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 인종의 외할아버지였던 이자겸은 자기의 두 딸을 다시 인종에게 시집을 보내어,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 되었습니다.

혼인을 통해 왕실과 겹겹이 밀접한 관계를 맺어 권세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 실제로 이자겸의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몰랐으며 막대한 부까지 누렸습니다.

 

● 이자겸에게 위협을 느낀 인종이 외척 세력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이자겸이 도리어 난을 일으켜  궁궐로 쳐들어오게 됩니다.

 

이자겸의 난을 도와준 장수 척준경과 이자겸 사이가 틀어지자, 이를 기회로 이자겸을 몰아내 유배시키고 후에는 척준경도 정지상에 의해 탄핵당하고 맙니다.

이로써 외척가문 경원 이씨 세력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대한 태도와, 쇠락한 개경의 운을 버리고 도읍을 옮기자는 의견에 대한

생각이 달라 두 파로 나뉘었습니다.

 

서경파 (정지상, 묘청 등)

  신진 관리

 금나라에 사대 반대, 금나라 정벌 주장

독자적 연호 사용을 주장

 개경의 기운이 다하였으니 서경으로 도읍을 이전할 것을 주장

개경파 (김부식 등)

  개경 문벌 귀족

 나라의 안위를 위해 사대 필요. 금나라 연호를 사용할 것을주장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이 고생하니, 서경으로 도읍 이전을 반대

 

 

● 인종은 처음에는 서경에서 새로이 시작해보고자 새 궁궐인 대화궁 공사도 시작했으나 여러번 궁궐이 벼락을 맞아 불타는 일을 겪고서는

서경 천도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 서경 천도가 무산이 되자 묘청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서경으로 가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인종에게 서경으로 와 황제에 오르기를 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한 토벌군이 정지상 등 묘청과 가까운 인물을 다 죽여버리고

서경을 포위, 반란군을 진압하게 됩니다.

 

● 이로써 김부식은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 묘청의 난이 실패한 이후 북방 영토에 대한 고려의 관심도 점차 수그러들었고,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란 생각도 점차 약화되어 갔습니다.

한편 신라의도읍이었던 경주 출신 김부식은 고려가 고구려 보다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계승한 나라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 생각을 반영해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 고려가 건국되기 전 300년 가까이 중국을 다스리던 당나라가 멸망하고, 거란이 이후 요나라를 건설합니다.

 

● 이에 맞서 한족이 세운 송나라도 세력을 넓히면서 요와 송이 건국초부터 대립 양상을 띄다가, 요나라가 망한 뒤에는

여진족의 금나라가 다시 송나라와 대치되는 형국을 이루었습니다.

 

●  중국대륙은 어느 대국에 의해 통일되지 못하고 크고 작은 여러 나라가 서로 대립하며 전쟁을 하는 때였기 때문에

고려는 오히려 중국의 영향을 덜 받고 비교적 자유로운 국제 무대 환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동아시아에서의 위상이 높아진 고려는 스스로를 황제의 나라라고 칭하는 등 그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국가적 행사였던 팔관회에서도 다른 나라의 관리, 상인들이 고려의 왕에게 인사를 올린 후 선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 고려는 벽란도를 중심으로 해서 바닷길을 통한 무역이 특히 활발했습니다.

 

● 송나라가 주요 무역상대국이었고, 그 뒤를 이어 여진족, 일본, 대식국(아라비아) 상인들과도 교류를 늘려갔습니다.

 

 

--------------------------------------------------------------------------------------------------------------------------------------------

 

 

● 고려는 건국초부터 친척의 나라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원수의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태조 왕건은 거란이 선물로 보낸 낙타를 만부교에서 굶어죽게 하고 사신을 유배 보내는 등

적대적이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 하지만 이때에는 거란이 여진족 토벌, 발해 부흥 운동 진압등 할일이 많아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다가

이후 요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나서는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한족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우면서 송과 고려가 우호적으로 지내자 위기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 거란이 소손녕을 보내 고려를 침략하고 항복을 요구해올 때 , 고려는 서희가 강화 회담에 나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 고려가 요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여진족 때문이니, 함께 여진족을 몰아내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하면

송과 관계를 끊고 요와 교류하겠다고 제안하자, 소손녕도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이로써 고려가 강동6주를 차지하게 됩니다.

 

● 한동안 평화로웠던 고려에 또 한번 혼란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어린 왕을 쫒아내고 새 왕을 세우려던 강조의 정변을 핑계삼아 문책한다는 명분으로 거란이 또다시 침입합니다. (ㄱㅓ란의 2차 침입)

하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 실제로는 군사적 요충지인 강동 6주를 빼앗기 위한 기회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 강동6주의 하나인 홍화진성의 양규장군 부대의 눈부신 활약에도 거란은 개경까지 내려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습니다.

 

● 고려는 현종이 직접 요에 조공한다는 조건을 걸어 전쟁을 종결시켰지만 , 전쟁 후 조공을 거절하여

요나라가 다시 침입해 옵니다. (거란의 3차 침입)

 

●  이 때 강감찬 장군이 고려의 지휘관이었는데 삼교천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거란군의 사기를 꺾어놓았습니다.

 그 뒤에도 거란군은 가는 곳마다 고려군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군사를 돌리게 됩니다.

 

퇴각하던 거란군은 귀주에서 다시 한번 강감찬 부대와 부딪혔고 이때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겨우 수천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  이 후 요나라는 더이상의 고려 침입을 포기하고 고려와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

 

● 고려는 요, 금나라와는 공식적인 거래인 조공과 하사품의 형식의 공무역을 주로 하였고,

송나라와는 정식 국교가 없을 때에도 끊임없이 상인들이 개별적으로 오고가며 거래하는 사무역이 이어졌습니다.

 

● 송나라는 중국 영대 왕조중 가장 융성한 문화와 문물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고려는 사신, 상인의 왕래를 통해 송의 앞선 문물을 들여오는데 괌심이 많았습니다.

 

●  종묘사직을 비롯하여 제사에 유교 사상을 따르는 제도를 받아들인 것도 바로 송을 통해서 였습니다.

 

여진족은 삼국시대에 말갈족이라고 불리웠던 부족으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었으나, 후에는 발해에 포함되었다가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여진족은 조선 시대에 가서는 야인 , 그리고 만주족이라고 불렸습니다.

 

●  고려와 여진족이 함경도에서 무력 충돌이 났을 때 고려가 크게 패하고 말았는데, 고려는 패전 이유가 기병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기병 중심의 별무반을 새로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몇 년 뒤 윤관의 지휘하에 별무반 군사가 여진족 정벌에 나서 여진족을 몰아낸 자리에 동북 9성을 쌓았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족은 집요하게 공격을 계속하면서 9성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조공을 약속 받고 고려는 9성에서 군대를 철수하게 됩니다.

 

● 1113년 여진족은 막강한 세력으로 커져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와 송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킨 후 100여년간 영화를 누리다가 몽골족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고려는 정리를 해도 이야기할 게 많이 나오네요 ^^

 

다음 포스팅에서도 고려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꿉꿉한 장마철에 몸과 마음.. 지배당하지 마시구요.

 

이런 날일 수록 더 파이팅하는 거 , 아시죠?^^

 

 

그럼 다음 시간에 뵐게요~ ♡

 

반응형
728x90
반응형

 

 

안녕하세요. 벨라입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영문법 카테고리로 포스팅을 작성하는 것 같아요.

 

요즘 영어보다 제가 한국사 공부에 빠져가지고.. 흑흑 죄송합니다 ㅜ_ㅜ

 

지난 시간에 명사에 관해서 간단하게 요약정리 해봤는데요. 오늘은 관사에 관해서 공부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지요 ^^

 

 

관사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A?

The?

 

네 맞아요.

 

엄밀하게 말해서 a, an 을 부정관사라고 이름 붙이구요.

the 를 정관사라고 부른답니다.

 

a cat 처럼 자음 발음 앞에서는 a 를 붙이고

an apple 처럼 모음 발음 앞에서는 an 을 붙인다는 거 중학교때 아마 배웠을거에요.

 

hour 이 h 로 시작하니 a hour 아니냐? 하면 안됩니다.

스펠링보고 결정하는 게 아니라, 발음으로 결정한다는 거! 기억하세요.

 

발음이 /auer/ 아우얼 , 모음으로 시작하니까 an hour 이 되야 되는 것이죠.

 

부정관사 a/ an

 

◆ 명사를 처음으로 말하는 경우

 

이야기 할 때 맨처음 사용하게 되는 명사에는 the 가 아닌 a 로 시작합니다.

I saw a dog. The dog was cute.

처음에 dog 를 언급할 때는 a 를 붙이고, 그 다음 언급할 때 부터는 이미 알고 있는 대상이니 the 를 붙이게 되는거에요.

◆ 셀 수 있는 명사라는 걸 의미한다.

 

셀 수 있는 명사는 절대 혼자 단독으로 쓰지 않아요. 반드시 a, the, 아님 소유격이라도 앞에 써야 하지요.

즉  cat 이라는 말은 없어요.

a cat 이거나 the cat 이거나 my cat 이거나 해야 된다는 거죠.

즉 부정관사가 붙었다는 건 셀 수 있는 명사를 언급한다는 걸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I signed a contract for the apartment.

굳이 나는 하나의 계약서에 사인했다라는 어색한 해석을 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아파트 계약서에 사인했다. 라고 해석하면 됩니다. contract가 셀 수 있는 명사이기 때문에 a 를 동반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 있는 그대로 '하나의'의 뜻이기도 하다.

Rome was not built in a day.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는 '하나의' 라는 뜻이 중요하게 해석되죠.

 

◆ 종족 전체를 뜻한다.

A dag is a faithful animal.

여기서는 개 한마리가 충성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개라는 모든 동물은 충성스러운 동물이다라는 뜻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처럼 종족 전체를 뜻하기도 하는데 그럴땐 A dog, The dog, dogs 중에 아무거나 써도 됩니다.

 

◆ 같은(the same) 의 뜻

We are all of an age.

우리는 모두 하나의 나이다? 해석이 이상하게 됩니다.

문장에 따라서 '같은'이라는 뜻을 가지는 a 가 있어요.

이 문장에서도 우리는 모두 같은 나이이다. 라고 해석이 되어집니다.

 

 

 

 

 

정관사  The 는 좀 더 활용폭이 넓습니다.

 

한번 알아볼까요?

 

◆ 앞에 나온 명사의 반복.

 

I saw a dog. The dog was cute.

 

앞에서 a dog 라고 언급한 녀석을 다시 언급할 때는 화자, 청자 모두 아는 대상이기 때문에 the dog 로 받습니다.

 

최상급 앞에서 쓰인다.

 

The only

the best

the youngest

처럼 유일, 최상급 앞에서는 정관사 the 를 붙인다는 거 기억해주세요.

 

유일한 것 앞에 쓰인다.

 

the moon, the universe, the sky, the sun  등 유일무이한 것 앞에도 the 를 사용합니다.

 

강, 바다, 산맥 등의 이름 앞에도 the 를 수반하고요. 열차, 배, 공공건물, 신문이나 잡지 등의 이름 앞에도 the 가 붙습니다.

 

이런건 일일이 외우려 들지 마시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심 돼요.

 

자주 보면 익혀지는 것이지, 억지로 외우려 들지 마세요 아셨죠? ^^

 

 

수식어구로 한정 될 때

 

The woman wearing glasses is my mother.

 

처음 언급하는 대상은 부정관사 a 를 붙인다고 했는데, 왜 여기서는 A woman 이 아닌 The woman 일까요?

 

뒤에 밑줄쳐진 wearing glasses 라는 구의 수식을 받는 대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어떤 한 여자가 아닌, 안경 쓴 여자라고 범위가 좁혀졌죠?

 

이렇게 어떤 절이나 구의 수식을 받아 범위가 한정 될 때는 The 라는 정관사를 붙이게 됩니다.

 

 

 

서수 앞에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 처럼 서수에도 the 를 붙여요.

 

 

 

 

 

 

이렇게 부정관사랑 정관사의 대표적인 쓰임새에 관해 배워봤어요.

 

이외에도 관사의 위치도 중요하게 알아둬야 합니다. 생각보다 원서를 읽거나, 시험 문제를 풀거나 하면 많이 등장하는 부분이

 

so 형 a 명

 

같은 관사 위치, 순서에 관한 거거든요.

 

so 다음에 형용사 , 그다음에 부정관사인 a, 그 다음 명사가 온다는 이야기에요.

 

비슷한 걸로

 

as 형 a 명

too 형 a 명

how 형 a 명

however 형 a  명

 

요런게 있어요.

 

too pretty a waman

how pretty a woman 처럼요.

순서가 있으니까 이 순서는 알아두셔야 해요.

 

 

 

such a 형 명

quite a 형 명

many a 형 명

what a 형 명

 

얘네들은 순서가 이렇게 되네요.

 

such a pretty girl

quite a strange story

처럼요.

 

 

정관사 같은 경우는 특히 원어민들이 이유없이 습관적으로 붙이기도 하고, 붙이지 않기도 하고

명사마다 달라요.

 

보통 나라는 일반적으로 무관사인데 the netherland 처럼 the 를 붙이기도 하거든요.

 

이처럼 정관사 붙이는 명사에는 규칙성이 없기 때문에 어떤 문장을 볼 때 마다 하나씩 알아나가는 재미로

 

편안하게 보시면 좋겠어요. 억지로 외우려들면 금방 지친답니다.

 

 

외우기에는 광범위한 부분이라, 제가 추천드릴 건 쇼크잉글리쉬의 영문법 쇼크 2권 148페이지에서 152페이지까지

스토리를 만들어서 외우는 데 도움을 주도록 잘 쓰여져 있더라구요. 도서관에서 빌리셔서 그 부분만 따로 참고해 보시면

도움이 되실거에요 ^^

 

 

벌써 금요일이네요~

 

씐나는 불금 되시고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

 

 

 

 

 

 

반응형
728x90
반응형

 

 

 

안녕하세요 벨라입니다.

 

저번 시간에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던 통일신라와 발해에 관해 배워봤어요.

 

오늘은 혼란한 남북국 시대를 대통합한 고려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약 정리한 거 여러번 읽어보는 사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역사의 숲을 보는 눈이 생기리라 확신합니다 ^^

 

출처: google

 

신라의 쇠락

 

○ 장보고가 죽은 이후 표면적으로는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 처럼 보였던 신라였지만, 실제로는 골품제로 인한 사회 모순이 깊어져 가던 시기였습니다.

 

○ 6두품 출신의 최치원도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한 인재였지만 골품제로 인해 정치의 핵심 인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 명문장가 강수, 승려 원효, 원효의 아들 설총 등도 6두품이었는데, 후삼국 시대부터는 많은 6두품 출신들이 신라에 등을 돌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지방에서는 귀족들이 사치생활을 하고, 세금을 과하게 걷는 등 횡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도 높아져가고 있었습니다.

 

○ 한편 골품제로 조정의 관리가 될 수 없었던 지방의 유능하고 학식있는 사람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모아 스스로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 정부에서 과도한 세금을 요구하자 몇 년 째 흉년에 힘들었던 농민들이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들불처럼 봉기를 넓혀나갔습니다.

 

○ 반란이 퍼지면서 지방 세력가들은 지역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이 지방 세력가들은 몇 개의 마을을 아우르며 세력을 넓히고 군사 조직도 갖추면서 '호족'이라는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했습니다.

 

○ 기훤이나 양길과 같은 사람이 호족 중 하나였는데, 궁예가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대접을 제대로 못받자 양길의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후삼국 시대의 시작

 

○ 신라의 장교 출신인 견훤은 가는 곳 마다 환영을 받아 짧은 시간안에 엄청난 추종자를 모았습니다.

 

○ 견훤은 완산주에 후백제를 세우고 국가 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 백제를 세운 뒤 쉴 새 없이 전쟁을 벌여 옛 백제 영토 대부분을 되찾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 신라의 승려였던 궁예는 농민 봉기로 나라가 혼란해지자 절을 떠나 기훤의 부하로 들어갔으나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자

양길의 수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 후에 철원을 차지한 궁예가 근방 호족을 평정하고 송악으로 도읍을 옮겨 주변 김포와 강화도까지 손에 넣는 등 세력을 떨쳤습니다.

 

○ 901년에 왕이 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천명하였습니다. (후고구려)

 

○ 궁예는 스스로 미륵이라고 칭하면서 백성들이 자신을 신성하게 보기를 바랐습니다.

 

 

 

 

○ 견훤과 궁예가 활발하게 영토를 넓히는 동안 신라의 영토는 경주 일대로 비참하게 쪼글어들었습니다.

 

 

 

 

 

후삼국 통일과 고려 건국

 

 

왕건이 아버지와 함께 궁예 밑으로 들어가 부하가 되었는데,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많은 영토를 빼앗아 오는 등 활약이 대단해서 궁예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왕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성품이 온화하여 많은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 한편 궁예는 점차 성품이 포악해져갔고 많은 사람을 모함해서 죽이는 등 살벌한 정치를 했습니다.

 

○ 궁예의 포악한 정치에 시달렸던 여러 장수들이 왕건을 설득하여 왕이 되기를 간청했다고 합니다.

 

○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습니다. 궁예는 산골에 숨어 있다 농민의 보리 이삭을 먹다 들켜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출처: Wi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90901003584&subctg1=&subctg2=kimedia Commons

 

왕건의 모습

 

 

○ 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한반도는 견훤과 왕권이라는 양대 산맥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 남은 신라땅을 차지 하기 위해 견훤이 신라로 군대를 보냈는데, 신라가 고려로 구원군을 요청하자 고려가 신라의 구원군으로 출병하게 됩니다.

 

○ 이로써 후백제와 고려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부딪히게 됩니다.

 

○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죽이고 왕경을 차지 하는 등 한동안 후백제쪽으로 기세가 기울었으나 930년 전세가 뒤집히게 됩니다.

 

○ 고창에서 충돌한 두나라 중 결국 고려군이 크게 이겼고, 주변의 100여개가 넘는 고을의 호족들이 고려로 자진 항복해 왔습니다.

 

○ 신라 왕의 초대를 받고 신라 왕경에 머물다 간 왕건은 신라 사람들에게까지 민심을 얻게 됩니다.

 

○ 한편 견훤은 자식들에 의해 금산사에 갇히는 꼴을 겪게 되고, 이에 격분한 견훤은 고려의 왕건에게로 도망쳤습니다.

 

○ 신라 왕 김부는 스스로 왕건에게 나라를 바칩니다. 이로써 화려했던 통일신라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 견훤은 왕건에게 후백제를 공격해달라고 계속 요청하였고, 실제로 후백제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맙니다.

 

○ 후백제가 멸망 한 후 견훤은 바로 병이 들어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합니다. (화병이 아니었을까요?)

 

○ 신라왕 김부가 스스로 고려에 나라를 넘겨 줄 때 태자가 울면서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살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집니다. (마의태자)

 

 

 

○ 태조 왕건이 즉위한 후 지방마다 사절을 보내 호족에게 선물을 주는 등 지방 호족들을 다독이는 데 힘썼습니다.

 

○ 충성하는 호족에게 왕씨 성을 주고, 혼인으로 얽히고 설킨 가족형태를 취해 반란을 예방하고 , 사심관 제도와 기인제도 등으로 호족 통합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 태조 왕건은 고구려를 잇는 나라임을 분명히 하고, 같은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유민들을 모두 받아들입니다.

 

○ 그리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게 강한 적개심을 가지면서 화친을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 후계자를 위한 당부의 말을 쓴 <훈요10조>를 직접 지었습니다.

 

 

 

간촉사 미륵불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46616429@N00/159254020/sizes/o/in/set-72157594153961797/

저자 the Chosun Bimbo (http://www.flickr.com/photos/46616429@N00/)

 

 

 

 

고려시대 이야기,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사실 부끄럽지만 한국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는데, 포스팅을 하면서 저도 공부하게 되니

 

새로운 눈이 생기는 기분이 들어요.

 

몰라서 재미없는거지, 알면 재미있다 던 옛 스승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

 

 

오늘 하루도 열공 즐공하시구요.

 

다음 시간에도 함께 한국사 공부 해보자구요~

 

See you soon~♡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공부의 왕도 -

 

 

 

안녕하세요~ 벨라입니다.

 

오늘은 공부하다가 지칠 때, 놀고 싶을 때, 마음이 콩밭으로 갔을 때 -

 

마음을 다지고 가다듬기에 좋은 책 한 권을 소개할 까 해요.

 

바로 공부하는 삶이라는 책입니다.

 

 

 

 저자 -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쥬

 역자 - 이재만

 출판사 - 유유

 

 

 

 

 

 

배우고 익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이라는 부제가 달린

 

그야말로 문맥 그대로 공부하는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클래식한 책이라고 생각되네요.

 

 

1920년에 지어진 책인데, 아직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는 책이니만큼

 

공부에 관한 정통서로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책입니다 ^^

 

 

 

오늘은 책의 앞부분 내용을 살짝 소개해 드릴게요.

 

모쪼록 와닿는 글귀가 되어,  공부하는 마음을 갖추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공부하는 삶이란 우리가 선택하는 삶이 아니라, 공부라는 소명을 받아들이는 삶이다.

공부를 위해 절제하고 신체를 돌보고 식사와 수면에 신경을 쓰고 일상 생활을 단순화하고, 사교 활동을 삼가고 내면의 고요를 유지하라 

지성인이란 지적인 일이라는 소명에 따라 신성한 일에 쓰이도록 선택받은 존재이다.  

공부하는 삶을 평생 걸어갈 의지를 가져라 

지성인은 게으름, 육욕, 자만, 시기심, 짜증 처럼 공부를 방해하는 악덕을 부단히 물리쳐야 하며, 야망이나 허영심 같은 이기적인 동기를 따를 것이 아니라 소명에 따라 참된 것과 선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 

야망은 진리를 자기 아래에 둠으로써 영원한 진리를 거스른다. 

고독을 활력을 불어넣지만, 고립은 우리를 무기력하고 메마르게 만든다. 

인격적 자질, 면학과 절제, 기도하는 정신, 신체 규율은 지성인의 4대 덕목이다. 

사유가 순수하려면 영혼이 순수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천 단계를 단단히 다지기 전에는 둘째 단계로 향하지 않는다. 

 훌륭한 신체에 고결한 영혼이 깃든다- 아리스토텔레스

공부하기 위해 매일 운동하라 .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사람은 반드시 아픈 시간이 있을 것이다.

식사에 신경을 써라. 손쉬운 방법으로 조리한 담백하고 가벼운 식사를 적당량 먹으면 자유롭게 기민하게 공부할 수 있다. 

영혼의 도구인 신체를 돌보는 것이 덕이요, 지혜이다. 

금욕은 공부에 꼭 필요하며 그 자체만으로 선명한 시야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일상을 단순하게 만들어라. 삶의 속도를 늦추어라. 

사교활동은 공부에 치명적이다. 과시욕과 방탕한 정신은 사유를 파멸시키는 적이다. 

공부와 공부를 돕는 환경 이외의 사소한 일을 하느라 돈과 집중력을 낭비하기 보다는 장서를 모으고 유익한 여행이나 평온한 휴가를 준비하고 영감을 되살리는 음악을 듣는 편이 훨씬 낫다. 

무익한 외출을 삼가라 

자만심이나 경쟁심 없이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기 위해 모인 친구들은 서로를 살찌운다.

 

 

 

 

 

 

 

 

옛날에 지어진 책이라 현대에는 적용하기 힘든 부분도 더러 있더군요.

 

예를 들어 남편이 공부하는 삶을 살 때 여자는 묵묵히 내조를 잘하라던가 뭐 그런거요 ㅎㅎㅎ

 

 

시대적으로 적용하기 맞지 않는 내용들은 알아서 스킵하시고

 

공부하려는 마음, 의욕을 되살리는 불씨가 될 만한 문구들을 찾아서

 

메모도 하고 필사도 하면서 읽어보세요.

 

 

공부 하기 싫다가도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자세도 갑자기 정비하게 되고

 

마음도 경건해지는게 , 공부 시작 전 워밍업으로 읽기 딱인 책이에요 ^^

 

 

자극되는 글귀가 너무 많은 책이라, 오늘 포스팅에는 다 담지 못했어요.

 

다음 포스팅에도 공부하는 삶에 나오는 자극 뿜뿜 글귀들 소개들로 만나요 ♡

 

 

See you soon ~

반응형
728x90
반응형

 

 

 

 

 

 

●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 

 

●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는 멸망한 후에도 당의 지배를 반대하며 부흥운동을 계속했다.

 

● 당나라와 사이가 틀어진 신라도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도왔고, 고구려 왕족 안승과 귀족 검모잠등이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 당나라 영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말갈족 걸사비우가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며 당나라와의 전투를 이어나갔지만

그 무렵 둘 다 죽고나서 이들의 운명은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에게 달리게 되었다.

 

●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흑수말갈 제외)을 이끌고 동모산으로 가 새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진이라고 했다.

 

● 대조영은 돌궐, 신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말갈족을 흡수하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아 나갔다.

 

● 713년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 719년 대조영이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 무왕은 흑수말갈을 공격하여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흑수말갈과 당나라와의 외교를 차단시켰다.

 

● 당나라가 발해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차례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 3대 문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당나라와의 관계가 친선관계로 바뀌었다.

 

● 문왕은 당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빌해의 제도를 정비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 당나라의 정치 제도를 본떠 3성 6부제의 중앙 통치 기구를 만들되 운영방식은 발해만의 독자적인 방식을 썼다.

 

● 발해의 국력이 커져가자 당나라도 발해 군왕에서 발해 국왕으로 위치를 한 단계 격상시켜 주었다. 문왕은 커져가는 국력을 발판 삼아 주변 나라들과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 제 10대 선왕은 북쪽으로 흑수말갈을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지방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그리고 남쪽 신라를 공격하여 대동강까지 진출하였다.

 

● 선왕 때 발해가 차지한 땅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때보다 두배 가까이 넓었다.

 

● 넓은 영토와 융성한 문화를 누리는 발해를 보고 당나라는 '동쪽의 가장 융성한 나라' 라는 뜻으로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 3대 문왕이후로 당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다보니 무덤 형식, 제도, 놀이, 물건 등 당나라 문화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 중앙의 문화가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지방에는 고구려, 당나라 문화가 아닌 말갈 문화가 보편적이었다.

 

● 중앙 문화와 지방의 말갈 문화가 서로 섞이지 못한 것은 이후 발해 쇠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10세기에 접어들면서 당나라, 통일신라 , 발해 세 나라 모두 쇠퇴의 길로 접어든 한편 서쪽의 거란족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 거란족을 통합한 야율아보기는 나라를 세우고 , 국경을 넘어와 발해땅을 자주 공격하여 발해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 통일신라는 후고구려 후백제 등 나라가 셋으로 갈라져 서로 맞서 싸우는 터라 발해를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 거란에 무너진 발해는 이후에 오랫동안 부흥운동이 일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 934년 발해 왕자 대광현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 고려로의 망명이 계속 이어져 많은 발해 사람들이 고려로 망명해 살게 되었다.

 

● 같은 고구려 후손이라는 생각으로 고려 사람들은 발해사람들을 환영했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공공의 적으로 생각했다.

 

● 고려 왕건은 거란이 보낸 낙타를 만부교 밑에서 굶어죽게 하는 등 거란과의 화친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늘은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열었던 주역인 발해에 관해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는 한국사 정리 포스팅이 되었길 바라면서

 

마무리할게요 ^^

 

 

 

열공, 즐공하시고 다음 시간에도 더욱 유익한 공부 자료들로 만나도록 합시다.

 

See you soon ★

반응형
728x90
반응형

 

안녕하세요 벨라입니다 ^^

 

오늘은 공부 이야기에서 약간 벗어난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엄연히 공부블로그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는 제 블로그에 마땅한 카테고리를 찾지 못해서

 

공부의 왕도라는 카테고리에 넣어서 포스팅하는 점 양해 부탁드려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전 전직 영어강사이구요.

 

지금은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영어원서를 읽고 공부를 하면서

 

영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여자사람이에요.

 

그리고 한국사나 중국어 등 다른 관심분야도 조금씩 공부를 하고 있답니다.

 

 

가끔 인터넷에서 마주치는 분들중에서 이런 분들이 계세요.

 

영어공부 하는 이유가 이민 가려고.

 

 

이 지긋지긋한 헬조선에서는 도무지 답이 안나오는 것 같고

 

내 새끼한테도 이런 땅에서 힘들게 공부시키는 것 미안하고

 

그래서 물 좋고 공기 좋은 다른 나라로 가서 살려고 영어공부한다고.

 

 

그런 분들 , 주변에서도 많이 보시죠?

 

 

전 그런 말들 보면 좀 화가 나요.

 

물론 각자의 생각이 있고 삶이 있고 선택이 있으니 옳다그르다 단정할 수 없지만, 제 생각은 그래요.

 

 

※ 헬조선에서는 답이 없다???

 

영자신문으로 해외소식 한번씩 보는 분이신지 되묻고 싶어요.

 

사람 사는 세상 어딜가나 비슷비슷합니다.

 

어딜가나 돌i 있구요. 부정부패 정치인 있고 비리 있고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범죄 있고요.

 

다 그래요.

 

 

정치판,  투데이 이슈판 보면서 한숨 푹푹 쉬면서 정치 썩어빠졌다고, 이 나라는 글렀다면서

나라를 뜨겠다며 큰 소리 떵떵치시는 분들.

 

다 큰 성인이 될 때까지 대한민국의 보호를 받고 안전하게 살아왔잖아요.

 

자국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로 이 땅에서 외노자처럼 불공평한 대접 받지 않고

살아왔잖아요.

 

그럼 고마운 줄 알아야죠.

 

정치 썩었고 세상이 요지경이면 여지껏 날 보호해준 국가인데, 먼지처럼 작고 미약한 힘이지만

 

보탬이 되어서 나라를 바로 세우는데 돕도록 머리를 써야지,

 

단물은 쪽쪽 다 빨아먹고 이제 필요없으니 해외로 뜨겠다?

 

이 무슨 도둑놈 심보인지 모르겠네요.

 

 

단순히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어서라던가, 이국적인 매력에 빠졌다던가, 글로벌하게 살고 싶다던가 다른 이유로 이민을 선택한다면

 

전 전혀 비난하고 싶지 않아요.

 

근데 정치 타령, 세상 타령하면서 이민 가겠다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는 분들은

 

진짜 이기적인 사람으로밖에 안보여요.

 

문제를 인식했으면 고칠 생각을 해야지 내뺄 생각을 합니까? 이나라가 해준 게 없다고요?

 

국적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보호 받고 살아온겁니다.

 

 

 

 

 

※ 한국은 경쟁이 너무 심해서 애가 불쌍하다. 그래서 이민간다?

 

 

한국인은 유전자에 이미 근성이라는 게 새겨진 국민같다고 전 생각해요.

 

 이 코딱지만한 나라가 단기간에 초고속 성장을 이뤄낸 원동력이 바로 국민성에 있다고 봐요.

 

지금 한국의 교육열, 사실 비정상적이죠. 저도 인정해요.

 

과도한 교육열, 비정상적인 사교육시장의 비대함 이런것들은 반드시 고쳐져야할 부분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어찌 생각해보면요.

 

이런 극심한 경쟁구도에서도 결국 스카이 갈 아이들은 있잖아요.

 

그 경쟁에서 당당히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친구들이 분명 많이 존재합니다.

 

내 아이가 정말 공부에 뜻이 없어서 다른 예체능이나 기술 분야의 재능을 살려주기 위해

 

해외의 교육 도움을 받겠다고 떠나는 건 저도 환영해요.

 

근데 아이의 다른 재능을 발견하지도 않고, 그냥 수능 좀 피하고 싶고

 

해외 나가면 더 쉽게 놀면서 공부하다 대학갈 수 있을것 같아서라는 안일한 사고 방식으로

 

떠나는 거라면, 과연 그게 아이를 위한 것인가 반문하고 싶네요.

 

 

애가 실패할 까봐 겁이 나서 아예 도전조차 막아버리는 부모님들.

 

왜 애 멘탈을 갈고 닦을 기회를 안주고 묵살시켜버리나요?

 

그리고 비행기 타고 훌쩍 떠나면 영화에서나 보는 것처럼 자유로운 토론 수업이 끝나고

 

방과후에 멋지게 운동하면서 지내다가 아이비리그 갈 것 같은가요?

 

 

주변에 미국에 사는 지인 있으시면 한번 물어보세요.

 

우리나라 명문대처럼, 미국 명문대 가려면요.

 

빡세요.

 

엄청 빡세요.

 

우리보다 더 전인적 교육을 중시하기 때문에 지덕체 골고루 다 잘해야 해요.

 

그래서 부유한 동네에는 극성스런 싸커맘들이 그리 많은거죠.

 

한국의 치열한 교육 경쟁에서 본인 스스로 멘탈을 닦아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친구들은

 

해외 가서도 잘해요.

 

어느정도 시행착오는 겪을 수 있겠죠. 하지만 멘탈 내공이 있어서 잘 이겨냅니다.

 

근데 한국의 교육 경쟁에서 발 담궈서 치열하게 한번 승부 걸어보자!!! 도전조차 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아이들은 세계 어딜 가나 그 버릇 못 고칩니다.

 

 

 

그리고 앞에 얘기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인데,

 

교육 과정이 잘못되었다, 문제가 많다고 인식했으면

 

교육청에도 건의하고, 학부모 서명 운동을 하고, 인터넷에서 자기 의견 올려서 다수의 공감을 얻고

 

본인이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서 좀 더 나은 교육환경을 가진 대한민국을 만들도록 함께 노력해야지

 

그냥 훌쩍 나가버리면 어쩌자는 거냐구요

 

 

까페에서 '우리 애 00 오니까 표정도 밝아지고, 아이가 건강해졌다. 한국의 그지같은 교육에

 

아이 시달리게 안해서 정말 잘한 결정같다.' 이러면서

 

글 올리시는 분들, 딱 자기만 알고 자기 인생 말고 주변은 돌아보지 않는 그릇의 사람이라고

 

저는 느껴져요.

 

 

영어강사인 제가 한국사를 공부하고 따로 카테고리까지 만들어서

 

포스팅하는 이유는요.

 

영어 공부 하면 할수록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야 함을 느껴요.

 

원어민 입장에선 우리가 아무리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한들

 

영어 잘하는 외국인일 뿐이에요.

 

딱 봐도 외국인인데, 미국인 사고 방식을 어거지로 흉내낸다면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죠.

 

한국인으로서의 당당함, 카리스마, 자부심이 있을 때

 

본인이 구사하는 훌륭한 영어가 더 값진 가치가 되어 돌아옵니다.

 

 

 

 

헬조선 헬조선 거리면서 본인 조국에 스스로 흠집을 내지 마시고

 

제발 올바르고 건강한 국가관을 가지고

 

내가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큰 그릇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제목에서부터 아무말대잔치라고 썼듯이

 

뭐 이런저런 얘기를 흥분해서 주저리 주저리 읊어봤네요.

 

 

 

부디 공부하는 학생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요즘 유행하는 헬조선 피해자 코스프레 놀이에 동참하지 않고

 

본인의 성장과 더불어, 함께 하는 성장을 고민하는

 

멋진 어른이 되길 바랍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반응형
728x90
반응형

 

 

★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하고 어진 애민 정치를 하였다.

 

★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도 만파식적( 온갖 풍파를 잠재우는 피리)을 나라의 보배로 삼고 평화로운 정치를 펼치고자 했다.

 

★ 신문왕의 장인 김흠돌이 난을 일으켰다. 신문왕은 김흠돌을 비롯하여 왕의 권위에 반발하는 세력을 단호하게 억누르면서 유교 사상으로 충성스러운 신하를 기르고자 국학을 설치하였다.

 

★ 신문왕 때 관리에게 관료전이라는 토지를 나누어 주었고 관직이 높은 귀족에게는 녹읍을 주었다.

관료전은 그 땅에서 나는 수확물의 일부를 가질 수 있었고, 녹읍은 수확물 뿐 아니라 그 땅에 사는 농민들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 나라의 행정구역은 9주 5소경, 군대는 9서당 10정으로 구성되었다.

 

★698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발해를 세우면서 신라가 발해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자, 원수 지간이었던 당나라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당나라, 발해, 일본과 활발한 국제교류를 하게 되었다.

 

★ 신라 승려 혜초는 서역땅(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파키스탄 등)까지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기기도 하였다.

 

 

 

★ 신라의 골품제가 통일신라에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원래 왕족인 성골은 진덕여왕을 끝으로 사라지고 무열왕부터 진골 출신이 왕위에 올랐다.

 

★ 골품에 따라 벼슬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 왕경에는 귀족들 대부분이 모여살았기 때문에 금으로 장식한 금입택 등 호화로운 집들이 많았다.

 

★ 왕경에는 사치를 부리는 귀족들과 너무나 가난하게 사는 평민들이 있어서 극심한 빈부격차가 존재했다.

 

 

 

 

★ 왕족과 귀족만이 누렸던 불교가 통일 이후 일반 백성에게까지 널리 퍼져나갔다.

 

★ 6두품 출신의 승려 원효는 진리는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아가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 진골출신의 의상은 당나라에서 화엄 사상(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부처 앞에서 평등하다) 을 공부하고 돌아와 여러 절을 지으며 제자 양성에 힘썼다.

 

★ 찬란한 불교유산 :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

 

 

 

★ 신문왕 이후 100여 년간 평화롭고 안정된 시절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742년 경덕왕이 왕위에 오른 후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경덕왕이 죽고 어린 아들 혜공왕이 즉위하자 왕권이 약해지고 반란도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 혜공왕과 왕비가 살해된 이후 왕위를 놓고 끊임없는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 김헌창의 난을 계기로 지방에서도 점차 본인의 세력을 키우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 지방 실력자 중 한명이 장보고 였는데, 당나라 해적을 단속하기 위해 설치된 청해진에 장보고가 투입되어 해적을 소탕하고 바다 무역을 주도하였다.

 

★ 장보고는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염장이라는 사람에 의해 살해당했다.

 

 

 

 

 

 

 

 

으음..

 

통일신라 시대에 대해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셨나요?

 

한국사를 공부하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정리포스팅이었길 바랍니다 ^^

 

다음시간에는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열었던 발해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죠.

 

그럼 다음시간에 뵐게요 ♡

 

반응형
728x90
반응형

 

 

○ 백제와 신라가 함께 손을 잡고 쇠약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나눠 가졌는데, 이 후 신라가 배신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땅을 모조리 빼앗아 가자, 백제는 신라를 원수의 나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 백제의 의자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차례로 신라땅을 차지해 나갔다.

 

○ 성공을 거듭한 의자왕은 점차 거만해져갔고 정치와 군사 훈련에 소홀해져갔는데, 신라는 이 틈을 타 역공할 방법을 모색했다.

 

○ 신라에 선덕여왕, 진덕여왕이 재위하는 동안에도 실제 권력자는 김춘추였다.

 

○ 김춘추는 고구려 연개소문을 찾아가 외교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에 당나라로 찾아가 당태종과 군사 동맹을 맺게 되었다.(나당동맹)

 

○ 한편 고구려는 끊임없는 당나라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군사 사기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

 

○ 신라의 진덕여왕이 죽고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이 되었다.

 

○ 무열왕(김춘추)은 백제 공격을 시작으로 삼국 통일 전쟁의 첫걸음을 내딛였다.

 

○ 김춘추의 사위이자 처형인 김유신이 삼국통일 전쟁을 지휘했다.

 

○ 당나라 소정방,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 이 때 백제 계백장군의 황산벌 전투가 벌어졌다. (계백 <-> 신라 관창)

 

○ 고구려 연개소문의 세 아들의 권력다툼으로 고구려도 나당연합군에 지고 말았다.

 

 

 

▽▼

 

○ 고구려, 백제를 정복한 후 당나라는 백제 땅을 지배하려는 야욕으로 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 젊은이들을 죽이는 등

극심한 횡포를 부렸다.

 

○ 백제의 장군이었던 흑치상지가 부흥군을 모집하고 부흥활동을 벌였으나 내부 분열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이후 당나라 장군이 되어 백제 부흥군 진압에 나서게 되었다.

 

○ 고구려에도 검모잠의 활약으로 부흥운동이 커져가고 있었으나, 고구려 귀족 안승의 손에 죽고 말았다.

 

○ 검모잠을 죽인 안승이 신라에 항복하고, 신라는 보덕국이라는 허울뿐인 나라를 세워 안승을 왕으로 세웠다.

 

○ 통일 전쟁 와중에 신라 태종 무열왕과 당 태종이 서거하였다. 당나라를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는 등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냈다.

 

○ 무열왕에 이어 왕이된 문무왕은 백제 땅에 남아 있는 당군을 모조리 몰아내고 당군과의 싸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당군과의 매소성, 기벌포 싸움에서 신라가 승리하여 비로소 삼국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 전쟁이 끝나고 문무왕은 평화 시대에 걸맞는 부드러운 정치, 애민 정치를 폈다.

 

 

 

 

 

 

 

도움이 좀 되었나요?

 

 

오늘은 통일신라가 되기까지 치열하게 벌어졌던 삼국 전쟁을 다루어보았습니다.

 

부끄럽지만 한국사 지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아는게 없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하나 둘 알게 되니

 

어릴때와는 달리 알게 되는 즐거움이 아주 쏠쏠하네요 ^^

 

이런 마음으로 공부했더라면 ...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가 이 공부블로그에 여러 학습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요약정리하면서 운영하고 있는데요.

 

대부분, 읽고 있는 책을 요약 정리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포스팅을 한답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었길 바라요 ♡

 

 

그럼 다음 시간에 뵈요!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