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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1Q84 를 읽고 있는 중입니다.

 

 

 

 

자기 계발서를 무척 좋아하는 편이라서

 

몇 년간 읽어온 한글책이라고 해봤자 모두 자기계발서라는 장르로 모아지네요.

 

 

 

 

이런 제가 소설로 오랜만에 집어든 책이 1Q84 입니다.

 

역시 하루키라는 명성답게 책 초반부터 흡입력이 대단한 작품입니다.

 

사실 읽고 있는 영어책이 있어서, 그걸 위주로 리딩을 하다보니

 

정말 틈틈히 아주 쬐끔씩 읽어나가고 있긴 한데요.

 

아.. 이젠 한글 소설책에 좀 많이 빠져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하지도 못하면서 영어책만 주구장창 읽어내리고 있으니

 

정작 모국어인 한국어 실력이 도태된 느낌이 듭니다.

 

 

말을 할때도 적절한 어휘가 생각이 안나서 어버버버-

 

내용도 조리있게 말하지 못하고 버버버벅-

 

너무 한글책을 안읽어서 이지경이 되었나 자괴감이 드는거 있죠.

 

 

1Q84같은 소설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알쓸신잡에 나오는 출연진들처럼 다방면에서 유창하게 자기 생각을 어필할 수 있는 그런 화술을 익히고 싶어요.

 

그러려면 말하기 연습도 연습이지만

 

일단 아는게 많아야겠다는. ㅋㅋ

 

 

 

초등학생때는 말로 지지 않을 정도로 말빨이 끝내줬던 기억이 있는데

 

나이 다 먹고 왜 이렇게 말을 잘 못하는 걸까요?

 

 

하루키의 세련된 문체를 보고 있자니 저의 언어적 문제가 무척이나 민감하게 드러나는 밤이네요.

 

이 속도로 읽다간 올 상반기 안에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좀 더 부지런히 달려보겠습니다.

 

 

한글 작품도 좀 많이 접해서 한글책 관련 카테고리도 하나 만들어야겠단 생각도 해봅니다.

 

 

 

 

 

독서로 채워지는 편안한 밤 되세요 ^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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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명은 황허 강 유역에서 나타난 황허 문명과 양쯔 강 유역에서 나타난 양쯔 강 문명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일찍부터 공동체 정신이 자리잡고 있어서 개인의 자유가 없었고 합리적인 법률도 존재하지 않았다. 권위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었다.

 

 

헤겔은 고대 중국 사회에는 자유가 없기 때문에 내면의 정신이 발전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헤겔은 동양, 즉 중국이 소년기 또는 유아기라고 평가했다.

 

 

헤겔은 인도를 공상의 나라라고 했다.

 

 

현실보다 꿈 같은 세계를 추구하다 보니 다양한 자연과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게 됐고, 이들이 각각 신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인도에는 유독 신이 많다. 먹거리가 풍부하고 외적 침입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 걱정할 일이 적으니 자연스레 공상에 빠졌다.

 

 

 

헤겔은 인도에는 국가의 존재 원리인 자유가 전혀 없으므로 민족은 있어도 국가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인의 자립성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보다 정치적으로 발전했다고 평했다.

 

 

 

인도의 세습적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는 1955년 폐지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큰 사회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

 

 

인도는 이러한 카스트 제도로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 한계가 있었고 헤겔은 이러한 한계 때문에 인도에는 국가가 생겨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인도를 세계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카스트에 4가지 계급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에 속하지 못하는 최하층 계급인 불가촉천민은 달리트라 불리는데, 힌두교에서 더럽고 천한 일이라 여기는 직업만 가질 수 있었다.

 

 

페르시아는 오늘의 중동 지역에 있는 고대 국가로 군사, 정치, 경제,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제국으로 불릴 만한 위상을 자랑했다.

 

 

특히 다리우스 1세 시대에 최전성기를 맞이했으나 그리스 원정 실패와 내부 분열로 쇠퇴했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헤겔은 이곳을 가리켜 세계사가 진정으로 시작된 곳이라고 말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성이 있을 뿐 아니라 개인의 자유가 존재하는 곳이어서 헤겔의 세계사적 정신에 부합하는 곳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을 이루는 주 민족인 젠드 족은 조로아스터교(페르시아 철학자 자라투스타라가 만든 종교)를 믿었는데 그 교리에 따라 정신과 육체를 깨끗이함을 물론, 생물을 보호하며 나무를 심는데 힘썼다.

 

 

여러 나라를 통일하여 세운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는 각 민족의 언어와 종교를 인정해주었다. 덕분에 제국의 조화를 유지하는 선에서 독립적인 문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을 구성했던 한 민족인 이집트는 자연에 정신이 지배당하는 원시 종교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의 영혼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다라는 인식(미라 제작)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두고 헤겔은 이집트는 독립하고픈 충동을 느끼지만, 자신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청년에는 이르지 못한 소년과 같다.” 라고 말했다.

 

 

페르시아의 바통을 이어받은 그리스는 자연에서 벗어나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스 이전의 이집트 스핑크스는 반인반수 형태로 자연과 인간이 섞여있었으나 인간을 주목하는 그리스에서는 주로 사람을 소재로 조각상을 만들었다. (세계사의 청년기)

 

 

미술 뿐 아니라 연극, 노래, 춤 등 인간의 몸을 이용해서 정신을 표현하는 활동이 발달했다.

 

 

즉 인간 중심의 사상을 꽃피우고 그에 맞춰 자유 의식도 뚜렷해졌다. 아고라에 모여 토론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것처럼 민주 정치를 행했다.

 

 

그러나 완벽한 민주 형태는 아니어서 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신탁 정치를 했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이후 페르시아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등 전쟁의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식민지를 많이 만들면서 노예가 생겨났고 노예를 희생시켜 자유를 얻었다. 일 대신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더 많은 자유를 원하게 되었고, 소피스트(아테네의 자유민으로 변론술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궤변이 번지면서 혼란이 가중되어 갔다.

 

 

 

결국 개인의 자유가 국가의 법률마저 위협하게 되었고, 도덕성이 타락하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스의 뒤를 이어 서방 세계의 주인공이 된 로마는 유럽부터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지중해 패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가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는데 한니발 전쟁이라 불리는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한니발군을 격파하고 3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켜 완전히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해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로마는 그리스와 달리 개인이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했고 개인의 정신이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도덕과 분리된 개념의 엄격한 법이 탄생하여 전체를 다스릴 수 있었다.

 

 

헤겔은 로마의 자유의식이 그리스보다 낫다고 평하면서 장년기로 비유했다.

 

 

그리스는 반성 없는 자유였던 반면, 로마는 국가와 정치를 개인 위에 두어 철저히 복종하게 만들었음에도 내면으로는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즉 외부의 엄격한 규율과 추상적인 내면의 자유가 서로 부딪히지 않고 공존했다.

 

 

사람들의 정신이 발달하니 종교 역시 내용과 정신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크리스트교가 로마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크리스트교는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로마 국교로 인정받았다.

 

 

게르만족이 로마의 지배를 받은 이후 로마를 무너뜨리고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프랑크왕국은 로마 교회와 연합해서 크리스트교적인 사회를 만들었다. 프랑크 국왕인 사를마뉴 대제가 죽은 후 곧 프랑크왕국은 멸망했고 더 이상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지 못하자 지방 권력자들을 중심으로 영주, 농민간의 봉건제도가 성립하게 되었다.

 

 

이와중에 크리스트교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 교회는 세속의 일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

 

중세 봉건 사회가 되면서 순결, 빈곤, 복종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유흥, 결혼등을 나쁘게 생각했다.

 

또한 신에 대한 복종이 최고의 가치였기 때문에 정의나 법률이 무시당하고 타락, 배신 비도덕이 만연하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 가톨릭 권력이 약해졌으며 이는 곧 봉건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또 이슬람과의 접촉으로 문화. 예술, 학문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서양인은 신, 종교가 아닌 정신적으로 자립한 인간을 추구하게 되었고 주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이후에 등장한 군주제에서는 이전의 봉건제와는 달리 주는 있되, ‘에 해당하는 개념이 사라지고 더 자유로워졌다.

 

 

 

헤겔은 역사 철학 강의에서 독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새 시대를 연 군주라고 평가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통치에 반대하고 볼테르의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같은 선진국으로 만들려는 꿈이 있었다.

 

즉위 후 예술 문화 부흥에 힘쓴 반면 아버지의 군국주의를 이어받아 강대국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등 군사력을 전 유럽에 떨쳤다.

 

 

 

프랑스 혁명 후 자유주의가 자리잡았으나, 이로 인해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이 커서 자유주의가 이를 뛰어 넘지 못하고 결국 몰락했으며 몇몇 국가는 이전 모습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기 위한 여정에는 이러한 성장통이 동반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항상 자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만들어왔다.

 

 

 

헤겔이 바라본 세계사의 한계

 

- 유럽 위주의 시선을 가지고 세계사를 바라보았으며 동양사회를 매우 낮게 평가했다.

 

- 중국 고대 전제 왕권 시대만 보고 중국 역사 전체를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동양 역사나 문화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

 

- 역사를 절대정신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독재자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히틀러나 일본의 제국주의는 헤겔의 철학에 기반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 철학의 핵심인 인정사상은 노예제 해체를 뒷받침 하는 근거가 되며,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로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상적 근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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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책 유럽의 성립과 발전 요약정리  (0) 20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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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_삼국시대, 삼국의 외교

 

 

<<삼국과 동아시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나라의 기틀을 갖춰갈 때 중국은 516국 시대로 혼란의 시대였다.

 

고구려는 이 나라중 전진과, 백제는 동진과 교류하면서 불교를 들여왔다.

 

 

 

백제가 받아들인 불교는 다시 왜로 전해졌다. 백제는 불교뿐 아니라 한문학, 도자기, 무기 제작 기술등도 왜에 알려주었

 

.

 

 

 

중국의 516국 시대가 끝나고 북쪽은 북위, 남쪽은 송나라가 세워졌는데

 

고구려는 북위와, 백제는 송나라와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신라가 뒤늦게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갈 때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고 수나라와 국경을 접한 고구려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가 돌궐과 동맹을 맺게 되고, 신라 백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와 동맹을 맺는다.

 

 

 

신라와 적대관계였던 백제가 고구려에 힘을 실어줌과 동시에 왜를 끌어들였다

 

 

 

 

돌궐+고구려+백제+<--------------------> 수나라+신라

 

 

 

 

중국과 책봉, 조공의 절차를 거쳐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구려가 직접 서역과 무역을 하려고 하자, 고구려와 서역간의 중개 무역으로 이익을 챙겼던 당나라와의 사이가 멀어지

 

게 되었다.

 

 

 

수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당태종은 고구려를 정복시키겠다는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고구려는 동맹국을 찾

 

아나서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고구려는 서역의 나라인 돌궐과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 하였다.

 

 

 

고구려는 서역뿐 아니라 유럽의 로마와도 문물 교류를 하였고, 이러한 다양한 문물은 백제나 신라에까지 전해졌다.

 

 

한강 유역을 먼저 차지했었던 백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항해 기술이 특히 뛰어났다. 그래서 배를 타고 해외로 나가 교류

 

를 했고, 특히 왜와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그래서 일본에는 지금도 백제와 관련된 마을 이름이나 유물이 많이 남아있

 

.

 

 

 

고구려 승려 혜자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백제의 오경박사 왕인도 왜의 사신으로 가서 태자와 신하들을 가르쳤다.

 

 

 

고구려 승려 담징은 왜의 호류사에 금당벽화를 남겼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말이 같고 풍습이 비슷했지만, 세력 다툼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고구려+ 신라 vs 백제 :

 

고구려 백제가 세력 다툼을 할 때 신라는 새로운 문물을 고구려를 통해 접했고, 고구려는 신라를 보살펴야 할 나라로 생각했다.

 

고구려 vs 신라 + 벡제 :

 

고구려가 신라를 신하국처럼 대하고 내정에 간섭하자, 신라는 차츰 백제와 교류를 시작했다. 고구려가 이에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백제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고구려 vs 신라 vs 백제 :

 

동맹을 맺은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아 한강 상류는 신라가, 한강 하류는 백제가 차지하게 되었다. 신라는 곧 동맹국이었던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일대의 땅까지 빼앗아버렸다.

 

고구려 + 백제 vs 신라 :

 

한강을 차지한 신라가 당나라와 마음껏 교류하고 세력을 확장하자, 고구려와 백제가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하기도 하였.

 

 

 

블로그 정비 과정중에 삭제된 한국사 포스팅을 다시 게재하는 바람에

 

연대순으로 정리되지 못하고 뒤죽박죽 되어버렸네요 ㅜㅜ

 

조선시대까지 정리된 포스팅이 이미 있기 때문에

 

다음 포스팅부터는 조선시대 이후부터 정리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공부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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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_ 철의 나라 가야연맹

 

 

가야 연맹의 탄생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세워질 무렵 남동부 지방에 가야 연맹이 생겨났다.

 

 

 

기원전 108, 한나라 공격으로 고조선이 망하고, 고조선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해 오면서 변한 지역으로 많이 몰려왔

 

.

 

 

 

고조선 사람들은 변한 지역 사람들에게 쇠 만드는 기술을 전해주어 변한 지역은 철 기술이 눈에 띄게 발달하게 되었다.

 

 

 

금관가야가 변한의 철 무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중국과 왜를 연결하는 해상무역을 이끌었다. 그러면서 연맹전체가 금

 

관가야의 원래 이름(구야국)을 따라 가야로 불리게 되었다.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낙동강을 가지고 있는 금관가야를 반드시 거쳐야 외국과의 교류가 가능했으므

 

, 금관가야의 지위가 점차 높아져갔고, 다른 가야 지역보다 먼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 연맹 중에는 강력한 왕권이 없었기 때문에 각 나라 왕이 자기 나라를 다스리는 연맹 형태의 국

 

가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금관 가야의 발전과 쇠퇴

 

 

 

 

금관가야는 무역 중개로, 철의 수출로 부귀를 누렸다.

 

 

 

300년대에 들어와 금관가야가 무역을 독차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8 나라가 금관가야에 반기를 들었다.

 

 

 

때마침 고구려 미천왕이 한반도에서 낙랑군과 대방군등 중국 세력을 몰아내자, 무역으로 이득을 얻었던 금관가야는 큰

 

타격을 입었다.

 

 

 

금관가야에 불만을 품었던 8 나라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금관가야를 공격하였으나, 금관가야가 신라에 도움을 청하

 

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사건으로 금관가야의 지위가 추락하였고, 신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 후 마한의 여러 나라를 통합한 백제가 들어서고, 중국과 왜의 무역을 연결하는 새로운 교역 중심지가 되었다. 가야의

 

여러 나라가 백제 편으로 넘어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교역하고는 했는데, 금관가야도 하는 수 없이 대세를 따를 수 밖에 없

 

었다. 이러한 이유로 백제와 친한 왜가 신라를 공격하도록 길을 터주었고, 신라는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러 와 신라 땅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달아나는 왜군을 따라 금관가야 지역까지 밀어

 

닥치다보니 금관가야의 땅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가야 연맹은 깨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서는 가야

 

 

 

고구려의 공격 때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인 고령일대에 자리 잡았던 대가야는 농사를 지으며 서서히 나라의 힘을

 

키워갔다.

 

 

 

철제 기술자들까지 대가야로 모여들자 비옥한 땅, 철기 기술까지 얻게 되어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주변나라를 끌어

 

들여 가야 연맹을 다시 만들었다.

 

 

 

500년 무렵 안정을 찾은 백제와 신라가 가야땅을 넘보기 시작하였다.

 

 

 

백제 무령왕이 가야를 공격하여 땅을 빼앗아가자 대가야의 이뇌왕은 신라의 법흥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백제를 견제하고

 

자 했다.

 

 

 

하지만 신라에는 다른 속셈이 있었으므로 529년 가야지역을 공격하였고 가야연맹은 신라, 백제의 공격을 받아 쇠퇴해

 

갔다.

 

 

 

532년 신라의 공격으로 금관가야가 멸망하였다.

 

 

 

554년 백제와 신라간의 싸움에서, 남은 가야 연맹은 백제의 편에서 싸움에 가세하였는데, 신라가 이김으로써 백제뿐

 

아니라 가야연맹도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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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벨라입니다.

 

오랜만에 추천원서 소개글로 찾아뵙는것 같아요.

 

꾸준히 책을 읽고 있긴 한데, 속도가 영 붙질 않아서 완독권수가 그리 많지 않네요.

 

 

오늘은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

 

루이스 쌔커의 Small Steps 를 언급할까 합니다.

 

 

루이스 쌔커의 뉴베리 수상작 Holes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죠.

 

그러고보니 Holes 를 추천하는 포스팅도 조만간 써야겠군요..

 

 

루이스 쌔커님은 문체에 과한 힘을 주지 않아요.

 

스토리 배경부터 캐릭터까지 억지스럽게 힘을 꽉! 주고 그려냈다라는 느낌이 전혀 없고

 

정말 편안하고 담담한 필체로 작품을 쓰시는 분이에요.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느슨하게 힘을 풀고 쓴 듯한 작품이 놀라울 정도로 독자들을 흡입한다는 거에요.

 

 

별 거 없이 정말이지 말 그대로 ' 구덩이 '하나만으로 사람을 몰입하게 하는 힘.

 

아무 작가나 가지지 못하는 재능이에요.

 

 

Small Steps 는 구덩이의 후속편인데요.

 

Armpit 이라는 흑인 남자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이 아이가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백인 여자아이 지니, 그리고 아이돌 여가수를 만나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에요.

 

 

Small steps를 읽는 내내 Armpit 의 친구 X-Ray 가 사고 칠까봐 조마조마..

 

Armpit 이 곤경에 처할까봐 조마조마 ..

 

계속 걱정에 걱정을 더하며 읽어나갔답니다.

 

 

다행히도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리뷰 포스팅도 쓸 수 있는거고요 ^^

 

 

 

보통 뉴베리 수상작이 다들 담담한 문체, 평이한 문장과 어휘를 사용하면서도

 

독자들에게 감동과 생각거리를 주는 작품이에요.

 

Small Steps 도 뉴베리 성격을 그대로 가진 작품입니다.

 

 

 

 

 

책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저도 모르게 환하게 미소 짓고 있더라구요 ^^

 

Armpit 처럼 저도 목구멍에 뭐가 걸린것처럼 먹먹하니..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답니다.

 

 

 

Holes 를 재미있게 보신 분이라면 Small Steps도 재미나게 읽으실 수 있을거에요.

 

 

 

 

다음에도 좋은 책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마무리 잘 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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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_ 신라 총정리 (삼국통일 이전)

 

 

건국 설화 (삼국유사 ) : 서라벌 지역에 사는 대표 6명이 나정으로 가보니 말 한마리가 절을 하고 있었다.

 

말이 하늘로 올라간 후 그 자리를 보니 붉은 알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알에서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 아이가 바로 박혁거세이다.

 

 

 

신라는 사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로국의 대표가 박, , 김씨로부터 나왔는데,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신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사로국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면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갔다.

 

 

 

, , 김씨가 번갈아서 임금의 자리를 가지다가

 

사로국이 경상도 일대를 전부 복속시킬 즈음에는 김씨만이 계속 임금 자리를 이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왕권이 절대적이지 않아서 복속시킨 다른 나라는 여전히 예전의 우두머리를 따랐는데,

 

이에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금관과 거대한 무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400년경 왜가 사로국을 계속 침입해오기에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대신 왜군을 물리쳐

 

주었고

 

그 댓가로 사로국에 대한 간섭이 점점 심해지게 되었다

 

 

 

고구려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면서 남진정책을 내세우자 백제와 사로국(이후 신라)이 동맹을 맺는 나제동맹이 결성되

 

었다.

 

 

 

지증왕때 사로국에서 신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증왕은 이사부 장군을 시켜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도 정복하도록 하였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법흥왕때 율령반포, 관복 제도, 골품제 등을 만들면서 더욱 왕권을 강화시켰다.

 

 

 

이차돈의 순교로 법흥왕은 귀족들의 반대를 잠재우고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삼았다.

 

 

 

신라 진흥왕때 고구려는 귀족 세력간의 싸움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태였는데, 그 틈을 타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이로써 한강 상하류 지역을 백제와 나누어 가졌다

 

 

2년 뒤 진흥왕은 동맹국인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백제 성왕이 한강 수복을 위해 대가야, 왜를 끌어들여 함께 신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목숨

 

을 잃게 된다

 

 

 

본래 신라와 동맹이었던 대가야가 백제와 연합한 것에 분노하여 진흥왕은 이사부 장군에게 대가야를 치게 하고, 대가야

 

가 항복하자 가야 지역 다른 나라들도 줄줄이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 건국이래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강을 차지함으로써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게 되어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고, 새로운 문물을 활발하게 받아들였다.

 

 

 

 

15세 전후 남자청소년들이 모여 학문과 무예를 익히고 친목을 다지는 화랑도가 있었다.

 

 

 

진평왕은 슬하에 딸 둘만 있었으므로, 골품제에 따라서 장녀인 선덕 여왕이 그 다음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귀족들의 불만이 높았는데, 여왕의 권위를 세우고 불법(佛法)으로 나라를 다스림을 보여주

 

기 위해 진흥왕때 지어졌던 황룡사에 9층탑을 건설하게 하였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가까이 두면서 위태롭게 왕 자리를 지켰다.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이 함락되고, 이 싸움에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선덕여왕이 죽고 사촌 여동생인 진덕 여왕이 즉위했다.

 

 

 

진덕 여왕은 모든 정치를 김춘추에게 맡겼고, 김춘추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는 등 외교에 힘썼다.

 

 

 

 

 

 

-삼국통일 이후는 다음 포스팅에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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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_백제 총정리

 

 

 

 

백제의 건국

 

 

 

 

고구려의 왕 주몽이 부여에 두고 온 아들, 유리가 주몽을 찾아와 다음 왕위를 이을 태자가 되었다.

 

 

 

비류와 온조도 주몽의 아들들이나 유리의 등장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삼국사기에 나온 백제 건국설화)

 

온조가 세운 나라가 비류의 집단을 흡수하여 백제라는 나라를 지었다고 한다. (한강유역)

 

 

 

한강 주변의 수십개의 나라가 마한을 이루고 있었는데, 백제가 하나 둘씩 정복하여 한강 유역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백제 고이왕 때 관등을 만들고 복식 지정, 법 제정 등 나라의 기본 토대를 만들어갔다.

 

 

 한강을 통해 낙랑군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쇠무기와 쇠농기구를 받아들여 힘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백제의 번영

 

 

근초고왕때 중국과 직접 교류하면서 문화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근초고왕은 근처 나라를 차례로 복속시키고 중국 전연의 공격으로 힘이 쇠약해진 고구려와 전쟁하여 고구려 고국원왕

 

을 죽이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근초고왕은 왜, 중국 동진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국제 활동을 넓혔다. (동진 이후 송, 남제, 양으로 넘어갈때 까지 외교관

 

계 유지)

 

 

 

백제는 항해술이 뛰어났고, 해상 왕국으로 이름을 떨쳤다.

 

 

 

아직기는 왜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왕인은 왜에 유교 사상을 전해주었다. 대신 왜로부터 군사력을 빌려 주변 나

 

라를 견제하는데 이용했다.

 

 

 

 

 

백제의 위기

 

 

 

근초고왕이 죽고나서 왕실이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그 와중에 고구려는 광개토왕이 왕위에 올랐다.

 

 

 

광개토왕은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복수를 갚기 위해 백제를 공격해 한강 이북 땅을 빼앗아 갔다.

 

 

 

백제를 지원하러 온 왜군은 신라 약탈에만 열을 올렸고, 고구려가 왜군을 몰아내고 신라를 지켜주었다.( 이후 신라에 대

 

한 고구려의 간섭이 커짐)

 

 

 

고구려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이 즉위하고 남하정책을 실시했다.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나제 동맹이 맺어졌다. (신라+백제가 힘을 합침)

 

 

 

백제 개로왕 때 장수왕이 한성을 공격하고 개로왕을 잡아 죽였다. (고구려에 한강 이남까지 빼앗김)

 

 

 

 

 

 

 

백제의 부활 운동

 

 

 

고구려를 피해 지금의 충남 공주인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천도로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으나 동성왕이 즉위하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동성왕은 외교에 노력을 기울이고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었다.

 

 

 

무령왕이 백성을 위한 어진 정치를 하고 나라의 군사력도 점차 회복시켰다.

 

 

 

무령왕은 양나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성왕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중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성왕은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대가야까지 점령하고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백제에서 남부여로 이름도 바꾸었다.

 

 

성왕은 중앙과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하고 귀족의 힘을 약화시켰다.

 

 

 

고구려가 혼란한 틈을 타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백제는 한강 이남 지역을 도로 빼앗고, 신라는 한강 이북 지

 

역을 빼앗았다.

 

 

 

동맹국인 신라가 기습공격하여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차지한 한강 이남 지역을 다시 빼앗아갔다.

 

 

 

 

신라에 복수하기 위해 신라정벌에 나섰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은 죽임을 당하였다.

 

 

 

성왕 이후의 왕들도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아오려고 하였으나 끝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무왕은 미륵 사상으로 백제를 통합하고자 삼국시대 최대의 절인 미륵사를 지었다.

 

 

 

 

 

 

백제의 몰락

 

 

 

 

의자왕 때 신라를 공격하여 대하성의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이 죽었다.

 

 

 

김춘추가 고구려 연개소문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당나라에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였고, 자만에 빠져 있던 의자왕은 급하게 계백의 군대를 황산벌로 보냈으나 계백 군대가

 

전멸하였다.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백제는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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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 때문에 비수기 자체가 없어진 사이판.

 

사이판은 비수기 성수기 할 것 없이 한국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거기에 중국, 일본 관광객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미국령이지만) 아시아인의 놀이터.

 

 

 

이번 여행에는 삼시세끼 식사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골드카드' 패키지를 운영하는

 

월드리조트에서 묵었다.

 

 

 

안그래도 저질 체력인데다가 더이상 여행을 위한 서칭을 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는 판국에

 

매끼마다 어디서 식사를 해야할지 검색하는 것도 스트레스였기 때문에

 

깔끔하게 월드리조트에서 주는대로 먹기로 결정했다.

 

한화기업에서 운영하는 리조트라서 한국어 응대 직원이 늘 상주해있기 때문에 영어를 하지 못해도 투숙 기간 내내 별 문제없이 지낼수 있다는 것도

 

월드리조트의 매력이다.

 

 

 

사이판 공항에서 차로 10여분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어서

 

지루한 공항입국 심사 뒤 지친 심신을 빨리 풀기에 좋은 거리상 이점이 있다.

 

오래된 건물이라지만, 크게 예민하지 않은 내 주관으로는 괜찮은 컨디션이었다.

 

사이판에는 게스트하우스가 잘 발달되어 있어서

 

잘 찾아보면 깔끔한 신식 게하도 찾을 수 있는데, 제대로 물놀이를 즐길려면 워터파크가 딸린 리조트를 선택하는 것이 굿초이스.

 

 

 

 

월드리조트 바로 건너편에는 조텐마트라는 대형마트가 있어서 간식거리나 필요한 물품을 사러 멀리 나가지 않아도 된다.

 

물가는 한국에 비해 싸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비슷하거나 오히려 비싸다는 느낌.

 

 

리조트 내에도 기프트샵이 있어서 자잘한 먹거리나 소품을 살 수 있지만

 

이왕이면 다양한 구색을 갖춘 조텐마트를 구경해보는 것도 좋다.

 

 

 

 

 

 

 

월드 리조트 내 워터파크는 사이판에서 최대크기다.

 

한국의 워터파크에 비하면 많이 소규모이지만 물반 사람반인 한국의 상황에 비해서는

 

한가롭기 그지 없는 평화로운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성수기에 가도 한국에서의 바글바글한 인파는 느낄 수 없다.

 

훨씬 대기줄도 적고 여유로운 간격으로 놀 수 있는게 장점.

 

 

 

 

안전요원들도 다들 친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한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다.

 

음악에 맞춰 화려한 댄스를 추면서 투숙객들에게 물세례를 퍼붓기도 하고

 

얄궂은 장난을 치기도 한다.

 

친절도 별 다섯개 ★★★★★

 

 

 

 

월드리조트는 뷔페, 명가, 이태리레스토랑 3가지 중 골라서 식사가 가능한데,

 

레스토랑은 예약을 해야 이용할 수 있으니 체크인할 때 필히 예약을 해야 한다.

 

명가는 한식당이므로 외국 음식이 안맞는 투숙객이라면 이용할 만하다.

 

맛은 전체적으로 보통수준.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들 친절상태도 보통이었다.

 

 

워터파크 내 직원들과 카운터 직원들에 비하면 거의 웃지 않는 직원들.

 

워터파크에서는 몰랐는데, 작은 식당에 모아놓으니 한국인들이 정말 바글바글했다.

 

 

뷔페는 기다린적이 없는데, 명가는 5분 정도의 대기 시간이 있었다.

 

식사를 여유롭게 하고 싶다면 식사시간에 맞춰 서둘러 가는 것이 좋다.

 

 

참고로 주말에만 열리는 BBQ 파티는 LA 갈비말고는 거의 맛이 없으니 비비큐파티에서 석식을 해결하기보다는

 

그냥 3가지 식당 중 하나를 선택해서 먹는게 좋을 듯 싶다.

 

돼지통구이도 너무 비려서 아예 먹지를 못했고 LA갈비만 조금 먹고 나왔더니 그날 내내 저녁 배가 고팠다는 후문..

 

 

 

 

 

언어소통의 공포없이

 

식사까지 한큐에 해결할 수 있고

 

워터파크도 이용하고 싶다면

 

월드리조트를 이용하시라.

 

 

 

 

 

굳이 마나가하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월드리조트 바로 앞 바다가 바로 이렇다.

 

 

여기서 우측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열대어까지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수수페비치가 펼쳐지는데,

 

개인적으로 파도가 출렁이는 마나가하보다

 

잔잔하고 맑은 수수페비치가 더 좋았다.

 

 

 

 

아름다운 여름 나라 사이판으로 여행을 계획한다면

 

월드리조트에서 휴식과 레저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으니 고려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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