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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코딩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프로그래밍 실력이 4차 산업 시대에 필수적인 능력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고

학교에서도 2018년부터 초중등 소프트웨어 교육 필수화 계획하고 있다죠.

 

 

초등학생부터 즐겁게 배울수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인 스크래치를

저도 트렌드에 따라가고자 배워보려 합니다.

 

제가 배워서 아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상세하게 기술하는 포스팅이 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

 

 

스크래치를 배우기 위해서 일단 스크래치에 가입부터 해야겠지요.

 

 

 

첫번째

 

 

http://scratch.mit.edu

 

주소를 타고 스크래치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두번째

 

홈피가 아기자기하죠?

 

청소년들이 배우는 코딩 프로그램이다보니 학생들 작품이 많이 보여지고 있네요.

 

코딩에 코 자도 모르는 저도 언젠가 저의 작품을 공유할 날이 오리라! 기대하면서..

 

 

스크래치 홈피에서 상단 오른쪽에 스크래치 가입을 눌러서 가입을 진행하도록 합니다.

 

 

 

 

세번째

 

 

하라는 대로 진행하면 됩니다.

 

사용자 이름 입력에는 아이디로 쓸 걸 입력하도록 합니다.

실명은 쓰지 말라네요.

 

비번까지 입력한 후 다음 버튼을 누르세요.

 

네번째

 

 

 

생년월일, 성별, 국가를 입력합니다.

 

국가는 South Korea 로 하면 되겠죠.

 

 

미성년자 가입일 경우 부모님 이메일을 쓰라고 나오네요.

 

저는 딸램 정보로 가입했으므로 제 이메일을 입력했습니다.

 

스크래치에 관한 업데이트 정보를 받고 싶으면 이메일 주소 확인 밑에 영어로 되어 있는 부분 박스를 클릭하면 됩니다.

 

 

 

스크래치에 가입되었습니다.

 

아까 입력한 이메일로 메일이 하나 왔을텐데요.

 

메일에서 링크를 클릭해서 확인을 해야 완전한 가입절차가 완료됩니다.

 

 

스크래치 홈페이지 상단 왼쪽에 보면 만들기라고 있어요.

 

그걸 클릭하면 이런 창이 뜨는데요.

 

온라인 에디터라서 바로 여기서 코딩작업을 즐길 수 있어요.

 

 

간단한 기본 용어부터 살펴볼게요.

 

 

1번에 고양이 한마리가 있는데요.

 

우리가 명령어를 입력해서 이 녀석의 행동이나 말 등을 제어할겁니다.

 

이렇게 명령어로 제어하는 대상을 스프라이트라고 부릅니다.

 

 

 

2번은 명령어를 간단하게 블록으로 만들어 놓은거에요.

 

프로그래머들은 코딩 언어를 직접 써넣지만

이건 간단하게 블록으로 미리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걸 말 그대로 블록이라고 부릅니다.

 

 

3번은 스크립트 영역인데요.

 

2번의 블록을 마우스 좌클릭 한 채로 끌어다가 두는 영역으로 여기서 주로 프로그래밍이 이루어진다고 보심 됩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직접 저 고양이 (스프라이트)를 움직여보도록 할게요 ^^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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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과 명나라 정복의 야심도 키워갔다.

 

◆ 일본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통신사가 파견되었는데, 그들 중 황윤길은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고 선조에게 보고했고 김성일은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 당시 조선은 동인이 주도하는 정국이었으므로 같은 동인이었던 김성일의 보고를 받아들여 왜침에 대비하지 않았다.

 

◆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어달라는 터무니 없는 억지를 부리며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왔다.

 

수령과 군관들은 모두 도주하고 농민들이 장수 이일의 지휘 아래 일본군에 맞섰으나 역부족이었고 조선 제일의 명장 신립 장군도 탄금대 전투에서 지고 말았다.

 

사실상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 뻥 뚫린 셈이었다.

 

 

◆ 동래 부사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는 명언을 남기고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이 불타 조선왕조 200년의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다.

 

◆ 피난하지 않고 평양을 지키겠다고 약속한 선조는 약속을 어기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으며 그 바람에 일본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여

 

6월 15일에 평양을 점령했다.

 

 

 

 

 

 

◆ 조정과 관군이 도망가버리자 평민 , 노비 할 것 없이 의병이 되어 일본군에 맞서 일어났다.

 

◆ 의병은 의령에서 유생 곽재우를 시작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곽재우는 매복, 기습 등 유격전술로 일본군에 맞서 싸워 활약이 뛰어났다.

 

전라도의 의병이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켜준 덕분에 조선군의 식량을 마련하고 일본군에 반격할 수 있는 중요한 바탕이 다져졌다.

 

◆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 이순신의 활약에 막혀 일본군의 수륙 병진 작전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익진 전술로 일본 수군을 섬멸시킨 한산도 대첩은

 

세계 해전 역사에서도 유례 없는 빛나는 승리로 평가받고 있다.

 

◆ 일본은 조총이 있었지만 조선은 천미터 사정거리를 지닌 대형 화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신무기인 비격진천뢰가 개발되어 크게 힘을 발휘하였다.

 

 

◆ 조선의 요청으로 명군까지 동원된 싸움은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였다. 행주산성에서는 권율 장군의 지휘 아래 아녀자를 비롯한 모든 백성이 총동원되어 싸워 일본군의 사기를 한껏 꺾어놓았다.

 

◆ 명나라는 조선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의견은 무시한 채 일본과 강화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만 끌었고

 

그 사이 명과 일본군은 조선에 장기간 주둔하면서 백성을 약탈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 강화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자 일본은 1597년 다시 조선을 침략하는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거짓 정보를 믿지 않았던 이순신을

 

도리어 선조는 수군통제사에서 해직시키고 원균을 그자리에 앉혔다. 부산으로 침략한 일본군은 원균이 이끄는 조선군을 가뿐히 제압하고 전라도를 점령하였다.

 

◆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조선은 다시 이순신을 등용했다. 이순신은 전함 12척으로 명량(울돌목) 에서 일본함 130척의 진격을 좌절시켰다.

 

◆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의 새 지도부는 일본군의 철수 명령을 내렸다. 후퇴하는 일본군을 곱게 놓아줄리 없던 이순신은

 

일본군의 후퇴 길목을 막는 노량 해전을 치르게 되었고, 그 가운데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로써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이 났다.

 

◆ 조선에 군대를 보냈던 명나라는 오랜 전쟁으로 농민반란과 극심한 당쟁으로 몸살을 앓았고,

 

그 사이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워 명을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 조선에서는 전쟁의 혼란을 틈 타 많은 노비가 도망가고 노비 문서가 없어지면서 신분제가 흔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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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정리_사림의 시대, 조선

 

 

조선건국을 둘러싸고 신진사대부들은 개혁의 방향을 두고 서로 맞서기 시작했다.

 

정도전, 권근 등은 조선을 세우는데 적극 참여한 반면 정몽주, 길재 등은 조선 건국에 반대하였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잡아 조선을 건국했다. 정몽주는 죽임을 당하였고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성리학을 공부하며 제자를 길렀는데, 이들이 사림의 뿌리이다.

 

 

유교는 공자가 세운 사상이고, 성리학은 송나라 주희가 유학을 연구하여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시킨 주자학을 말한다.

 

 

단종의 자리를 빼앗아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반발한 사림은 세조를 왕으로 세운 훈구파 (한명회, 유자광 등) 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훈구파는 각종 정변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높은 벼슬을 하던 무리를 일컫는 말로 불법으로 토지를 빼앗는 등 백성을 괴롭히는 자가 많았다.

 

 

어진 임금이었던 성종 때에 이르러 김종직 같은 사림을 인재로 등용했는데, 이들이 형성한 집단을 사림파라고 하였다.

 

 

삼사의 요직에 앉았던 사림파는 훈구파의 비리를 집중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사림파와 훈구파와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사림파는 몇 차례 큰 화를 당하는데 이를 사화라고 한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이 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의 조의제문이 사초(실록의 원고)에 실리자, 이를 빌미로 많은 사림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사약을 받아 죽은 일을 가지고 이에 가담한 신하들을 죽인 사건이었는데 훈구파, 사림파 둘 다 피해가 컸다. 이때 이미 죽은 한명회의 무덤을 파헤쳐서 처형시킬 정도로(부관참시) 연산군의 분노가 컸다.

 

 

위협을 느낀 훈구파는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키게 된다.

 

 

중종은 경연을 새로 열고 성균관을 부활시키는 등 새로 유학을 일으켜 제대로 된 정치를 하고싶었으나 반정 공신들의 힘에 눌려 실현하기 힘들자 조광조 같은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현량과, 향약 등 여러 개혁을 추진하였고 공로가 없이 반정공신 목록에 들어간 인물을 삭제하라는 상소를 올려 위훈삭제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불만을 품은 훈구파는 주초위왕 사건을 만들어 중종이 조광조를 내치도록 종용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 김구, 김식등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를 기묘사화라고 한다.

 

 

인종을 지지하던 사림이 화를 입은 을사사화 이후 권력을 잡은 윤원형이 비리를 저질러 나라가 어려워지자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는 등 백성들의 저항이 거세졌다.

 

 

이로써 훈구파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사림파가 다시 등장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였다.

 

 

 

선조 때에 이루러 사림이 조정의 중요한 자리를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고 생각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토론하는 붕당정치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이조 전랑직을 두고 이효원을 추천한 자들은 동인, 심의겸을 추천한 자들은 서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광조의 죽음으로 흐지부지된 향약(향촌의 안정을 꾀하는 규약)은 선조때에 이르러 이황, 이이의 활약으로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향약은 고을의 질서를 유지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기능뿐 아니라 지방관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기능도 하였다. 이로 인해 향약을 주도한 사림의 지위와 역할도 강력해졌다.

 

 

사림은 지방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도 설립해나갔다. 서원에서 학문을 연구할 뿐 아니라 선현들의 제사를 지내고, 서적을 만드는 일도 하였다.

 

 

선비들은 성리학 이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최고로 생각했다.

 

 

아무 무늬가 없는 순수한 백자에는 깨끗함을 추구하는 선비들의 이상이 담겨있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학파는 퇴계 이황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퇴계 학파와 율곡 이이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율곡학파가 있었다.

 

 

이황은 성리학의 핵심 내용을 열개의 그림으로 정리한 <성학십도>를 선조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마음 수양을 중시해서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내려가 제자 양성에 힘썼다.

 

 

율곡 이이는 아홉번이나 장원 급제를 할 정도로 똑똑했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선비의 포부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격몽요결> <성학집요> 등을 저술했다.

 

 

이밖에도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한 조식, 독학으로 공부한 화담 서경덕, 서경덕의 제자로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 이황과 8년동안 사단칠정 논쟁을 한 고봉 기대승 등 성리학을 발전시킨 학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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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1Q84 를 읽고 있는 중입니다.

 

 

 

 

자기 계발서를 무척 좋아하는 편이라서

 

몇 년간 읽어온 한글책이라고 해봤자 모두 자기계발서라는 장르로 모아지네요.

 

 

 

 

이런 제가 소설로 오랜만에 집어든 책이 1Q84 입니다.

 

역시 하루키라는 명성답게 책 초반부터 흡입력이 대단한 작품입니다.

 

사실 읽고 있는 영어책이 있어서, 그걸 위주로 리딩을 하다보니

 

정말 틈틈히 아주 쬐끔씩 읽어나가고 있긴 한데요.

 

아.. 이젠 한글 소설책에 좀 많이 빠져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하지도 못하면서 영어책만 주구장창 읽어내리고 있으니

 

정작 모국어인 한국어 실력이 도태된 느낌이 듭니다.

 

 

말을 할때도 적절한 어휘가 생각이 안나서 어버버버-

 

내용도 조리있게 말하지 못하고 버버버벅-

 

너무 한글책을 안읽어서 이지경이 되었나 자괴감이 드는거 있죠.

 

 

1Q84같은 소설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알쓸신잡에 나오는 출연진들처럼 다방면에서 유창하게 자기 생각을 어필할 수 있는 그런 화술을 익히고 싶어요.

 

그러려면 말하기 연습도 연습이지만

 

일단 아는게 많아야겠다는. ㅋㅋ

 

 

 

초등학생때는 말로 지지 않을 정도로 말빨이 끝내줬던 기억이 있는데

 

나이 다 먹고 왜 이렇게 말을 잘 못하는 걸까요?

 

 

하루키의 세련된 문체를 보고 있자니 저의 언어적 문제가 무척이나 민감하게 드러나는 밤이네요.

 

이 속도로 읽다간 올 상반기 안에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좀 더 부지런히 달려보겠습니다.

 

 

한글 작품도 좀 많이 접해서 한글책 관련 카테고리도 하나 만들어야겠단 생각도 해봅니다.

 

 

 

 

 

독서로 채워지는 편안한 밤 되세요 ^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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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명은 황허 강 유역에서 나타난 황허 문명과 양쯔 강 유역에서 나타난 양쯔 강 문명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일찍부터 공동체 정신이 자리잡고 있어서 개인의 자유가 없었고 합리적인 법률도 존재하지 않았다. 권위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었다.

 

 

헤겔은 고대 중국 사회에는 자유가 없기 때문에 내면의 정신이 발전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헤겔은 동양, 즉 중국이 소년기 또는 유아기라고 평가했다.

 

 

헤겔은 인도를 공상의 나라라고 했다.

 

 

현실보다 꿈 같은 세계를 추구하다 보니 다양한 자연과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게 됐고, 이들이 각각 신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인도에는 유독 신이 많다. 먹거리가 풍부하고 외적 침입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 걱정할 일이 적으니 자연스레 공상에 빠졌다.

 

 

 

헤겔은 인도에는 국가의 존재 원리인 자유가 전혀 없으므로 민족은 있어도 국가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인의 자립성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보다 정치적으로 발전했다고 평했다.

 

 

 

인도의 세습적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는 1955년 폐지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큰 사회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

 

 

인도는 이러한 카스트 제도로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 한계가 있었고 헤겔은 이러한 한계 때문에 인도에는 국가가 생겨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인도를 세계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카스트에 4가지 계급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에 속하지 못하는 최하층 계급인 불가촉천민은 달리트라 불리는데, 힌두교에서 더럽고 천한 일이라 여기는 직업만 가질 수 있었다.

 

 

페르시아는 오늘의 중동 지역에 있는 고대 국가로 군사, 정치, 경제,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제국으로 불릴 만한 위상을 자랑했다.

 

 

특히 다리우스 1세 시대에 최전성기를 맞이했으나 그리스 원정 실패와 내부 분열로 쇠퇴했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헤겔은 이곳을 가리켜 세계사가 진정으로 시작된 곳이라고 말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성이 있을 뿐 아니라 개인의 자유가 존재하는 곳이어서 헤겔의 세계사적 정신에 부합하는 곳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을 이루는 주 민족인 젠드 족은 조로아스터교(페르시아 철학자 자라투스타라가 만든 종교)를 믿었는데 그 교리에 따라 정신과 육체를 깨끗이함을 물론, 생물을 보호하며 나무를 심는데 힘썼다.

 

 

여러 나라를 통일하여 세운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는 각 민족의 언어와 종교를 인정해주었다. 덕분에 제국의 조화를 유지하는 선에서 독립적인 문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을 구성했던 한 민족인 이집트는 자연에 정신이 지배당하는 원시 종교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의 영혼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다라는 인식(미라 제작)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두고 헤겔은 이집트는 독립하고픈 충동을 느끼지만, 자신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청년에는 이르지 못한 소년과 같다.” 라고 말했다.

 

 

페르시아의 바통을 이어받은 그리스는 자연에서 벗어나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스 이전의 이집트 스핑크스는 반인반수 형태로 자연과 인간이 섞여있었으나 인간을 주목하는 그리스에서는 주로 사람을 소재로 조각상을 만들었다. (세계사의 청년기)

 

 

미술 뿐 아니라 연극, 노래, 춤 등 인간의 몸을 이용해서 정신을 표현하는 활동이 발달했다.

 

 

즉 인간 중심의 사상을 꽃피우고 그에 맞춰 자유 의식도 뚜렷해졌다. 아고라에 모여 토론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것처럼 민주 정치를 행했다.

 

 

그러나 완벽한 민주 형태는 아니어서 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신탁 정치를 했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이후 페르시아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등 전쟁의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식민지를 많이 만들면서 노예가 생겨났고 노예를 희생시켜 자유를 얻었다. 일 대신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더 많은 자유를 원하게 되었고, 소피스트(아테네의 자유민으로 변론술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궤변이 번지면서 혼란이 가중되어 갔다.

 

 

 

결국 개인의 자유가 국가의 법률마저 위협하게 되었고, 도덕성이 타락하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스의 뒤를 이어 서방 세계의 주인공이 된 로마는 유럽부터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지중해 패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가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는데 한니발 전쟁이라 불리는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한니발군을 격파하고 3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켜 완전히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해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로마는 그리스와 달리 개인이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했고 개인의 정신이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도덕과 분리된 개념의 엄격한 법이 탄생하여 전체를 다스릴 수 있었다.

 

 

헤겔은 로마의 자유의식이 그리스보다 낫다고 평하면서 장년기로 비유했다.

 

 

그리스는 반성 없는 자유였던 반면, 로마는 국가와 정치를 개인 위에 두어 철저히 복종하게 만들었음에도 내면으로는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즉 외부의 엄격한 규율과 추상적인 내면의 자유가 서로 부딪히지 않고 공존했다.

 

 

사람들의 정신이 발달하니 종교 역시 내용과 정신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크리스트교가 로마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크리스트교는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로마 국교로 인정받았다.

 

 

게르만족이 로마의 지배를 받은 이후 로마를 무너뜨리고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프랑크왕국은 로마 교회와 연합해서 크리스트교적인 사회를 만들었다. 프랑크 국왕인 사를마뉴 대제가 죽은 후 곧 프랑크왕국은 멸망했고 더 이상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지 못하자 지방 권력자들을 중심으로 영주, 농민간의 봉건제도가 성립하게 되었다.

 

 

이와중에 크리스트교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 교회는 세속의 일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

 

중세 봉건 사회가 되면서 순결, 빈곤, 복종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유흥, 결혼등을 나쁘게 생각했다.

 

또한 신에 대한 복종이 최고의 가치였기 때문에 정의나 법률이 무시당하고 타락, 배신 비도덕이 만연하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 가톨릭 권력이 약해졌으며 이는 곧 봉건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또 이슬람과의 접촉으로 문화. 예술, 학문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서양인은 신, 종교가 아닌 정신적으로 자립한 인간을 추구하게 되었고 주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이후에 등장한 군주제에서는 이전의 봉건제와는 달리 주는 있되, ‘에 해당하는 개념이 사라지고 더 자유로워졌다.

 

 

 

헤겔은 역사 철학 강의에서 독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새 시대를 연 군주라고 평가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통치에 반대하고 볼테르의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같은 선진국으로 만들려는 꿈이 있었다.

 

즉위 후 예술 문화 부흥에 힘쓴 반면 아버지의 군국주의를 이어받아 강대국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등 군사력을 전 유럽에 떨쳤다.

 

 

 

프랑스 혁명 후 자유주의가 자리잡았으나, 이로 인해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이 커서 자유주의가 이를 뛰어 넘지 못하고 결국 몰락했으며 몇몇 국가는 이전 모습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기 위한 여정에는 이러한 성장통이 동반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항상 자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만들어왔다.

 

 

 

헤겔이 바라본 세계사의 한계

 

- 유럽 위주의 시선을 가지고 세계사를 바라보았으며 동양사회를 매우 낮게 평가했다.

 

- 중국 고대 전제 왕권 시대만 보고 중국 역사 전체를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동양 역사나 문화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

 

- 역사를 절대정신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독재자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히틀러나 일본의 제국주의는 헤겔의 철학에 기반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 철학의 핵심인 인정사상은 노예제 해체를 뒷받침 하는 근거가 되며,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로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상적 근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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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_삼국시대, 삼국의 외교

 

 

<<삼국과 동아시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나라의 기틀을 갖춰갈 때 중국은 516국 시대로 혼란의 시대였다.

 

고구려는 이 나라중 전진과, 백제는 동진과 교류하면서 불교를 들여왔다.

 

 

 

백제가 받아들인 불교는 다시 왜로 전해졌다. 백제는 불교뿐 아니라 한문학, 도자기, 무기 제작 기술등도 왜에 알려주었

 

.

 

 

 

중국의 516국 시대가 끝나고 북쪽은 북위, 남쪽은 송나라가 세워졌는데

 

고구려는 북위와, 백제는 송나라와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신라가 뒤늦게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갈 때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고 수나라와 국경을 접한 고구려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가 돌궐과 동맹을 맺게 되고, 신라 백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와 동맹을 맺는다.

 

 

 

신라와 적대관계였던 백제가 고구려에 힘을 실어줌과 동시에 왜를 끌어들였다

 

 

 

 

돌궐+고구려+백제+<--------------------> 수나라+신라

 

 

 

 

중국과 책봉, 조공의 절차를 거쳐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구려가 직접 서역과 무역을 하려고 하자, 고구려와 서역간의 중개 무역으로 이익을 챙겼던 당나라와의 사이가 멀어지

 

게 되었다.

 

 

 

수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당태종은 고구려를 정복시키겠다는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고구려는 동맹국을 찾

 

아나서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고구려는 서역의 나라인 돌궐과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 하였다.

 

 

 

고구려는 서역뿐 아니라 유럽의 로마와도 문물 교류를 하였고, 이러한 다양한 문물은 백제나 신라에까지 전해졌다.

 

 

한강 유역을 먼저 차지했었던 백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항해 기술이 특히 뛰어났다. 그래서 배를 타고 해외로 나가 교류

 

를 했고, 특히 왜와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그래서 일본에는 지금도 백제와 관련된 마을 이름이나 유물이 많이 남아있

 

.

 

 

 

고구려 승려 혜자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백제의 오경박사 왕인도 왜의 사신으로 가서 태자와 신하들을 가르쳤다.

 

 

 

고구려 승려 담징은 왜의 호류사에 금당벽화를 남겼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말이 같고 풍습이 비슷했지만, 세력 다툼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고구려+ 신라 vs 백제 :

 

고구려 백제가 세력 다툼을 할 때 신라는 새로운 문물을 고구려를 통해 접했고, 고구려는 신라를 보살펴야 할 나라로 생각했다.

 

고구려 vs 신라 + 벡제 :

 

고구려가 신라를 신하국처럼 대하고 내정에 간섭하자, 신라는 차츰 백제와 교류를 시작했다. 고구려가 이에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백제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고구려 vs 신라 vs 백제 :

 

동맹을 맺은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아 한강 상류는 신라가, 한강 하류는 백제가 차지하게 되었다. 신라는 곧 동맹국이었던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일대의 땅까지 빼앗아버렸다.

 

고구려 + 백제 vs 신라 :

 

한강을 차지한 신라가 당나라와 마음껏 교류하고 세력을 확장하자, 고구려와 백제가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하기도 하였.

 

 

 

블로그 정비 과정중에 삭제된 한국사 포스팅을 다시 게재하는 바람에

 

연대순으로 정리되지 못하고 뒤죽박죽 되어버렸네요 ㅜㅜ

 

조선시대까지 정리된 포스팅이 이미 있기 때문에

 

다음 포스팅부터는 조선시대 이후부터 정리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공부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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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_ 철의 나라 가야연맹

 

 

가야 연맹의 탄생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세워질 무렵 남동부 지방에 가야 연맹이 생겨났다.

 

 

 

기원전 108, 한나라 공격으로 고조선이 망하고, 고조선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해 오면서 변한 지역으로 많이 몰려왔

 

.

 

 

 

고조선 사람들은 변한 지역 사람들에게 쇠 만드는 기술을 전해주어 변한 지역은 철 기술이 눈에 띄게 발달하게 되었다.

 

 

 

금관가야가 변한의 철 무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중국과 왜를 연결하는 해상무역을 이끌었다. 그러면서 연맹전체가 금

 

관가야의 원래 이름(구야국)을 따라 가야로 불리게 되었다.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낙동강을 가지고 있는 금관가야를 반드시 거쳐야 외국과의 교류가 가능했으므

 

, 금관가야의 지위가 점차 높아져갔고, 다른 가야 지역보다 먼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 연맹 중에는 강력한 왕권이 없었기 때문에 각 나라 왕이 자기 나라를 다스리는 연맹 형태의 국

 

가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금관 가야의 발전과 쇠퇴

 

 

 

 

금관가야는 무역 중개로, 철의 수출로 부귀를 누렸다.

 

 

 

300년대에 들어와 금관가야가 무역을 독차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8 나라가 금관가야에 반기를 들었다.

 

 

 

때마침 고구려 미천왕이 한반도에서 낙랑군과 대방군등 중국 세력을 몰아내자, 무역으로 이득을 얻었던 금관가야는 큰

 

타격을 입었다.

 

 

 

금관가야에 불만을 품었던 8 나라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금관가야를 공격하였으나, 금관가야가 신라에 도움을 청하

 

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사건으로 금관가야의 지위가 추락하였고, 신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 후 마한의 여러 나라를 통합한 백제가 들어서고, 중국과 왜의 무역을 연결하는 새로운 교역 중심지가 되었다. 가야의

 

여러 나라가 백제 편으로 넘어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교역하고는 했는데, 금관가야도 하는 수 없이 대세를 따를 수 밖에 없

 

었다. 이러한 이유로 백제와 친한 왜가 신라를 공격하도록 길을 터주었고, 신라는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러 와 신라 땅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달아나는 왜군을 따라 금관가야 지역까지 밀어

 

닥치다보니 금관가야의 땅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가야 연맹은 깨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서는 가야

 

 

 

고구려의 공격 때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인 고령일대에 자리 잡았던 대가야는 농사를 지으며 서서히 나라의 힘을

 

키워갔다.

 

 

 

철제 기술자들까지 대가야로 모여들자 비옥한 땅, 철기 기술까지 얻게 되어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주변나라를 끌어

 

들여 가야 연맹을 다시 만들었다.

 

 

 

500년 무렵 안정을 찾은 백제와 신라가 가야땅을 넘보기 시작하였다.

 

 

 

백제 무령왕이 가야를 공격하여 땅을 빼앗아가자 대가야의 이뇌왕은 신라의 법흥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백제를 견제하고

 

자 했다.

 

 

 

하지만 신라에는 다른 속셈이 있었으므로 529년 가야지역을 공격하였고 가야연맹은 신라, 백제의 공격을 받아 쇠퇴해

 

갔다.

 

 

 

532년 신라의 공격으로 금관가야가 멸망하였다.

 

 

 

554년 백제와 신라간의 싸움에서, 남은 가야 연맹은 백제의 편에서 싸움에 가세하였는데, 신라가 이김으로써 백제뿐

 

아니라 가야연맹도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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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벨라입니다.

 

오랜만에 추천원서 소개글로 찾아뵙는것 같아요.

 

꾸준히 책을 읽고 있긴 한데, 속도가 영 붙질 않아서 완독권수가 그리 많지 않네요.

 

 

오늘은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

 

루이스 쌔커의 Small Steps 를 언급할까 합니다.

 

 

루이스 쌔커의 뉴베리 수상작 Holes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죠.

 

그러고보니 Holes 를 추천하는 포스팅도 조만간 써야겠군요..

 

 

루이스 쌔커님은 문체에 과한 힘을 주지 않아요.

 

스토리 배경부터 캐릭터까지 억지스럽게 힘을 꽉! 주고 그려냈다라는 느낌이 전혀 없고

 

정말 편안하고 담담한 필체로 작품을 쓰시는 분이에요.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느슨하게 힘을 풀고 쓴 듯한 작품이 놀라울 정도로 독자들을 흡입한다는 거에요.

 

 

별 거 없이 정말이지 말 그대로 ' 구덩이 '하나만으로 사람을 몰입하게 하는 힘.

 

아무 작가나 가지지 못하는 재능이에요.

 

 

Small Steps 는 구덩이의 후속편인데요.

 

Armpit 이라는 흑인 남자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이 아이가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백인 여자아이 지니, 그리고 아이돌 여가수를 만나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에요.

 

 

Small steps를 읽는 내내 Armpit 의 친구 X-Ray 가 사고 칠까봐 조마조마..

 

Armpit 이 곤경에 처할까봐 조마조마 ..

 

계속 걱정에 걱정을 더하며 읽어나갔답니다.

 

 

다행히도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리뷰 포스팅도 쓸 수 있는거고요 ^^

 

 

 

보통 뉴베리 수상작이 다들 담담한 문체, 평이한 문장과 어휘를 사용하면서도

 

독자들에게 감동과 생각거리를 주는 작품이에요.

 

Small Steps 도 뉴베리 성격을 그대로 가진 작품입니다.

 

 

 

 

 

책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저도 모르게 환하게 미소 짓고 있더라구요 ^^

 

Armpit 처럼 저도 목구멍에 뭐가 걸린것처럼 먹먹하니..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답니다.

 

 

 

Holes 를 재미있게 보신 분이라면 Small Steps도 재미나게 읽으실 수 있을거에요.

 

 

 

 

다음에도 좋은 책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마무리 잘 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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