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기능도 하였다. 이로 인해 향약을 주도한 사림의 지위와 역할도 강력해졌다.

 

 

사림은 지방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도 설립해나갔다. 서원에서 학문을 연구할 뿐 아니라 선현들의 제사를 지내고, 서적을 만드는 일도 하였다.

 

 

선비들은 성리학 이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최고로 생각했다.

 

 

아무 무늬가 없는 순수한 백자에는 깨끗함을 추구하는 선비들의 이상이 담겨있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학파는 퇴계 이황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퇴계 학파와 율곡 이이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율곡학파가 있었다.

 

 

이황은 성리학의 핵심 내용을 열개의 그림으로 정리한 <성학십도>를 선조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마음 수양을 중시해서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내려가 제자 양성에 힘썼다.

 

 

율곡 이이는 아홉번이나 장원 급제를 할 정도로 똑똑했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선비의 포부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격몽요결> <성학집요> 등을 저술했다.

 

 

이밖에도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한 조식, 독학으로 공부한 화담 서경덕, 서경덕의 제자로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 이황과 8년동안 사단칠정 논쟁을 한 고봉 기대승 등 성리학을 발전시킨 학자들이 많았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한국사_ 신라 총정리 (삼국통일 이전)

 

 

건국 설화 (삼국유사 ) : 서라벌 지역에 사는 대표 6명이 나정으로 가보니 말 한마리가 절을 하고 있었다.

 

말이 하늘로 올라간 후 그 자리를 보니 붉은 알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알에서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 아이가 바로 박혁거세이다.

 

 

 

신라는 사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로국의 대표가 박, , 김씨로부터 나왔는데,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신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사로국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면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갔다.

 

 

 

, , 김씨가 번갈아서 임금의 자리를 가지다가

 

사로국이 경상도 일대를 전부 복속시킬 즈음에는 김씨만이 계속 임금 자리를 이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왕권이 절대적이지 않아서 복속시킨 다른 나라는 여전히 예전의 우두머리를 따랐는데,

 

이에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금관과 거대한 무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400년경 왜가 사로국을 계속 침입해오기에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대신 왜군을 물리쳐

 

주었고

 

그 댓가로 사로국에 대한 간섭이 점점 심해지게 되었다

 

 

 

고구려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면서 남진정책을 내세우자 백제와 사로국(이후 신라)이 동맹을 맺는 나제동맹이 결성되

 

었다.

 

 

 

지증왕때 사로국에서 신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증왕은 이사부 장군을 시켜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도 정복하도록 하였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법흥왕때 율령반포, 관복 제도, 골품제 등을 만들면서 더욱 왕권을 강화시켰다.

 

 

 

이차돈의 순교로 법흥왕은 귀족들의 반대를 잠재우고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삼았다.

 

 

 

신라 진흥왕때 고구려는 귀족 세력간의 싸움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태였는데, 그 틈을 타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이로써 한강 상하류 지역을 백제와 나누어 가졌다

 

 

2년 뒤 진흥왕은 동맹국인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백제 성왕이 한강 수복을 위해 대가야, 왜를 끌어들여 함께 신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목숨

 

을 잃게 된다

 

 

 

본래 신라와 동맹이었던 대가야가 백제와 연합한 것에 분노하여 진흥왕은 이사부 장군에게 대가야를 치게 하고, 대가야

 

가 항복하자 가야 지역 다른 나라들도 줄줄이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 건국이래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강을 차지함으로써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게 되어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고, 새로운 문물을 활발하게 받아들였다.

 

 

 

 

15세 전후 남자청소년들이 모여 학문과 무예를 익히고 친목을 다지는 화랑도가 있었다.

 

 

 

진평왕은 슬하에 딸 둘만 있었으므로, 골품제에 따라서 장녀인 선덕 여왕이 그 다음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귀족들의 불만이 높았는데, 여왕의 권위를 세우고 불법(佛法)으로 나라를 다스림을 보여주

 

기 위해 진흥왕때 지어졌던 황룡사에 9층탑을 건설하게 하였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가까이 두면서 위태롭게 왕 자리를 지켰다.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이 함락되고, 이 싸움에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선덕여왕이 죽고 사촌 여동생인 진덕 여왕이 즉위했다.

 

 

 

진덕 여왕은 모든 정치를 김춘추에게 맡겼고, 김춘추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는 등 외교에 힘썼다.

 

 

 

 

 

 

-삼국통일 이후는 다음 포스팅에서 다룹니다-

반응형

'공부하며 > 역사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_삼국시대, 삼국의 외교  (0) 2018.01.18
한국사_ 철의 나라 가야연맹  (0) 2018.01.18
한국사_백제 총정리  (0) 2018.01.13
한국사_고구려 총정리  (0) 2017.12.19
한국사_고조선 총정리  (0) 2017.12.04
728x90
반응형

한국사_백제 총정리

 

 

 

 

백제의 건국

 

 

 

 

고구려의 왕 주몽이 부여에 두고 온 아들, 유리가 주몽을 찾아와 다음 왕위를 이을 태자가 되었다.

 

 

 

비류와 온조도 주몽의 아들들이나 유리의 등장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삼국사기에 나온 백제 건국설화)

 

온조가 세운 나라가 비류의 집단을 흡수하여 백제라는 나라를 지었다고 한다. (한강유역)

 

 

 

한강 주변의 수십개의 나라가 마한을 이루고 있었는데, 백제가 하나 둘씩 정복하여 한강 유역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백제 고이왕 때 관등을 만들고 복식 지정, 법 제정 등 나라의 기본 토대를 만들어갔다.

 

 

 한강을 통해 낙랑군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쇠무기와 쇠농기구를 받아들여 힘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백제의 번영

 

 

근초고왕때 중국과 직접 교류하면서 문화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근초고왕은 근처 나라를 차례로 복속시키고 중국 전연의 공격으로 힘이 쇠약해진 고구려와 전쟁하여 고구려 고국원왕

 

을 죽이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근초고왕은 왜, 중국 동진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국제 활동을 넓혔다. (동진 이후 송, 남제, 양으로 넘어갈때 까지 외교관

 

계 유지)

 

 

 

백제는 항해술이 뛰어났고, 해상 왕국으로 이름을 떨쳤다.

 

 

 

아직기는 왜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왕인은 왜에 유교 사상을 전해주었다. 대신 왜로부터 군사력을 빌려 주변 나

 

라를 견제하는데 이용했다.

 

 

 

 

 

백제의 위기

 

 

 

근초고왕이 죽고나서 왕실이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그 와중에 고구려는 광개토왕이 왕위에 올랐다.

 

 

 

광개토왕은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복수를 갚기 위해 백제를 공격해 한강 이북 땅을 빼앗아 갔다.

 

 

 

백제를 지원하러 온 왜군은 신라 약탈에만 열을 올렸고, 고구려가 왜군을 몰아내고 신라를 지켜주었다.( 이후 신라에 대

 

한 고구려의 간섭이 커짐)

 

 

 

고구려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이 즉위하고 남하정책을 실시했다.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나제 동맹이 맺어졌다. (신라+백제가 힘을 합침)

 

 

 

백제 개로왕 때 장수왕이 한성을 공격하고 개로왕을 잡아 죽였다. (고구려에 한강 이남까지 빼앗김)

 

 

 

 

 

 

 

백제의 부활 운동

 

 

 

고구려를 피해 지금의 충남 공주인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천도로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으나 동성왕이 즉위하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동성왕은 외교에 노력을 기울이고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었다.

 

 

 

무령왕이 백성을 위한 어진 정치를 하고 나라의 군사력도 점차 회복시켰다.

 

 

 

무령왕은 양나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성왕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중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성왕은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대가야까지 점령하고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백제에서 남부여로 이름도 바꾸었다.

 

 

성왕은 중앙과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하고 귀족의 힘을 약화시켰다.

 

 

 

고구려가 혼란한 틈을 타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백제는 한강 이남 지역을 도로 빼앗고, 신라는 한강 이북 지

 

역을 빼앗았다.

 

 

 

동맹국인 신라가 기습공격하여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차지한 한강 이남 지역을 다시 빼앗아갔다.

 

 

 

 

신라에 복수하기 위해 신라정벌에 나섰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은 죽임을 당하였다.

 

 

 

성왕 이후의 왕들도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아오려고 하였으나 끝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무왕은 미륵 사상으로 백제를 통합하고자 삼국시대 최대의 절인 미륵사를 지었다.

 

 

 

 

 

 

백제의 몰락

 

 

 

 

의자왕 때 신라를 공격하여 대하성의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이 죽었다.

 

 

 

김춘추가 고구려 연개소문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당나라에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였고, 자만에 빠져 있던 의자왕은 급하게 계백의 군대를 황산벌로 보냈으나 계백 군대가

 

전멸하였다.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백제는 몰락하였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고구려 건국

 

 

 

 

주몽, 고구려를 세우다.

 

 

 

건국설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와 하늘의 신 해모수가 사랑에 빠졌다.

 

 

 

이를 알게 된 하백이 유화를 내쫒았는데, 부여의 금와왕이 이를 불쌍하게 여겨 유화를 거두었다.

 

 

 

알에서 태어난 고주몽이 활 실력도 뛰어나고 각종 무예에 뛰어나니 금와왕의 왕자들이 자신들의 자리에 위협을 느껴 주몽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남쪽땅으로 내려와 졸본에 자리를 잡고 고구려를 세웠다.

 

 

 

유리왕, 대무신왕.. 고국천왕 등 왕위를 이어오면서 왕권이 더욱더 강해졌고, 계루부 고씨가 계속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

 

였다.

 

 

 

220년 한나라가 망한 후 중국은 위,,오 세 나라로 갈라져 전쟁이 극심해졌다.

 

 

 

이 중 힘이 센 위나라가 고구려를 자주 침범했고, 동천왕, 미천왕때에 위와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고국원왕때는 전연이라는 나라가 침입하여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잡아가고, 미천왕의 무덤을 훼손하는 등 비통

 

한 일들을 겪었다.

 

 

 

고국원왕 자신도 백제(근초고왕때) 와의 싸움에서 백제 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소수림왕은 전연과 백제에 복수하는 것을 미루고, 나라에 제도를 정비하는 데 먼저 힘을 기울였다.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이라는 교육 기관을 세웠으며, 율령을 반포하였다.

 

 

 

 

 

 

고구려의 성장

 

 

 

 

391년 광개토대왕이 17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잃어버린 고구려의 땅을 되찾기 위해 백제와 전연(->후연)의 정복활동을 시작하였다.

 

 

 

백제의 관미성과 한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다.

 

 

 

고구려가 왜의 침입을 받고 있는 신라를 구원하러 간 사이, 후연이 침입하여 땅을 빼앗아 갔고, 이로써 본격적인 후연 정복 활동을 함으로써 동북아시아 최고 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즉위한 후, 중국과는 외교적으로 정면충돌을 피하고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고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반발하는 백제가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맞섰으나 장수왕은 백제 도읍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

 

왕을 죽였다.

 

 

 

신라도 공격하고 남한강 가에 중원 고구려비를 세웠다.

 

 

 

 

 

 

고구려의 문화

 

 

 

 

 

 

 

 

 

 

 

 

 

 

 

 

 

 

 

 

 

신랑이 신부집에서 머물며 일을 해주다가 아이를 낳고 , 그 아이가 다 자라면 신랑집으로 돌아가는 데릴사위제였다.

 

 

 

고구려의 거문고 연주자인 왕산악이 거문고를 연주하면,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출 정도였다고 한다.

 

 

 

씨름이나 수박회, 활쏘기 등으로 무예 실력을 겨루었다.

 

 

 

성쌓기를 잘해서 수많은 산성을 연결한 덕분에, 물샐틈 없는 방어막을 구축하였다.

 

 

 

 

 

흔들리는 고구려

 

 

 

 

장수왕이 죽은 후 왕권이 점차 약해지다가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심해져 나라가 혼란에 휩싸였다.

 

 

 

백제와 신라가 손을 잡고 쳐들어와 한강 유역을 도로 빼앗아 갔다.

 

 

 

위쪽으로는 돌궐족이 자주 침범해와서 남북으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589,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 하였다.

 

 

 

수 문제 때 고구려를 쳐들어왔으나 장마로 인해 되돌아갔다.

 

 

 

수 양제 때 우중문을 선두로 다시 쳐들어왔으나 을지문덕 장군의 전략에 말려 살수에서 전멸하였다.(살수대첩)

 

 

 

수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처음에는 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모든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을 빌미로 당이 처들어왔

 

.

 

 

 

패전을 거듭하다 마지막 안시성을 남겨두고 지친 당나라 군대가 철수함으로써 다시 한번 고구려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중국과의 기나긴 전쟁으로 고구려 국력이 급격이 쇠퇴하였다.

 

 

 

 

 

 

 

 

 

 

 

 

 

 

 

 

 

 

 

 

 

고구려의 멸망

 

 

 

백성의 삶이 고달파졌고, 연개소문의 독재로 기득권층의 원성도 자자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무너뜨리고 고구려에 처들어왔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치열한 권력다툼과, 지배자층의 배신으로 인해 나당연합군에 멸망당했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우리겨레의 첫 나라 고조선

 

 

 

 

신석기 끝자락에 농사가 본격화 되면서 잉여 생산물이 늘었고, 이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을 중재하는, 힘있는 자가 나타

 

나 족장으로 추대받았다. 이 때가 청동기 시대이다.

 

 

 

이로써 평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부족간의 싸움이 잦아지면서 무기를 강화할 필요성이 생겨나 청동무기를 쓰게 된다. 이 당시만해도 청동검은 지배자만

 

이 사용하는 귀한 것이었다.

 

 

 

거대한 고인돌 (족장의 무덤)로 그 당시 족장의 힘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서북부 일대에서 작은 부족들이 하나둘 통합되어 조선이라는 큰 나라가 생겨나는데, 이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

 

.

 

 

 

일연의 삼국유사 속,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고조선의 첫 임금은 단군왕검이다.

 

 

 

단군은 제사장의 뜻, 왕검은 정치적인 지배자라는 뜻을 가진 의미로 고조선의 임금은 종교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지배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철기시대의 도래

 

 

 

당시 전국 시대라는 혼란기를 겪는 중국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고조선에 쇠를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이로써 고

 

조선에도 철기 시대가 도래한다. (기원전 300년경)

 

 

 

철제무기로 막강한 힘을 가진 고조선은 영토도 넓히고 왕의 힘도 커졌다. 왕은 처음에는 여러 족장의 대표자일 뿐이었

 

으나 점차 큰 힘을 가지게 되어 나머지 족장들은 신하가 되었고, 고조선은 서서히 국가의 형태를 갖추어 갔다.

 

 

 

고조선 초기에는 비파형 동검이 주로 사용-> 세형동검을 사용하게 되었다.

 

 

 

신석기 시대에는 빗살무늬 토기가 사용된 반면, 고조선 때에는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가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미송

 

리식 토기 사용)

 

 

 

철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고인돌은 더이상 만들지 않고 널무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위만조선

 

   

 

중국의 혼란스러운 전국시대를 진나라의 시황제가 마감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세워질때까지 다시한번 혼란에 휩싸인 중국에서 고조선으로 내려오는 사람

 

들이 있었고, 그 중에 위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에게 관직과 땅을 주어 압록강 유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압록강 유역에서 신망을 얻은 위만은 준왕의 자리를 노리고 왕검성을 침입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앉았다.

 

 

 

위만은 여전히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이웃 나라를 정복해가며 더 큰 강국을 만들어 나갔다.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여러 나라와 물자를 교역하였다.

 

 

 

 

 

고조선 사회의 특징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귀족-평민-노비) 신분은 자손 대대로 세습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법, 범금팔조가 만들어져서 시행되었다.

 

 

 

주인이 죽으면 노비를 같이 산채로 무덤에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이웃나라인 부여도)

 

 

 

일반백성은 삼베옷, 귀족은 비단옷을 입었다.

 

 

 

 고조선의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즉위하였다. 우거왕은 북쪽 유목 민족인 흉노족과 동맹관계를 맺었는데, 한나라는 이를 못마땅

 

하게 여겼다.

 

 

 

고조선+ 흉노족 <----> 한나라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고조선이었지만, 지배층의 내부 분열과 배신으로 왕검성이 함락되었다.

 

 

  삼국시대

 

 

 

한나라가 고조선땅을 식민지화할 생각으로 한사군을 설치하였으나 고조선 주민들의 반대로 철회하게 되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고조선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터전을 잡고 그 곳에서 쇠 만드는 기술을 전파함으로써 고구려, , 신라 등 새로운 나라가 일어서는 기반이 되었다.

반응형

'공부하며 > 역사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_백제 총정리  (0) 2018.01.13
한국사_고구려 총정리  (0) 2017.12.19
한국사_선사시대 총정리  (0) 2017.11.30
한국사정리_ 조선의 찬란한 문화  (0) 2017.10.29
한국사정리_양반사회 조선  (0) 2017.10.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