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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생일, 평소 자주 먹는 미역국을 새로 끓이는 건 스킵하고 외식을 하기로 했는데요.

짜장면 귀신인 신랑이 왠일로 소바가 땡긴다는거에요.

짜장면 별로 안좋아하는 저는 '올레!'를 외치며 길가다가 슬몃 본 백소정 간판이 기억나 백소정으로 향했어요.

그때까지도 여기가 유명한 맛집인줄도 몰랐어요.

냉소바가 사진상으로 제일 맛있어보여서 냉소바를 시켰어요.

혹시 모자를까 싶어서 돈까스도 같이 나오는 세트로 시켰습니다.

아니...!

너무 맛있는거에요?!!! ㅜㅜ

내 인생 먹어본 소바중 최고의 소바라고 말할만한!!! 돈까스도 솔직히 부산대 최고 돈까스 맛집 ㅌㅅㅇ 에 비길만하던데요.

살이 두툼하고 잡내 하나 없이 부드러운 돈까스에 

코를 찌르는 와사비와 갖은 야채에 함께 담궈먹는 짭쪼름한 냉소바의 조합은 그야말로 꿀맛이었어요


이튿날

다른 메뉴도 궁금해서 다시 백소정으로 갔습니다.

 

신랑은 마제소바인가? 비빔을 시켰구요.

저랑 딸래미는 자루소바를 시켰어요

결론은 

냉소바가 제일 맛있다!

입니다. 

신랑 마제소바는 일단 면이 우동면이어서 신랑이 별로였다고 해요. 양념 자체는 맛있었는데 소바를 먹으러 갔다면 굳이 우동면을 먹을 필요가 있지 싶어요. (근데 주변 테이블에 이 비빔소바 시킨 분 많았어요. 개인취향인가봐요)

자루 소바는 맛있었어요. 하지만 냉소바처럼 아예 국물에 담궈져 나오면 면에 간이 더 짭쪼름하게 배어서 더 맛있는데

조금씩 국에 담아서 먹으려니 감질맛도 나고 ^^;; 간이 안 배는 느낌이 있어서 조금 싱겁더라구요. 냉소바에 비해서요. (제가 좀 짜게 먹는 편입니다 )


우연히 소바 맛집을 발견하게 되어 기부니가 좋네요.

앞으로 냉소바가 땡기면 고민말고 백소정으로 가면 될 것 같아요.

부산대 놀러오시는 분들, 백소정 강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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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공주님이 부산예중에서 실시하는 미술실기대회에 참가하는 동안

최장 3시간을 대기해야 했던 저는..

도저히 예중에서 제공해주는 강당에서 몇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었기에

금정문화회관으로 내려와 카페에서 대기하기로 했어요.

9:00부터 오픈하는 카페라서 딱! 시간도 좋았죠.

 

좀 이따 출근해야 했던 남편과 간단히 브런치를 먹고

남편님은 보내놓고 혼자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내려고 했어요.

8:59분이 되어도 오픈할 기미가 안보이는 해리스 카페.. 점점 식은땀이 나며;; 이걸 어쩌지.. 계획이 다 틀어지게 생겼네.. 

이러고 있는데 9:00 정각이 딱 되니 귀신같이 오픈한 해리스카페 ㅋ

 

뚱한 표정의 첫인상을 가지신 남자 사장님이셨는데, 첨엔 그런가부다- 했거든요.

근데 완전 친절대마왕! 

 

브런치와 아이스아메리카노, 페퍼민트차를 주문하고 받았는데 

잠시뒤 베이컨이 올려진 뒤집개를 가지고 오시며

베이컨을 빠뜨렸다며 웃으면서 주고 가시더라구요.

그러면서 신랑보고 

몸집이 크셔서 브런치가 모자랄 것 같으니 혹시 부족하면 식빵을 더 구워주겠노라고

부족하면 말씀하시라고 하시더라구요.

여기서 일단 사장님의 섬세한 멘트에 감동 +10 점

얼마전 부산대 유명한 브런치 맛집에서 겁나 비싼 브런치를 더럽게 맛 없고 구색없이 먹은 기억이 있어서

만원도 안되는 가격에 이 정도 브런치면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생각했어요.

탄단지+식이섬유 골고루! 

전 아침에 속이 쓰려서 아메리카노를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고 페퍼민트차를 주문했는데 fresh한 느낌이 좋았어요.

정말로 몇 시간동안 구취가 안나더라구요. (페퍼민트 대단해~!)

그리고 덩치 큰 신랑의 포만감이 걱정되셨는지 ㅋㅋ 도톰한 쿠키를 서비스로 몇 개 가져다 주시더라구요 

와우...사장님 호감도 + 100 상승


신랑 출근시키고 혼자 전자책 읽으면서 편안하게 쉴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금정문화회관 내에 위치하고 있어서 조용하기도 하고요.

근데 좀 있다가 손님들이 엄청 많아져서 만석이 되더라구요. 알음알음 인기가 많은 카페인 것 같았어요.

신랑 커피 살짝 맛 봤는데 아메리카노도 (제가 안 좋아하는) 산미있는 커피가 아니고 

스벅 스타일 고소한 커피라서 만족스러웠어요. 

 

금정문화회관 방문하실 일 있으시거나 예중 예고에서 치르는 대회 때문에 몇 시간 대기 타야 하는 부모님이라면

해리스 카페에서 편안하게 보내시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것 같네요.

- 이상 내돈내산 해리스카페 후기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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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부흥운동

668년,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지만 고구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무너뜨린 장본인이지만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가 신라까지 탐내자 당나라에 등을 돌리고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지하였다.

당나라의 인질로 잡혀갔던 보장왕이 풀려나고 말갈족까지 끌어들여 고구려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보이자 

보장왕을 다시 당나라로 끌고 가버렸다.

고구려 부흥운동을 잠시 주춤해졌지만 당나라에 자리잡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에게서 부흥 운동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대조영과 새나라 진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아들 대조영이 거란족,말갈족과 함께 당나라에 저항하였다.

비록 거란족이 당나라에 항복하였지만

걸걸중상과 말갈족의 걸사비우는 항복하지 않고 계속 세력을 키워나갔다.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걸사비우는 죽고 대조영은 지도자를 잃은 말갈족까지 다 이끌고 당나라와 싸웠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당나라의 힘이 미치지 않는 동모산 위에 새 나라 '진'을 세웠다.


발해의 탄생

 

대조영은 당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 돌궐과 신라에게 사신을 보내 새 나라 건립을 알리며 외교관계를 맺었다.

'진' 나라가 점점 세력을 넓히자 당나라도 더이상 '진'나라를 우습게 볼 수 없었고 사신을 보내 

발해 군왕이라는 벼슬을 내려 어엿한 나라로 인정하였다.

이때부터 나라 이름이 '진'에서 '발해'로 변경되었다.

발해로 흡수되지 않았던 흑수말갈족이 당나라의 편에 들어갔고, 발해는 흑수말갈족에게 선제 공격을 하면서 당나라와 다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당나라는 계속해서 발해를 공격을 해왔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당나라와 사이좋게

 

대조영의 아들 무왕 때까지만 해도 당나라와 사이가 안좋았으나 3대왕 문왕이 즉위하고는 당나라와 친선관계를 맺었다.

문왕은 당나라의 앞선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당나라의 정치 제도를 가져와 3성 6부 중앙 통치 기구를 만들었다.

3성은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

6부는 충,인,의,지,예,신으로 유교 덕목을 따서 이름지었다.

발해의 국력이 올라가자 당나라는 문왕에게 발해 군왕에서 발해 국왕으로 더 높은 벼슬을 주었다.


해동성국

 

10대 선왕 때에는 흑수 말갈 정벌, 신라의 영토도 일부 차지하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때보다 두 배 가까이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넓은 영토와 융성한 문화를 가진 발해를 당나라는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한반도 북쪽은 발해가, 아래쪽은 신라가 나라를 이루어 이 때 역사를 남북국시대라고 한다.

문화의 면에서는 발해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 문화가, 문왕때부터는 당나라 문화가 널리 퍼졌고

지방에는 말갈족의 문화가 널리 퍼져있었다.

발해의 영토가 너무 넓어서 중앙의 힘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다보니 각 지방마다 고유한 문화가 남아있었고 중앙문화와 섞이지 못해 이후 발해의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발해의 멸망

 

907년에 당나라 멸망, 통일 신라도 세개의 나라로 분열되면서 동아시아의 격변의 시대가 열렸는데 

해동성국 발해도 이들과 함께 쇠퇴하기 시작했다. 

반면 유목생활을 하던 거란족이 무섭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거란족장 야율아보기가 발해에 쳐들어와 한달만에 발해를 멸망시켰다.

발해도 예전 고구려 유민들이 그랬던것처럼 발해 부흥운동을 여기저기서 벌였지만 중심세력이 없어서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거란의 횡포를 피해 많은 발해 주민들이 고려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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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과 관련해선 거의 배달음식으로 먹고 있던지라

찜닭을 집에서 해먹는건 이번에 제 인생에 두번째 있는 날이었습니다 ㅎㅎ

고공행진하는 물가 때문에 

배달음식 시켜먹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더더욱 커져만 가고...또르르... 

물가가 안정될 때까지는 부지런히 집밥을 해먹어야 할 것 같아요.

 

만개의 레시피로 했는데, 푸드 인플루언서 레시피 저리가라! 하는 맛이었어요.

찜닭하면 딱 떠오르는 맛!

그 정석적인 맛이라서 아주 만족했던 레시피였어요.

재료: 닭 (중~대) , 감자 3개, 당근 1개, 양파 1개, 당면 한 줌, 대파 반 대는 꼭 준비해주세요.

원래 레시피에는 오이도 있었는데, 오이 값도 많이 올라서 ㅜㅜ 그냥 뺐어요.

1. 당면 한 줌은 찬물에 1시간 이상 충분히 불려줍니다.

2.  깨끗히 씻고 잡내를 제거한 (우유나 쌀뜨물에 넣고 제거) 닭을 물에 넣고 미림 3스푼을 넣고 팔팔 끓입니다.

3. 끓기 시작하면 닭을 꺼내고 물을 다 버려주세요. 

4. 물 4컵, 진간장 13스푼, 디카페인 커피 1스푼을 넣고 10분 정도 끓여줍니다.

(원래 레시피는 그냥 커피 1스푼인데, 저 카페인 민감자라 디카페인 가루 커피로 대체했어요)

5. 설탕 3스푼, 물엿 6스푼 넣고 닭이 익을때까지 더 끓여주세요.

6. 닭이 거의 다 익어갈 즈음 야채를 다 넣어주세요.

7. 다진마늘 3스푼, 캐러멜소스 1스푼을 넣고 끓여줍니다.

8. 대파, 매운맛 첨가를 하려면 고추1개, 불린 당면을 넣고 

딱 2분 30초만 더 끓인 후 후추 톡톡하고 불에서 내립니다.

-

사람마다 선호하는 간이 다르니 좀더 단짠으로 드시고 싶으시면 간장과 설탕을 조금씩 더 첨가하셔도 됩니다.

 

사진 못 찍는 똥손이라 사진상으로는 그닥 먹음직스러운 때깔이 아니지만

정말 정말 맛있게 먹은 찜닭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뺀 레시피말고 오리지날 레시피 원하시는 분을 위해 링크 걸어둘게요

https://www.10000recipe.com/recipe/6880798

 

이제 찜닭은 외식 메뉴로 안해도 될 것 같아요.

집에서도 충분히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까요 ^^

이웃님들도 맛있는 집밥 드시고 오늘은 더욱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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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000년쯤 나일 강 유역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일 강 유역은 물이 풍부해 살기가 좋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긴 나일강을 따라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나일강은 해마다 주기적으로 물이 불어나 넘쳤는데 물이 빠지고 나면 상류에서 떠 내려온 검은 흙이 하류에 쌓였다. 그 흙은 매우 기름져 곡식이 잘 자라서 잉여 농산물도 많이 생산되어 사람들은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물이 너무 넘칠 때를 대비해서 둑을 쌓고 물이 가물때를 대비해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일 강 범람을 예측하기 위해 별을 관찰하였고 관찰을 기록하기 위해 문자도 만들었다.

이렇게 기원전 3000-4000년쯤 나일강 유역에서 이집트 문명이 꽃피우게 되었다.

살기 좋은 나일강 유역에 인구가 늘어나자 이를 지휘할 리더가 필요해졌다. 나일강가에는 지도자가 다스리는 여러 마을이 생겼고 서로 땅과 재산을 차지하려고 싸우면서 작은 왕국들이 만들어졌다.

기원전 3200년쯤에는 하이집트와 상이집트 두 개의 커다란 나라만 남았다.

하이집트는 비옥한 강의 하류, 상이집트는 상대적으로 척박하고 고립된 강의 상류에 위치해있었다.

하이집트는 도시들끼리 싸우는 바람에 나라가 혼란스러웠는데 그 틈을 타 기원전 3100년쯤 상 이집트의 왕 메네스가 하 이집트를 점령하여 이집트를 통일했다.

이집트는 사막과 바다로 둘러싸여있어 다른 나라의 위협없이 평화로웠다. 

메네스가 이집트를 통일하고 500년이 지나 더욱 안정되고 힘이 커진 고왕국 시대가 열렸다.

파라오 덕분에 더욱 살기가 좋아지자 백성들은 파라오를 더욱 믿고 따랐다.

파라오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무덤을 크게 만들기 시작했고 이것이 피라미드의 시초였다.

파라오 쿠푸는 수십년간 피라미드를 만들었을 정도로 규모가 큰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고대 이집트 사회는 피라미드처럼 신분사회도 피라미드형이었다.

파라오 밑에 제사장,재상,장관,서기등의 관리

그 밑에 장인, 군인, 무희

그리고 농민, 노예순으로 계급이 있었다.

기원전 2200년경 이집트에 심한 가뭄이 들었고 사람들은 파라오를 원망하고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방관리들도 파라오의 명령을 듣지 않았고 100여년간 혼란이 계속 되었다.

멘투호테프 2세가 이 혼란을 잠재우고 이집트를 재통일해 중왕국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한번 흔들린 파라오의 권위를 되찾지는 못했다.

세누스레트 1세는 외적 격퇴, 누비아 점령으로 이집트를 다시 부강하게 하고 이때부터 100여년간 다시 한번 번영을 누렸다.

이집트의 홍수와 가뭄의 반복으로 파라오의 권위가 떨어져있을 때 힉소스 사람들이 말이 끄는 전차와 청동 무기를 앞세워서 쳐들어왔다.

이집트 파라오는 나일강 상류로 쫒겨나 힉소스에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고 누비아도 이집트로부터 독립하여 쿠시 왕국을 세우고 힉소스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힉소스가 150여년간 발전하는 동안 이집트는 힉소스를 몰아내고 다시 영광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0년 동안 전쟁준비만 해왔던 파라오 아흐모세는 전차와 무기, 커다란 배등을 만들어 전쟁을 준비했고 힉소스 정복, 팔레스타인 차지, 쿠시 왕국 (누비아) 정복을 차례로 해내며 다시 한번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번성하는 이집트를 만들었다.

기원전 1470년쯤은 최초의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가 나왔다.

하트셉수트의 뒤를 이어 파라오가 된 투트모세 3세는 이집트의 강력한 파라오 중 한 명이었다.

반란지역 카데시를 잠재우고 페니키아 도시 정복을 하며 이집트를 지중해와 서아시아지역에서 가장 크고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투트모세3세는 제사장과 손을 잡아 자신의 권위를 높였는데 그 뒤 몇 명의 파라오를 거치며 제사장의 힘이 너무 커져버렸고 파라오의 권위까지 넘보게 되었다.

아멘호테프 4세는 이크나톤이라 이름을 바꾸고 종교개혁을 통해 제사장 권력을 누르려 했으나 실패했다.

뒤를 이은 투탕카멘도 제사장의 힘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

하지만 차츰 파라오들은 다시 왕권을 회복해갔으며 람세스2세때에는 영광스러운 이집트의 전성기를 또한번 맞이하게 되었다.

철제무기를 가진 히타이트를 이길수는 없었기에 동맹관계를 맺고 다른 나라들과도 조약을 맺어 여러나라의 공주와 결혼해 많은 부인을 두었다.

람세스 2세는 도로를 닦고 도서관 건립, 아부심벨 신전 건축 등으로 화려한 이집트 문화를 만들었다.

이집트는 람세스 2세가 죽고나서 리비아와의 전쟁, 히타이트 제국을 무너뜨린 바다 민족과의 전쟁으로 국력을 많이 소모해버렸다.

그 뒤 누비아와 아시리아 왕들의 지배를 받아 외국인 왕의 시대를 겪었고 기원전 525년에는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정복했다.

페르시아가 200년이나 이집트를 다스렸는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를 몰아냈다.

페르시아를 미워했던 이집트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를 파라오로 추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이름을 따 이집트의 도시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수도로 삼았다.

갑작스러운 알렉산드로스 왕의 죽음으로 부하인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무려 300년동안 이집트를 다스렸다. 

지중해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여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더욱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로마가 지중해 연안의 모든 지역을 정복하고 이집트만 남겨두고 있었을 때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해 미모로 카르사르를 사로잡는다.

카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로마의 후계자로 세우려고 했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계획이 틀어진다.

로마의 새 실력자 안토니우스도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해 함께 이집트를 지키려고 하고 

새로 권력을 잡은 로마의 옥타비아누스와 계속 맞섰으나 로마에 패배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끝내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국 이집트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고대 이집트 문명을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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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가본 남해.

이번 여름 휴가는 일광해수욕장에서 물놀이

남해 상주 은모래비치에서 물놀이 하는 걸로 야무지게 보냈습니다. 

같은 하늘이어도 

휴가 떠나는 날 하늘은 더 맑고 화창한 것 같은 느낌이죠.

남해 가는 길, 처음 들어보는 지역이름 발견하는 재미로 열심히 달렸어요.

미친듯한 풍광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버려 아쉽게 사진도 놓쳤지만

그래도 예쁜 바다 사진은 건졌습니다.

상주은모래비치 가는 길에 도로에서 바다와 어우러진 마을이 내려다보이는데...진짜 말도 안되는 풍경이었어요.

작고 예쁜 마을이 형성되어있고 그 앞에 푸른 바다가 찰랑이고 있는 풍경이었는데..그걸 못찍어서 ㅜㅜ

다음에 꼭 다시 가야겠다고 맘 먹어봅니다.

혹시 서울사람들은 '남해'를 잘 몰라서 제주도를 가는것이 아닐까..싶게 

너무 예쁜 남해에요.

제주도도 가봤지만 남해도 뒤지지않는 아름다움을 가졌어요.

상주 해수욕장

지금은 이름을 바꿔서 상주 은모래비치인데요.

파라솔 대여가 가능하지만 해송나무 그늘이 무척 많기 때문에 파라솔을 굳이 대여할 필요는 없더라구요.

시원한 해송나무 그늘에 돗자리 깔고 테이블 두면 무료로 상주해수욕장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어요.

 

매점도 하나 있어서 출출할 때 간식 정도 사먹을 수 있고

짜장면, 치킨 같은 건 배달도 됩니다.

기장 일광해수욕장의 물은 엄청 찬데

남해 상주해수욕장 물은 그거에 비하면 아주 따뜻한 편이에요.

바닷물이 미지근해서 입수하기 고통스럽지 않고

은모래비치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래가 모래가 아주....거의 밀가루 수준으로 고와요.

 

집에서 아무리 래쉬가드를 빨아도 모래가 계속 나오는 매직을 경험하실 수 있어요.

저흰 유료샤워장 이용안하고 바로 귀가해서 더더욱 모래 처리가 어려웠는데

왠만하면 유료 샤워장에서 1차 샤워와 래쉬가드 빨래를 하고 오셔야 집에서 추가적인 일을 더실수 있을거에요.

오전 9-10 시 가량이 밀물 타임이었는지 이때 물이 제일 많이 들어와 있었고

점심 지나니 물이 많이 빠지더라구요.

근데 썰물때가 물이 더 깨끗해서 그런지 점심 이후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어요.

저흰 오전 타임 놀고 왔는데요.

모래가 너무 너무 고와서 걷기만 해도 모래가 다 뜨는바람에 물은 탁하게 보이더라구요. 물 자체는 맑은 물인데 모래 땜에 뿌연거 있죠?

그럼에도 물고기들이 해안가까지 들어와서 노는 바람에 물고기 구경도 하고 재미졌어요.

일광 해수욕장은 파도가 거의 없는데

상주 은모래비치는 파도가 꽤 있어서 좀 더 다이내믹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어요.

너무 어린 아가들은 파도 때문에 놀기 힘들것 같고 어린이 이상 되어야 재미지게 놀 수 있을 듯 합니다.

 

한번 해수욕장에 맛을 들이니 워터파크를 안 가게 되네요.

물도 깨끗하고 워터파크보다 덜 혼잡하고 비용도 훨씬 덜 들고 자연을 즐겨서 힐링지수는 더 배가 되는 느낌이라 

앞으로도 여름 휴가는 바닷가 물놀이로 쭉 채워질 것 같습니다.

 

상주 은모래비치에서 즐거운 바캉스! 다음 여름 휴가 장소로 고려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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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인스타 브레인'이라는 책을 소개해드립니다.

개인적으로 밤에 양치할 때 핸드폰을 보면서 양치하는 습관이 있던 저는 '인스타 브레인'을 읽고 나서 정말 핸드폰을 보고 싶은 엄청난 충동과 싸우며 핸드폰 없이 양치를 하도록 노력하고 있는 중이에요 ^^;;

인스타 브레인이라는 책을 집어드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책의 앞머리를 조금 요약해봤어요.


스웨덴에서는 성인 10명중 8명이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인류는 자신의 역사중 99.9%에 해당하는 시간동안 수렵채집인이었다. 당연하게도 우리 뇌는 그 생활방식에 맞게 진화했다.실제로 우리 뇌는 최근 1만년동안 변하지 않았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수면, 신체 활동 그리고 사람들과의 유대감은 명백하게 우리의 정신건강을 지켜주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가 갈수록 줄어드니, 우리의 기분은 나빠질 수밖에 없다.

매분 매초 광고를 보여주고 제품을 구매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기업들은 이미 우리의 뇌를 해킹했다.

기업의 목표는 최대한 우리의 시간을 뺏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최대한 오래 SNS에 붙잡아두려고 노력한다.

많은 기업들이 뇌의 보상 시스템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행동과학자와 신경과학자를 고용해 연구하고 있다.

SNS는 헤로인과 맞먹을정도로 중독성이 있다.

멀티태스킹을 하는 사람의 최종결과는 언제나 늘 더 나빴다.

피실험자들은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의가 분산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 핸드폰 뿐 아니라 컴퓨터, 태블릿 .. 심지어 충격적이었던 것 이리더기조차도 ..

그 어떤 디스플레이도 결국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아날로그의 힘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리고 지금 보는 컴퓨터, 핸드폰을 멈추고 잠시 밖을 거닐거나 달리고픈 충동을 느끼게 합니다. 

하루종일 핸드폰을 쥐고 있는 분

컴퓨터나 태블릿 조작 시간이 긴 분

종이책보다 e리더기로 책 읽기 좋아하시는 분

그리고 운동 안하시는 분 ^^

들께 꼭 꼭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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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드 제국

수메르 도시 국가들이 서로 전쟁을 하느라 쇠약해지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셈족의 사르곤이 쳐들어왔다.

사르곤 왕은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을 하나씩 정복해나가 수메르 지역을 통일하고 메소포타미아에 최초의 통일 제국인 아카드 제국을 세우게 된다.

강한 군대를 만들고 수도 아카드를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아카드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하였다. 아카드제국은 다른 나라와 활발한 무역활동도 하였다. 

사르곤 대왕의 손자 나람신 왕때 아카드 제국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나람신 왕이 죽은 후 이민족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바빌로니아

아카드제국이 망하자 메소포타미아에는 다시 작은 왕국들이 서로 힘을 다투어 영역싸움을 했다.

작은 왕국 중 하나였던 바빌론에 함무라비 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신중한 전략과 외교술을 이용해 메소포타미아지역을 재통일했다.

함무라비왕때부터 바빌론 왕국에서 바빌로니아 제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함무라비왕은 사회를 안정시키고 문화를 부흥시켜 바빌로니아 제국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기원전 1595년 히타이트족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히타이트 제국

중앙아시아에 살던 히타이트족이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강력한 전차 군대를 가지고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여러나를 정복했다.

전차와 우수한 철제무기덕분에 200년 가까이 오리엔트 지역의 최강자가 되었다.

기원전 1200년 경 히타이트제국은 이름 모를 민족의 침략으로 갑작스럽게 멸망했다.

 

페니키아

셈족 중 일부가 지중해 동쪽에 자리잡고 항구를 중심으로 도시 국가들이 생겨났는데 이 국가들의 연맹이 페니키아였다.

페니키아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길목에 있어 무역에 유리하였다.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힘이 약해지자 그 틈을 타 기원전 1100년 쯤 독립했다. 그 후 지중해를 누비며 해양 무역을 독차지 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페니키아는 배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고 알파벳을 발명해 문자 문명을 널리 퍼뜨렸다.

기원전 9세기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아 쇠퇴하기 시작했다.

 

헤브라이 왕국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사람들은 다신교를 주로 믿었는데 헤브라이 사람들은 야훼라는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교를 믿었다.

힉소스족에게 협력하여 이집트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는데 힉소스 왕조가 물러나자 이집트의 핍박을 받았다.

이집트 왕이 헤브라이족의 남자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했는데, 바구니에 담겨져 살아남은 남자아이가 있었고 그 아기가 헤브라이 민족의 영웅 모세였다.

모세가 헤브라이사람들을 이끌고 야훼가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갔으나 그곳은 이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부족이 살고 있었고 가나안 땅을 두고 다툼이 시작되었다.

헤브라이왕국의 다윗왕은 가나안의 여러부족을 통일,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헤브라이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이 즉위하고 국방, 경제, 문화를 발전시켜나갔다.

하지만 대규모 건축사업과 군대 증강으로 과도한 세금을 걷고 백성들의 노역을 시키는 바람에 불만이 커졌다.

솔로몬 왕이 죽자 내란이 일어났고 거듭되는 혼란으로 북부는 아시리아제국에 의해, 남부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다.

 

아시리아

강력한 철제 무기와 군사력으로 기원전 750년전 부터 시리아, 페니키아,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이집트마저 정복했다.

아시리아 전사들은 정복한 도시에 불을 질러 철저하게 파괴시켰다.

반란자는 잔인하게 죽였다. 

 

신바빌로니아 제국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칼데아 사람들이 세력을 키워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고 바빌로니아 제국의 영광을 찾기 위해 신바빌로니아 제국으로 이름짓고 나라를 세웠다.

네부카드네자르2세는 무역 도시를 정복하고 국제 무역을 손에 넣었으며 화려하게 신전과 제단, 건축물을 세웠다.

향수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 인공 산을 만들고 꽃과 나무를 심어 공중 정원을 지은 것이 유명하다.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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